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사랑이
조영남 지음 / 한길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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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조영남의 주저리 주저리

그 주저리 실력이 왠만한 글쟁이 뺨친다.

노래쟁이가 그림쟁이 뺨치고 글쟁이까지 뺌친다.

탈렌트를 타고난 진짜 광대 맞다!

 

그는 느낌 따라 산다.

나는 생각 따라 산다.

 

느낌 따라 사는 그에게 한 수 배운다.

느낌은 생각보다 진실하기에!

 

사랑 따라 사는 그에게 한 수 배운다.

사랑보다 귀한 것은 없기에!

 

사랑에 껄떡거리다가 대한민국 대표 바람둥이가 된 그에게

애인 없이는 못 사는 연예 9단 조영남에게 한 수 배운다.

사랑과 자유를 어떻게 한 주머니에 넣을 것인지에 대해.

 

그의 사랑론은 기본적으로 '다부다처' 주의다.

다음은 조영남의 농담

 

"한 남자가 세 여자, 가령 침실용 · 가정용 · 외부 과시용 등 세 타입의 이성 상대와 관계를 유지하고 여자 또한 동시에 세 타입의 남성과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게 바람직하다."

 

황당하신가?

글쎄 나는 황당하지 않다.

사실은 나 또한 다부다처 주의자니까.

 

조영남과 내가 다른 점은

조영남이 느낌 따라 사는 행동파 바람둥이이고

나는 생각 따라 사는 이론파 바람둥이라는 것 뿐이다~ㅎ

 

조영남은 머리에 갇힌 나보다 훨씬 용감하고 솔직하다.

그의 삶과 사랑은 나보다 훨씬 진하고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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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 - 호시노 미치오의 마지막 여정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임정은 옮김 / 다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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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대자연의 영혼을 품은 호시노 미치오

야영하다 곰에게 물려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야생 사진작가

그가 남동 알래스카의 원시림을 찾아 걷는다.

그것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들어가는 산책이다.

나의 산책은 어떤가?

 

"몇 년 전 이 근처에 왔을 때 브라더스 섬의 원시림을 산책한 적이 있다. 곧게 선 나무와 쓰러진 나무, 땅바닥과 바위를 온통 이끼가 덮어 숲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 같은 불가사의한 세계로 빚어내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숲속을 헤맸다. 고요 속에서 가만히 정지한 숲의 기운을 느끼며 이전엔 몰랐던 시간의 잣대를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까마득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숲은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숲의 움직임을 그때의 나는 애타게 감지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한때 이 땅을 가득 메웠던 빙하가 서서히 후퇴한 뒤, 고개를 내민 새 흙에 어느 새 나무가 자라고 깊숙한 골짜기에는 밀려드는 바닷물과 함께 고래가 돌아왔다. 지구의 역사는 같은 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문득 신비로운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숲도, 빙하도, 고래도 장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자연을 간직한 알래스카 타센티니 강, 인디언 말로 '큰까마귀의 강'을 따라 내려가는 호시노 미치오

그는 글레이셔 베어라 불리는 신비의 파란 곰을 만나고 싶다.

그는 그 곰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 곰의 숨결을 느끼고 이해한다.

나의 여행은 어떤가?


"강변의 모래밭 위에는 늑대 발자국이 종종 찍혔다. 흑곰이 야영장 근처를 몇 번 지나갔다. 하지만 글레이셔 베어는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글레이셔 베어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글레이셔 베어의 숨결을 피부로 항상 느꼈기 때문이다.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설령 내가 미끼를 놓아 글레이셔 베어를 유인한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글레이셔 베어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설령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나무에서, 바위에서, 바람 속에서 나는 글레이셔 베어를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 무수한 진실이 우리 앞에 벌거벗겨져 끌려 나오고 온갖 신비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지금, 보이지 않는 것에는 그래서 한층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박물관에 깨끗하게 보존된 토템 기둥이 아니라 숲속에서 비와 바람에 닳아 썩어 가는 토템 기둥이 더욱 신성한 힘을 지니는 것처럼 말이다.

 

보이는 것에 탐욕하는 서양 문명과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를 받드는 인디언 문명의 충돌

호시노 미치노는 퀸살럿 섬의 토템 기둥을 둘러싼 갈등에서 그것을 본다. 

나는 어느 편인가?


"20세기가 되고 강국의 박물관이 전 세계의 역사적 미술품 수집에 앞다퉈 나서는 시대의 막이 올랐다. 퀸샬럿 섬도 그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대다수의 토템 기둥이 강국에 의해 저들의 나라로 빠져나갔다. 살아남은 이이더족의 자손은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성한 장소를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지도록 방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인류사에 있어 중대한 가치를 지니는 토템 기둥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외부의 압력마저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그 땅과 깊은 연관을 맺은 영적인 것을 무의미한 장소에 가져가서까지 보존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언젠가 토템 기둥이 닳아빠지고 울창한 숲이 모든 것을 뒤덮어 소멸시켜도 상관없다. 그곳은 언제까지 신성한 장소로 남아 있을 것이다.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회와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둘 줄 아는 사회의 차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후자의 사상에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매력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의 기척이 한층 더 근원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크다. 더 깊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미묘하다. 더 신비하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근원적이다. 더 영적이다.

 

호시노 미치오의 아름다운 영혼이 담긴 사진과 글

1996년 8월 8일 곰에게 운명적인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의 기록을 담은 미완의 여행기

그의 <여행하는 나무>만큼이나 감동적인 책

 

호시노 미치오는 말한다.

"갖가지 동물, 한 그루 나무, 심지어 바람마저도 영혼을 가지고 존재하며 인간이 그들을 바라보듯 인간을 응시한다."

 

나는 그것을 아나?

동물과 나무와 바람의 응시를 느끼나?

- 약초를 따러 가는 날 아침에는 물만 마셔. 자기 몸을 식물과 같은 차원으로 만드는 거야. 마음속으로 식물에게 말을 거는 것도 중요해. 그렇게 몸과 마음이 식물과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 숲속에 들어가면, 내가 약초를 찾는 게 아니라 약초가 자기가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끌어주지. 정신을 차리면 약초 앞에 서 있는 거야. 식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갖고 있으니까. (클링깃족 인디언)

- 밤이 되었다. 숲 입구에서 살짝 들어간 시냇가에 텐트를 쳤다. 오랜만에 활짝 갠 밤이었다. 하늘을 우러르자 까만 나뭇가지 그림자 사이로 쏟아질 듯한 별이 보였다. 수많은 별들이 뿜어내는 빛을 마주할 때마다 시간이 지난 의미를 새삼 되묻게 된다. 수만 년 전의 별빛이 지금 내 눈동자를 비추고 있다. 몇 광년 떨어졌는지에 따라 저마다 다른 시간을 건너온 별빛들이다. 유장한 우주의 시간을 한눈에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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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부터의 영성
안셀름 그륀 지음, 전헌호 옮김 / 분도출판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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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사다리가 있다.

신이 놓으신 사다리다.

신은 나에게 어서 오라고 하신다.

거기 사다리를 타고 얼른 올라오라고 하신다.

 

이 사다리를 타려면?

 

맨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

거기서 땅을 딛고 한 칸 한 칸씩 올라야 한다.

 

사다리는 언제나 바닥에 있다.

두 발로 든든하게 땅을 디디고 서 있다.

그것은 허공에 매달려 있지 않다.

 

허공에 매달려 있다면?

그것은 가짜다.

내가 내 마음대로 매단 썩은 동아줄이다.

그것으로는 천국에 오를 수 없다.

한 발짝도 신에게 갈 수 없다.

 

나는 결국 밑으로 떨어질 것이다.

바닥까지 추락할 것이다.

거기 거친 맨 바닥에서 진짜 사다리를 발견할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 배우는 천국의 사다리 오르는 법 일곱 가지!


1. 너부터 알라


- 만약 네가 하느님을 알고 싶으면 먼저 너 자신에 대하여 알도록 하라.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 우리는 우리의 인간 존재로 내려옴으로써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있다.


2. 무의식의 심연으로 내려가라


- 자신이 처해 있는 구체적인 현장을 아는 것, 더 나아가서 자신의 무의식 세계까지 살펴봄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 겸손은 융에 의하면 무의식 세계와 관계할 것을 요청한다.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 세계를 거부하여 부수어버리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과장해 부풀어올리는 행위에 빠져들게 된다. 자신을 순교자, 예언자 또는 성인과 같은 전형적인 이상적 존재로 추앙받는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교만한 자는 흔히 윤리적으로 비참한 처지에 빠져들거나 죄 속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아래로 완전히 추락하는 과정을 겪어야만 치유될 수 있다.


3. 완벽에 멍들지 말라


- 완벽한 존재로서 완벽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밭에서는 오직 걱정에 가득찬 밀들만 자라게 된다.

- 이상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이상에 일치하지 못하는 자신의 실제 상황에 대하여 자주 자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내적으로 분열되고 병들게 된다.


4. 겸손하라


-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덕행이 아니라, 인간이 그 안에서 성숙해 가는 하나의 체험이다.

- 겸손하지 않을 때 하느님을 우리가 필요로 하는 조건을 채워주는 분으로 보기 쉽다. 그러므로 신비가들은 겸손을 강조한다. 겸손 없이는 신비가들이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위험에 쉽게 빠져 든다. 겸손 없이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차이를 쉽게 잊어버린다.


5. 바닥부터 올라라 


- 아우그스티누스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사다리"로 보았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내려오셨고, 그래서 우리는 그를 통하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듯이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교부들은 이 사다리의 양쪽 두 기둥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또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해석하고 있다. 베네딕도 성인은 영혼과 육신을 이 사다리의 두 기둥으로 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육신과 영혼 안에 하나의 사다리를 놓으셔서 우리가 당신께 올라가도록 하셨는데, 우리가 겸손 안에서 먼저 아래로 내려갈 때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6. 고통과 불행과 외로움을 받아들여라


- 우리는 큰 어려움을 겪을 때 실존에 대한 진정한 체험을 할 수 있다.

-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우리가 천사가 아니고 육체를 가진 존재로 이 땅 위에 태어난 존재란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 우리가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가지는 불행은 우리를 천국에다 매달아 놓는다.

- 만약 당신이 외롭다면, 그것은 당신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충분히 겸손하다면 당신은 결코 외로울 리 없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위신보다 더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아래로 내려와서 겸손하게 되는 법을 배워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결코 혼자 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융)

- 불안과 걱정은 우리가 잘못 설정한 삶의 방향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잘못 설정된 것이란 사실을 알려준다.

- 우리가 억압하거나 한쪽으로 밀쳐두는 것들은 한편으로 우리의 생명력이기도 하기 때문에, 억압하는 것과 한쪽으로 밀쳐두는 것이 많을수록 그만큼 우리의 생명력을 활기를 잃게 된다.


7. 믿고 내맡겨라


- 말라버린 텅 빈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아래로 내겨가는 길은 신뢰, 자신을 믿고 내맡기는 것, 자신을 내놓은 것, 일이 생겨나도록 두는 것 등을 거치게 된다.

- 아래로부터의 영성에는 언제나 세 종류의 길이 있다. 첫째 길은 생각과 느낌들과의 대화다. 둘째 길은 밑바닥까지 아래로 내려가 더 이상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고통스러운 최종점에서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는 것, 그리고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셋째 길은 하느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것, 나의 힘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하느님의 좋으신 섭리와 품에 나를 완전히 내맡기는 것이다.

- 유머는 '초월에 대한 하나의 표지'다.

-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실재적인 상황으로 내려오는 사람,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자리잡은 심연과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의 영역으로,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무능력으로 내려오는 사람, 자신의 인간성과 땅에 밀착해 있는 본성을 대면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향해 올라가게 되고, 참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 바리사이인들은 전형적인 위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했다. 이들은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모든 계명들을 완벽하게 준수하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행위를 통해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찾고 있었던 사실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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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테레사 카푸토 지음, 이봄 옮김 / 연금술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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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으면 어디로 갈까?

하늘 나라로 가겠지.

그 하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글쎄, 그곳은 좋은 곳이지. 아름다운 영혼의 나라지.

 

나는 하늘 나라를 모른다.

그러나 그곳은 좋은 곳이리라.

이보더 더 좋을 수 없는 곳이리라.

 

영혼들과 소통하는 영매 테레사 카푸토

그녀는 내가 죽으면 영혼의 나라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 아래와 같이 전한다.

 

안내자와 함께 우리의 영혼은 우리가 물질세계에서 한 여행을 되돌아보고 평가한다.

그리고 우리의 다양한 행동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보게 된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느끼게 한 고통, 행복, 혼란, 이해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삶에서 우리의 목적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도 살펴본다.

우리 영혼의 궁극적인 목적은 물질세계에서 많은 윤회를 거듭하며 우리의 영혼을 영적으로 발전시킬 배움을 얻는 것이다.

인내와 기쁨, 충실함, 이타심 등의 배움을.

또한 우리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이 배움을 얻도록 도움을 주고,

우리가 잘못한 것들을 좋게 만들고, 우리의 영혼이 신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성장하는 것도 포함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떠할지 대략적인 윤곽을 검토함으로써 그것을 준비한다.

삶은 신에 의해 창조되며 우리의 안내자와 함께 검토된다.

우리는 또 우리의 목표를 완수하게 해 줄 몸과 가족을 선택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름다운 영혼의 나라에서 한 시절 즐기고 공부하러 이 세상으로 온다.

이 세상에서 잘 놀고 공부 잘 하고 저 세상 가면 그곳에서 복습하고 공부하고 다시 이 세상에 온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은 다 학교다. 영혼의 학교다.

 

그러니 죽음은 없고 삶만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삶과 저 세상의 삶!

 

그러니 그대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우리는 언제나 함께 하는 거야.

영혼 상태에 있을 때 당신은 이 삶으로 돌아오는 걸 선택한다. 그래서 그 선택은 감정적인 인간으로서 한 것이 아닌, 신에게 더 가까이 가기를 위한 영혼으로서 한 결정이다. 당신의 영혼은 이유가 있어서 이 여행을 선택한 것이기에 운이 나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신은 왜 나에게 이러는 걸까요?"하고 물을 때 나는 미소 짓는다. 신도 당신의 영혼도 천진하게, 혹은 복수심으로 당신의 배움을 선택하진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당신의 배움의 일부다. 저쪽 세계에서는 비열함이나 억울함이나 분노가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신이기 때문이다.

용서를 배우는 것은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같다.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쓰레기는 쌓일 것이고, 초콜렛으로 뒤덮인 양파처럼 냄새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나중에 훨씬 더 많이 대청소를 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이 신의 집이라고 말하지만 그곳은 또한 나무랄 데 없는 당신의 거주지다. 천국은 우리 모두 온 곳이고 돌아갈 곳이다. 마침내 죽어서 저쪽 세계로 여행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영혼을 그것을 `귀향`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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