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떻게 죽을 것인가 (Being Mortal : 죽는 것)

아틀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주)(서울) / 400쪽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노인들의 소원이 하나 있다. 구구팔팔이삼사(九九八八二三四), 아흔 아홉 살까지 팔팔하게 살고 2~3일 아프다가 죽고 싶다는 의미이다. 노인들에게 물어보면 십중팔구 죽는 것보다 아픈 것이 더 무섭다고 한다. 어쩌면 그 두려움은 죽음이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잃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속에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삶에 대한 계획은 많지만 자신의 죽음이나 그 과정에 대한 준비는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이 책은 노인들이나 불치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성공적으로 살기 위한 일관된 관점의 필요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들의 독립적인 삶에 대한 보장, 그로 인하여 잃게 될 수 있는 삶의 주도권, 치료 행위,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 등 이 모든 과정에서 의학과 기술의 태도와 위치에 대한 저자의 문제 인식과 해결책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마흔 다섯 살의 판사, 환자 이반 일리치의 고통에서 시작하여 가완디 박사(의사)의 임종까지 많은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임상의 사례로 소개한다.

노화나 질병은 넝쿨이 자라는 것처럼 점차적이면서 가차 없이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존중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일단 육체적인 독립성을 잃으면 가치 있고 자유로운 삶은 불가능하다는 개념을 별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심각한 질병이나 노환으로 사생활과 삶에 대한 주도권을 포기할 수 밖에 없을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노화 과정에서 우리 몸속의 예비 장치마저 모두 고장날 때 우리는 어떤 의학적 도움을 어디까지 받을 것인가? 늙고 병들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은 그 삶(병원이나 요양원에서의 삶)으로 생을 마감하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완화 치료든 연명 치료든 마지막 일주일 동안의 삶의 질을 누가 결정할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인간은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이 듦, 병듦... 자연스러운 인생의 과정이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는 중요하다. 무엇보다 그것을 보는 관점과 이해도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출발이 될 수 있다. 이야기에 있어서는 결말이 중요하듯이 우리 인생의 이야기에서 마지막인 병듦과 늙음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첫째, 안전한 환경에서 더 오래 사는 것 이상의 우선 순위와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 둘째,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나갈 기회를 갖는다는 건 삶의 의미를 지속시키는 데 매우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라는 것 셋째, 우리의 마지막 장에 남아 있는 가능성을 혁신적으로 바꾸기 위해 제도와 문화 그리고 대화 방식을 변화시켜 나갈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고 차원 높은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우리 삶의 질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몰이해가 한 개인에게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노인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 중에서 일상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중요한 부분이다. 죽음을 앞 둔 마지막 순간에 인간이 진심으로 바라는 게 뭘까?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끝까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 자신의 정체성과 충성심을 흩트리지 않고 평화롭고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게 아닐까! 인생의 끝에서 내 인생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얘기를 가족과 함께 나누고 자신의 원하는 방식으로 살다가 가족에게 둘러 싸여 평화롭게 임종을 맞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용기는 우리가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지식을 직면할 수 있는 힘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앞에서 반드시 나눠야 하는 대화를 통한 모색과 삶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요구된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 앞 둔 죽는 자의 역할을 마지막까지 남겨 두는 것은 꼭 필요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사람들과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챦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끝까지 미치고 싶어 한다.
한 사람의 종말이 가까워오면 혹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시점-많은 경우가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는 시점이 온다.-이 오더라도 평소 이 문제를 온전하고 충분히 얘기해 두었다면 그건 타인의 결정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을 따르는 게 되는 셈이 될 것이다.

현대 의학과 기술은 매우 높은 차원의 진보와 발전을 이루었다. 그래서 현대 의학은 우리 삶의 궤적을 생물학적으로 변화시켰고 이 궤적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문화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인간 수명의 연장이라는 괄목(刮目)할 성과를 이루었다. 암이나 에이즈 그리고 기타 불치병이라고 여겼던 많은 종류의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화나 질병으로 인해 심신의 능력이 쇠약해져가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 할 필요가 있다. 너무 깊이 개입해서 손보고 고치고 제어하려는 욕구를 참아야한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풀 수 있는 생명의 실타래가 정확히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의 연한을 몇 개월이니 1~2년이니 하는 수치로 표현하는 데는 신중하고 또 신중하자는 얘기다. 자칫하면 인간의 안전과 생존을 우선시하는 의학계의 언어가 범할 수 있는 오류, 죽음(삶)에 대한 몰이해로 삶(죽음)에 대한 잔인함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자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평상시 죽음을 직시하거나 성찰하지 못해서 죽음 앞에서 허둥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죽음은 실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죽음이 우리의 적일지는 모르지만, 사물의 자연스런 질서이기도 하다.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다.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삶에는 끝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조상들의 DNA와 기질이 합류한 만남의 장소 같은 존재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끝까지 자신의 정체성이나 충성심을 희생하지 않고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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