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정육점
김도연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한 대목]

 

“그리고 마침내 팔각구층석탑이 바라보고 있는, 큰절의 대웅전인...적광전 지하는 거대한 가축 우리였다. 돼지들, 소들, 닭들, 개들, 염소들, 토끼들, 오리들…각 각의 가축들이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는 게 아니라 모두 한데 있었다. 젖이 주렁주렁 매달린 돼지들이 모로 누워 새끼들에게 젖을 먹였다. 도식은 들어가지 않으려 버티는 옥자의 손을 잡고 가축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어미 돼지의 젖에 매달린 새끼돼지들은 거의 필사적으로 젖을 빨고 있었다. 송아지는 서 있는 암소의 배 아래에서 치켜든 주둥이로 축구공을 헤딩하듯 젖을 빨았다. 그 옆의 가축들은 교미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퇘지가 암퇘지의 엉덩이에 매달려 교미를 하고 있었고 수탉이 암탉의 등에 올라타 부리로 목덜미를 쪼았다. 암탉의 목덜미는 털이 모두 빠져 닭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암캐와 수캐는 특이한 방식으로 교미를 했다. 엉덩이와 엉덩이를 서로 맞대고 있었는데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자세였다. 옥자가 얼굴을 붉혔고 도식은 옥자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덩치가 큰 수소가 번쩍 뛰어올라 암소의 등에 올라타자 지진이 난 것처럼 건물이 잠시 흔들렸다. 또 한쪽 편은 출산의 시간이었다. 눈이 붉은 토끼들은 땅굴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줄줄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나왔고 둥지에 앉아 있는 암탉의 날개를 비집고 병아리들이 톡톡 튀어나왔다. 암탉은 다른 암탉들이 낳은 알들을 공평하게 품었는데 거기서 태어난 병아리들은 모두 그 암탉의 새끼들이었다. 염소는 새끼를 낳으면서도 매에- 울었고 소는 갓 태어난 새끼의 태를 먹고 정성껏 새끼의 온몸을 혀로 핥아주었다. 그 모든 장면을 유리 천장 위의 부처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도식과 옥자가 눈 한번 감았다가 뜨고 다시 가축들을 바라보니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얼굴에 소, 돼지, 염소, 개, 닭, 토끼, 오리의 형상을 한 반인반수였다. 도식과 옥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반인반수들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교미를 시작했다. 천장 너머 법당에서는 스님들이 예불을 드리려고 하나 둘 들어오고 있었다. 도식은 법당 지하의 바닥에 누웠고 그 위에 옥자가 올라앉은 자세여서 예불을 드리는 스님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살필 수 있었다. 지하에서는 위를 볼 수 있는데 위에서는 아래를 볼 수 없는 구조라는 걸 비로소 알아차렸다. 도식은 옥자를 사타구니에 앉힌 채 부처님의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사정을 했다. 절의 지하가 아닌 지상으로 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김도연, 《마지막 정육점》, 문학동네, 2015, 304-06면)

 

[더 읽기]

 

내가 소설가 김도연을 만난 것은 1987년 대학에서입니다. 나는 시간강사였고 김도연은 3학년 재학생이었습니다. 우리는 두서없이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꽤 나눴고 어지간히 술도 함께 마셨는데 그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이를테면 김도연은 몇 안 되는 내 〈젊은 친구〉의 하나입니다. 그 시절 기억나는 것 가운데 하나. 그는 내게 ‘로트레아몽’을 강의해달라고 했는데 네 불어실력 가지고는 무리라고 쫑코를 주면서 얼버무렸지만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을 실력이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일이 기억에 남은 것은 그의 문학세계를 읽을 수 있는 단초가 여기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글쓰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 시작할 때부터 ‘현실세계와 상상의 세계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섞이는 세계’를 보여주는 글을 쓰거나 보고 싶었는데 김도연이 언젠가는 그런 세계를 보여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게 바로 그때부터입니다. 그는 지금 현실세계와 상상/몽상/꿈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더 나아가 그 두 세계를 녹여 하나의 서사 안에 하나의 광경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한국의 소설가 대열에 우뚝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지막 정육점》이 그 결정판입니다.

 

드러난 삶과 숨겨진 삶을 합쳐서 따지면

인생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렇다

 

《마지막 정육점》,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직후부터 지금까지, 대관령 동서지역, 월정사와 상원사가 있는 오대산 인근 지역과 동해바다와 면한 강릉지역이 소설의 무대입니다.

휴전하던 해 가을 월정사에 들어와 이미 중이 된 우연과 그 얼마 뒤 5년간 예정으로 공부하러 들어온, 갓 시인이 된 종욱, 서울, 강릉, 월정사 방향이 갈리는 삼거리 〈월정거리〉에 있는 푸줏간 딸 정옥, 사하촌의 땅을 부치는 농부의 딸로 보육원 선생노릇을 하는 은실 사이에 얽힌, 치정관계까지 끼어있는, 삶의 모습, 그리고 대를 이어 우연-정옥 사이의 아들 도식과 종욱-은실 사이의 딸 옥자가 엮어내는 인생 쌍곡선이 소설의 서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연과 정옥, 종욱과 은실, 도식과 옥자 이들 말고 이 소설에는 색다른 등장인물이 있는데 월정사와 상원사를 뭉쳐서 만들어 낸 하나의 등장인물 〈절간〉입니다. 그리고 이 ‘절간’의 실체와 다른 등장인물들의 운명은 닮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대설주의보가 내린 어느 날 대관령 중턱, 결혼식 뒤풀이를 끝내고 돌아오던 도식과 옥자가 탄 차는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비탈 허공에 매달렸습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신랑 도식은 빼도 박도 못하고 집구석에 붙잡혀 살 게 뻔한 자기 신세가 기가 막혀 기절해 있는 신부 옥자를 차 안에 놔두고 줄행랑을 칩니다. “한 바퀴 돌고 올 테니 애 잘 키우고 있어.” 신부도 눈을 뜹니다. “결혼식 올린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도망을 쳐?” 상황파악이 끝난 옥자는 기가 막힙니다. “신혼여행 첫날에 도망을 쳤다...” “나쁜 놈!” 미끄러지는 차 안에서 조심조심 짐을 챙겨 나온 옥자는 눈보라 치는 새벽의 대관령 고갯길에서 비장한 얼굴로 내뱉습니다.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간다!” 이 소설의 시작입니다. 이제 소설은 도망치는 도식과 쫓아가는 옥자, 좀처럼 좁힐 수 없을 듯한 둘 사이의 심적心的 거리가 사라져가는 과정을 따라갈 텐데 동시에 이 소설은 교통사고로 망자가 돼 두 집안의 기억 속을 뒤죽박죽 돌아다니는 도식과 옥자의 동반 여행기이기도 합니다. 이제 과거의 세계를 함께 돌아다니는 도식과 옥자, “우린 지금 우리 부모들이 살아온 시간 속을 돌아다니고 있어”, 그들 둘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갈 텐데, 둘의 신혼 첫날밤에서 시작한 이 소설의 끝은 둘 사이의 자식 도옥과 그의 처가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오는 것으로 마감돼, 어쨌든 3대가 등장하는 ‘가족사’가 됩니다.

이 소설의 전개에서 등장인물들 사이에 정확하게 드러난 시점時點은 두 군데입니다. 앞서 말한, 중이 되려고 월정사를 찾아오던 우연이 월정거리 푸줏간에서 정옥을 만나던 1953년 “휴전되던 해의 가을”, 이때는 첫 세대가 등장하는 시기이고, 도식이 옥자의 작업에 말려, 시쳇말로 숫처녀를 따먹는 횡재성 사고를 쳐, 빼도 박도 못하게 되기 시작하는 날 1989년 8월 20일(“세 번째 일요일”), 이때는 다음 세대가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1953년에서 오래 지나지 않은 어느 해 4월 종욱이 공부를 위해 5년 계획으로 월정사를 찾아오는데, 1990년대 초반을 살다 사고가 난 도식과 옥자가 망자들의 기억의 세계로 들어와 떠돌기 시작하는 날은 바로 여기입니다.

양쪽 부모들의 기억의 세계에 올라탄 도식과 옥자는 부모들인, 우연-정옥, 종욱-은실, 우연-정옥-종욱, 종욱-은실-우연 사이에 얽힌, 몰라도 될 일들까지 시시콜콜 알게 됩니다. 사랑을 위해 승적을 버리는 우연, 정옥을 사랑하나 우연을 위해 내색을 않고 물러나는 종욱, 은실과 종욱 사이에 주고받은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들, 그러나 보기 좋은 일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대처승의 입장에 선 우연과 중도 아니면서 비구니의 입장에 선 종욱 사이의 갈등, 삼밭을 전전하며 욕정을 불태우는 비구니 우연과 처녀 정옥, 이처럼 불편한 일이 많았지만 그 압권은 나중에 종욱과 사랑하게 되는 은실을 우연이 겁탈하는 일입니다. 중이라서가 아니라 우연은 성품으로 봐 여자를 겁탈할 리 없습니다, 아닙니다, 남녀관계는 성품과는 관계없나 봅니다, “허리를 구부린 은실의 엉덩이를 본 순간” 돌연 겁탈의 수순을 밟습니다. 은실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숨기는 게 없어야 한다며 종욱에게 이 일을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은실도 변합니다. 딸 옥자와 우연의 아들 도식이 결혼할 때는 지난 일은 덮자고, 다만 자기는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정옥에게 제안합니다. 속속들이 들춰보니, 별 볼 일 없는 것 같던 부모들의 인생살이, 예외 없이 희비, 미추, 냉온, 완급, 강약의 쌍곡선으로 넘칩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삶,

예외 없이 희비쌍곡선이다

 

루소가 평생 추구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겉모습’과 ‘존재’가 일치하는 삶을 사느냐는 것이었는데 2백년도 더 지난 다음, 존 쿳시가 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사물들은 겉보기와 같은 때가 거의 없습니다.’ 겉과 속이 같게 살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살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고(물론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잘못 사는 삶의 척도일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이 소설은 부모들의 삶의 겉과 속을 들여다보면서 이들이 희비쌍곡선을 거치지만 실은 슬프고 아프고 성실하고 착한 삶을 살았다는 진실을 자식들이 깨달아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과정에 함께 하면서, 겉보기에 배운 데라곤 없고 막돼먹고 또 철딱서니 없는 도식과 옥자 또한 실은 사랑할 줄 알고, 슬퍼할 줄 알고, 배려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소설은 변형된 하나의 ‘십우도’일 수 있습니다.

발작의 《고리오 영감》의 중요 등장인물의 하나가 ‘돈’이듯이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의 하나가 ‘절간’입니다. 월정사를 창건하거나 중건한 큰 스님들의 사진을 모신 진영각眞影閣의 지하는, 사진들이 걸려있는 한 면만 뺀 나머지 “벽면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들이 줄줄이 갈고리에 매달려 있”는 푸줏간이고, [이 한 대목]으로 소개한 월정사의 대웅전인 적광전寂光殿의 지하세계는 “거대한 가축우리”입니다. 그 모습은 [이 한 대목]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진영각, 적광전(세상의 번뇌를 끊고 적정한 열반의 경계로 들어가 발휘하는 참된 지혜의 빛 이 가득한 전당)으로 드러나는 ‘절간’의 지상과 지하세계의 모습은 극한적으로 상반된 모습입니다. 여기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위험에 빠진 꿩, 닭들의 행태입니다. 김도연의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매나 독수리가 공격하면 밭에 있던 닭은 가까운 볏짚가리로 피신한다. 그러나 머리만 그곳에 파묻을 뿐 다른 부위는 모두 밖으로 드러나 있다.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죽어도 무섭지 않은 것이다......사랑의 뒤편에 있는 풍경이다”

볏짚가리 속의 닭 머리 모습이나 볏짚으로 가리지 못한 몸뚱이 각자만으로는 이 닭의 참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몸뚱이와 숨겨진 머리 전체를 동시에 보아야만 닭의 실체를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간’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상이나 지하세계 각자만으로는 ‘절간’의 참모습이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세계를 함께 보아야 ‘절간’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양자의 세계가 “극한적으로 상반된 모습”이라고 했는데 이제 그 상반성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지상의 세계가 위선이고 지하세계가 폭로된/감춰진 진실이 아니라 둘을 합쳐져 서로에게 스며들어 더 이상은 구분할 수 없도록 하나 된 모습이 참모습입니다. 등장인물로서의 ‘절간’의 캐릭터는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비구니였다가 대처승이 되고 살생하는 포수가 된 우연, 그는 은실을 겁탈하기까지 합니다. 살생에 겁탈까지, 그러나 우연이라는 인물을 그 속에 가둬놓거나 그 점만으로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됩니다. 포수가 되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신실한 불심이 살아있으며 은실을 겁탈했지만 자기가 생각해도 자신이 어처구니없으며, 정옥을 사랑하는 마음에 모자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종욱, 정옥, 은실의 캐릭터를 들여다 볼 때도 이와 마찬가지여야 함은 당연합니다.

소설에는, 우연의 자식인 도식이 자기 아버지가 은실을 겁탈한 것에 대해 딸 옥자에게 용서를 빌며, 종욱의 딸 옥자는 그 때문에 우연을 폭행한 자기 아버지에 대해 사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지상, 지하세계를 하나로, 겉과 속을 하나로, 숨겨짐과 드러남을 하나로 녹여낸 다음에라야 참모습을 알 수 있으며, 그만큼 참모습은 알기 어려우니 나는 물론 타자/타인의 참모습에 대해 쉽게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라는 작가 김도연의 정신세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나는 읽었습니다. 그 대목에서,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실은 용서 못할 것도, 용서를 받아야 할 것도 없으며, 용서할 수 있는 것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대단하지도, 대단하지 않지도, 숭고하지도, 천박하지도 않은, 살아온 그 자체로서의 〈그냥 삶〉이라는 작가의 깨달음도 나는 읽었습니다.

소설은 월정사-상원사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비극을 담아냈습니다. 1965년 여름에 일어난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 계곡조난사고와 1981년 10 ․ 27 불교법난을 문학성을 가미하여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 사고에서 살아남은 여대생을 “긴 머리 여대생”으로 끌어다 등장시키는데 아마 여승이 된 여학생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근거지가 될까 우려한 국군들이 오대산 상원사를 소각하려하자 소신공양하겠다는 각오로 절을 지켜낸, 1951년 입적한 한암 스님 말씀, 일생패궐一生敗闕(이번 생은 크게 망했다)로 마무리한 불교법난, 이 소설 덕분에 월정사-상원사의 이 두 비극은 이제 영원한 생명력을 갖게 됐습니다. 나는 ‘일생패궐’로도 이 소설을 족히 읽을 수 있겠습니다.

 

흙의 냄새가 물씬한,

강한 착지력을 지닌 김도연의 문체

 

《마지막 정육점》은 김도연이 자기의 문체를 한껏 펼친 작품이기도 합니다. 도식과 옥자 네들을 중심으로 보여준 대담하고 노골적이기까지 하지만, 느끼한 끈적거림의 늪에 빠지지 않는 성적 묘사를 빼놓을 수 없으며, 걷기예찬자 세례를 받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흙의 냄새가 물씬한, 강한 착지력을 지닌 문체는 이제 작가 김도연을 이야기할 때면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됐습니다. 예문은 도처에서 뽑을 수 있지만 이미 죽은 종욱이, 멧돼지의 몸을 빌려 나타나 포수가 된 우연과 만나는 장면, 사월초파일 행사를 성공적으로 끝냈다고 큰 스님이 두둑이 채워준 주머니로 하진부에 가서 놀다 월정사로 돌아오는 밤길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밤길 장면의 한 대목입니다.

“종욱도 무거운 바랑의 끈을 고쳐 메고 돌멩이가 고무신에 톡톡 차이는 신작로를 우연과 나란히 걸었다. 아무래도 혈기왕성한 두 청년이다 보니 장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금방 따라잡고 선두에 섰다. 마치 바람 고무신을 신고 있는 것만 같았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걷기만 했다. 물을 댄 논에선 개구리들이 울고 산에선 멧비둘기와 소쩍새가 경쟁하듯 울었다. 세상 만물이 짝짓기를 하느라 바쁜 봄밤이었다. 마치 몽롱한 꿈길을 걷는 기분이랄까. 논밭이 끝나면 마을이 나타났고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초가집 굴뚝에서 흘러나왔을 연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개가 짖었고 아기가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신작로에서 벗어난 길들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연결되었고 길과 길이 만나고 갈라지는 곳엔 장에 간 누군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속도감 있게 읽히면서도 흙냄새 짙게 풍기는 그의 문체는 나름으로 연구 대상입니다. 이제 마무리합니다. 지금까지 김도연은 네 권의 소설집과 네 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마지막 정육점》을 다 읽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제 〈김도연론〉을 쓸 때가 되었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금요일엔 돌아오렴》은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 열세명의 엄마 또는 아빠들의 인터뷰 모음집입니다. 여기에 실린 열 세편의 글들에는, 하나같이 기막힌, 참 슬픈, 아주 화나는 공통점이 있는데, 한편의 예외도 없이 애도의 감정을 넘어 자식들이 죽게 된 까닭에 대한 깊은, 씻을 수 없는 분노가 꽉 차있다는 점입니다. 책을 읽고 난 후 포스트잇을 붙여놓은 것을 보니 애도의 감정이 감동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아니라 분노의 감정을 쏟아 내는 부분들이었습니다.

 

“이웃은 아직 안 끝났냐고 해. 그러면 설명을 다 해주지.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어떻게 끝나냐고 그런데 밖에서는 그게 아닌가 봐. ‘너희들 보상 많이 받았잖냐. 너희들 10억씩 받았는데 더 받으려고 그런 거 아니냐?’ 이런 말 나오면 기가 막히지...언론 플레이가 진짜 무서운 거야. 우리도 사고 나기 전엔 언론에 나온 거 다 믿었어, 100퍼센트. 그런데 직접 당하니까 하나도 믿을 수 없는 거야. 왜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야당도 못 믿으니 유가족 힘으로 다시 뭉쳐보자고 했어.”(책, 63면)

“뭐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게 없어요. 다 쉬쉬해요... 움직이지 말라고 방송한 선장이나 선원도 그렇고 한 시간 넘게 구조요청을 했는데도 왜 해경이 안 구했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진도관제센터가, 정부가, 청와대가 그 시간에 뭘 하고 있었는지 유족들은 알아야죠...우리는 나라하고 싸우는 건데 온통 거짓말만 한 나라하고 싸우는 건데, 사람들은 한창 유병언 얘기만 하더니 이제는 돈 얘기만 해요. 우리는 진짜 돈 받은 거 없어요. 해수부에서 긴급자금으로 준 거 말고는 없어요.. 사람들이 자식 팔아서 돈 벌려고 그런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어떻게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저렇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식 아니라고 돈이랑 자식이랑 어떻게 바꿀까 싶고...”(책, 82-83면)

 

“2014년 10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마치고 국회를 빠져나갔다. 특별법 제정을 요청하며 ‘살려 달라’는 유가족의 외침이 손닿을 거리에서 들렸지만 대통령은 끝끝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창현 아버지 이남석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뒤를 이어 떠나려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지켜보던 이들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애원하는 창현이 아빠를 김무성 대표도 차갑게 외면하고 차에 올랐다. 아들이 죽은 이유를 알겠다고 나선 아버지의 간절함은 팽개쳐져 바닥을 뒹굴었다. 그날 두 사람이 밟고 지나간 것은 붉은 카펫이 아니라 유가족들의 피눈물이었다. 잔혹한 풍경이었다.”(책, 137면)

 

“팽목항에 하루 있어보니 그 분노를 이해하겠더라고요. 배가 몇 척이 나가서 구조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도 죄다 거짓말이었고. 거기 있던 가족들이 다 보고 있었던 거잖아요. 방송이 죄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아이들이 살아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아무 것도 못한 채 보고만 있었으니...”(책, 221-22면)

 

“내가 서해 페리호 사고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에요. 그런데 21년 후 세월호 사건을 또 겪은 거지, 내가. 그 얘기를 하는 건 지금이나 그 때나 바뀐 게 없어서야... 그때 만일 특별법이 제정됐더라면 세월호 참사가 났을까. 지금 와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때는 특별법을 요구하지 안 했잖아요. 2003년 대구 지하철 사고의 유가족들이 와서 그랬다고 하던데 ‘우리가 특별법을 못 만들어서 이런 사고가 난 것 같다고, 죄송하다’라고요.”(책, 275-76면)

 

이 안타까운 장면들의 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바로 〈왜〉라는 질문입니다.

 

“세월호는 전부 ‘왜’라는 물음에서 시작해서 ‘왜’라는 물음으로 끝납니다. 왜 한 아이도 살리지 못했을까, 왜 안개 낀 인천항에서 배는 떠났을까, 왜 배는 급선회했을까...왜 왜 왜. 사람들은 지겹다고 그만하라고 해요. 그런 사람들을 나는 좀 즐기고 싶어요. 나는 왜 그런 사람들을 못 만날까. 많이 만나고 싶어. 당신들 말대로 나 애새끼 팔아서 돈 벌고 싶은데 이 한 글자 왜라는 이 말에 답을 좀 줬으면 좋겠어. 그 답 들은 후에 돈을 벌게. 왜 아직도 아이들이 바닷속에 있는데 안 건지냐고 묻고 싶어.”9책, 187면)

 

마지막 대목이 들어있는 문지성 학생의 아버지 문종혁씨의 이야기 〈대통령과의 5분간의 통화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긴 고통〉을 첨부파일로 올립니다. 〈활과 리라〉식구들께 읽기를 청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아픔, 힘들지만 이를 이겨내야 살아남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의 마음상태가 이 책에 드러난 심적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보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참사의 유가족들은 애도기간에 접어들지도 못한 듯합니다. 틀림없이 살 수 있었을 아이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 까닭을 알아내지 못하는 한, 〈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는 한 애도의 감정은 들어설 틈이 없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유가족들은 개인의 삶 뿐 아니라 한 집안의 정상적인 삶의 리듬이 깨진 상태입니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충분히 얻지 못하는 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기 어려울 텐데, 이는 유가족들이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우울증’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점이 무섭습니다.

 

진상규명이 시급하게 이뤄져야 하는 까닭이, 무엇보다 진상규명을 바탕으로 다시는 유사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책을 만드는 것이지만, 또한 그를 계기로 참사의 유가족들이 애도의 감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집단적 우울증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2월 9일이면 세월호 참사 300일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방랑 - 랭보 시집 대산세계문학총서 123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지음, 한대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록 선술집]에서 - 저녁 다섯 시

 

여드레 전부터, 내 반장화는 찢겨 있었지,

길거리 자갈돌에.. 샤를루아로 들어가던 길.

― [초록 선술집]에서, 버터 바른 빵과

반쯤은 식어 었을 햄을 나는 주문했다네.

 

행복에 겨워, 나는 초록 식탁 아래로 다리를

뻗고, 벽 장식 융단의 아주 순진한 주제들을

바라보았지. ― 그런데 정말 근사했네,

엄청나게 가슴이 큰 처녀가 눈빛도 생생하게

 

― 이 여자, 입맞춤 하나로는 놀라지도 않지! ―

웃음 지으며, 버터 바른 빵에 미지근한 햄을

채색 접시에 담아 왔을 때,

마늘쪽 냄새 향긋한 장미색과 흰색의

 

햄을, ― 그러고는 커다란 내 맥주잔을 채워주었을 때,

늦은 햇살 하나로 금빛 물든 그 거품과 함께.

                                                           아르튀르 랭보

70년 10월

(랭보, 《나의 방랑 - 랭보 시집》, 한대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68면)

 

“1870년 10월, 1854년 10월 28일생이니, 랭보는 이제 만 16세가 되는 달에 이 시를 썼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물에서 태어나는 비너스〉처럼 여성혐오증을 보이는 시는 아니지만 읽기에 따라서는 사뭇 에로틱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입니다. 무전여행 수준의 빈털터리 방랑의 어느 날, ‘초록주막’이란 이름의 허름한 주막에 들어가 테이블에 앉아 지친 다리를 쭉 뻗습니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의 알록달록한 그림을 보며 긴장감이 풀려 마음의 아늑함에 빠지는데 〈가슴이 엄청 크고 발랄한 눈빛의 아가씨가 생글거리며〉 ‘색깔 좋은 접시에’ 담은 빵과 햄, 맥주 한잔을 가져옵니다. 이제 마음의 아늑함은 몸의 아늑함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환상 속에서이지만 랭보는 관능적 쾌락감에 한껏 빠져듭니다. 아가씨가 그의 ‘커다란 맥주잔’에 채워준 것이 맥주가 아니라 〈그녀의 거품〉이라고 표현할 만큼 황홀하게, 깊숙이. ☞ [더 읽기]”

 

[더 읽기]

 

‘환상곡’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랭보의 대표적 방랑시편 〈나의 방랑〉을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방랑시편입니다.

이 시에 나오는 자갈길에 찢어진 ‘내 반장화’가 말해주는 방랑의 형편은 ‘터진 주머니’가 달린 낡은 ‘내 외투’, ‘커다란 구멍이 하나’ 나 있는 ‘내 단벌바지’, ‘찢어진 신발’이 말해주는 〈나의 방랑〉의 방랑의 형편과 정확하게 겹칩니다.

 

현실에서의 방랑의 형편은 일치하지만 현실세계와 상상/공상/환상의 세계를 버무리는 수법은 두 시가 다릅니다. 〈나의 방랑〉은 시 전편에 걸쳐 앞에서 말한 현실세계의 사정과 상상의 세계의 형편(‘하늘 밑’, ‘뮤즈’, 큰곰자리‘, ’칠현금‘)이 섞여서 나옵니다. 시 전편에서 현실과 상상의 세계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초록 주막]에서〉에서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첫 두 연은 온전하게 현실세계이고 후반부 3행시 두 연은 포장은 분명 현실세계인데 상상/공상의 세계를 끌어들여야만 시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초록 주막]에서〉의 첫 두 연은 앞서 말한 대로 방랑생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870년 10월 시도한 두 번째 가출은 벨기에의 브뤼셀까지 가는데 첫 번째 가출 때처럼 호주머니 사정은 전혀 여의치 않습니다. 벨기에의 시골 샤를르로와의 한 주막(주막의 이름은 [초록 주막] 또는 [초록 주막에서]입니다)에 들어섭니다.

 

일주일 내내 자갈길을 걸어 반장화는 찢어먹었습니다. 버터 바른 빵과 이미 식었을 햄을 주문하고 주막 식탁 앞 의자에 주저앉아 다리를 바닥을 향해 쭉 뻗습니다. 워낙 피곤했었나요, 온몸이 풀리는 게 아늑해지고 아득해집니다. 벽에는 알록달록한 그림들을 수놓은 태피스트리가 걸려있습니다. 그림들이래야 우리나라 1960-70년대 시골 이발소 그림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가슴이 엄청 크고 발랄한 눈빛의 아가씨가 생글거리며 빵과 햄을 담은 색깔 좋은 접시를 가져옵니다.

이상이 초반 두 연의 서사입니다. 여기서 〈아가씨의 출현〉이 둘째 연 마지막과 셋째 연 첫 두 행에 걸쳐 있다는 점은 지적해둬야 합니다. 미리 말하면 이 시에서는 ‘아가씨의 출현’이 현실을 지나 상상의 세계로 들어오는 문턱입니다.

후반부 두 연의 서사는 이렇습니다.

 

음식을 가져온 아가씨 인상이 만만치 않습니다. 키스 한 번 한다고 겁먹을 인상이 아닙니다(이미 상상/환상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표지입니다). 수줍다기보다는 섹시한데다 충분히 당돌하다는 느낌입니다. 아가씨가 색깔 좋은 접시에 담아온 빵과 햄, 나는 굳이 ‘햄’만 다시 들먹입니다.

 

“반쯤은 식었을 햄” - “미지근한 햄” - “마늘쪽 냄새 향긋한 장미색 흰색의 햄”

 

미지근한 햄까지는 현실세계인데 마늘쪽 냄새를 풍기는 장미색 흰색의 햄은 이미 현실세계를 넘어섰습니다. ‘냄새’(마늘 냄새)와 ‘색깔’(장미색과 흰색)과 ‘물질’(햄)의 뒤섞임, 어울림(연구자들은 여기에서 적절하게 보들레르의 〈만물조응〉을 언급합니다), 나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마늘쪽 냄새 향긋한 장미색 흰색의

햄을, ― 그리곤 내 커다란 맥주잔을 채워주잖아,

지다 남은 햇살에 금빛으로 물드는 제 거품으로.”

 

아가씨가 내 맥주잔을 채워주는 게 맥주의 거품이 아니라 아가씨 자기의 거품입니다.

 

〈내 커다란 맥주잔〉과 그 잔을 채우는 〈아가씨의 거품〉, 직전으로 돌아가 〈햄〉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반쯤은 식었을, 미지근한 〈햄〉과 마늘쪽 냄새 향긋한 장미색 흰색의 〈햄〉은 이미 같은 햄이 아닙니다. 맥주의 ‘거품’이 아가씨의 ‘거품’으로 바뀌었듯이 ‘햄’ 또한 아가씨의 ‘햄’으로 바뀌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늑한 기분과 아득한 느낌이 하나 되면서 나는 상상/환상/공상의 세계로 넘어섭니다. 아가씨는 내가 수작을 걸어도 저항하는 게 아니라 도발하면서 오히려 내 욕망을 자극합니다. 색깔 좋은 접시는 알록달록한 태피스트리가 걸린 주막 안 배경과 대비되고 마늘 냄새를 풍기는 장미색 흰색의 햄은 아가씨의 육감적인 몸/살로 바뀝니다. 빈 ‘커다란 맥주잔’은 채워줘야 할 〈텅 빈 내 욕망〉이고 ‘거품’은 내 욕망을 채워줄 〈아가씨의 넘쳐나는 욕정〉입니다.

 

아마도 이 시는 랭보가 현실의 이면에 감춰놓은 공상의 세계를 제대로 찾아내 읽는다면 그의 시들 가운데 가장 에로틱한 시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시를 읽는 재미로는 최상의 것일 테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방랑 - 랭보 시집 대산세계문학총서 123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지음, 한대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에서 태어나는 비너스

 

양철로 만든 녹색 관에서 솟아나듯, 갈색 머리털에

포마드를 잔뜩 바른여자의 머리 하나가,

낡은 욕조에서, 천천히 그리고 멍청하게,

제대로 수선도 안 된 손상을 입고 떠오른다.

 

이어서 살진 회색 목덜미, 튀어나온

넓은 어깨뼈, 꺼지고 솟아오른 짧은 등,

이어서 퉁퉁한 허리 살이 날아오를 듯하고,

피하지방은 얄팍한 판지 조가들 같다.

 

등살은 약간 붉고, 그 모든 것이 이상하게도

끔찍한 맛을 낸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돋보기로 살펴야 할 기이한 것들......

 

허리에는 두 낱말이 새겨져 있다. 클라라 비너스

- 그리고 그 온몸이 꿈틀거리며 커다란 엉덩이 내미는데

항문에 돋은 종기로 징그럽게 예쁘다.

(랭보, 《나의 방랑 - 랭보 시집》, 한대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48면)

 

“나는 비너스 하면 우선 보티첼리의〈비너스의 탄생〉(1485년, 그림)을 떠올리는데 16세에 첫 시를 발표하고 21세에 절필한 시인 아르튀르 랭보, 그가 열여섯 살 때 만들어 낸 비너스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비너스가 ‘물(거품)에서 태어난 여신’이라는 점에서는 보티첼리와 랭보의 비너스가 같지만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미의 여신의 환대와 바람둥이 서풍의 신, 제피로스의 수작을 받으며 바다에서 조개를 타고 뭍으로 나타나고 랭보의 비너스는 ‘함석 관’을 연상시키는 ‘초록색 낡은 욕조’에서 망가진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비너스가 겉모습처럼 속마음도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보티첼리가 〈정숙한 비너스〉를 창조했다면, 랭보는 ‘끔찍한 냄새’를 풍기며 ‘큰 엉덩이,/ 항문에 종기가 돋아 징그럽게 아름’다운 〈클라라 비너스〉, 실은 ‘클라라 비너스’ 상표 마네킹을 패러디하며 비너스를 조롱합니다.

 

[더 읽기]

 

낡은 욕조에서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차례로 떠오르는 여자는 갈색 머리에 포마드를 잔뜩 바르고 있고 상체는 뒤틀려 기형입니다. 끔찍한 냄새를 풍기며 항문에 종기가 돋은 큰 엉덩이는 징그럽게 아름답습니다. 허리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클라라 비너스”. 라틴어 어원을 찾아가면 클라라clara는 ‘천상의’, ‘찬란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 생긴 모습과는 달리 ‘천상의 비너스’라는 이름이 생뚱맞기도 합니다.

 

많은 랭보 연구자들은 욕조에서 떠오른 여자, 클라라 비너스를 창녀로 여겼습니다. 이 시가 쓰일 당시 유럽에서는 기둥서방들이 창녀들 팔에 자기 이름을 문신해 넣는 것이 유행이었다 합니다. 클라라의 경우 다르기는 합니다. 이름이 있는 곳이 팔이 아니라 허리이고 기둥서방이 아니라 창녀 자신의 별명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자들은 한발 더 나갑니다. 아름다움의 여신, 욕정의 여신 비너스를 창녀에 비유하다니, 이를 랭보를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로 생각할 수 있는 근거의 하나로 삼지는 않았지만 여성혐오자라일 수는 있다는 혐의를 갖게 하는 중요한 단서로는 삼았습니다.

 

이 시를 되풀이 읽으면 한국어로 번역된 첫째 연의 마지막 행 “수선도 제대로 안 된 손상을 입고 떠오르니avec des déficits assez mal ravaudés”가 시 전체가 인체 부위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조 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 여자의 이미지 구성을 방해합니다. 생명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시구가 지나치게 사물을 묘사하는 듯해서일 것입니다. ‘망가졌으나 제대로 손보지 않은 몸’ 정도의 뜻일 텐데 황현산, 한대균, 곽민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비슷하게 한국어로 옮기고 있습니다.

 

“수선도 제대로 안 된 손상을 입고 떠오르니,”(황현산, 미출간)

“제대로 수선도 안 된 손상을 입고 떠오른다.”(한대균, 2014)

“제대로 수선도 안 된 손상을 입고서 떠오른다.”(곽민석, 2010)

 

내가 이 시의 한국어 번역을 부탁했던 황현산 교수께서는 “클라라 비너스”에 〈마네킹의 상표라고 생각해야 할 듯〉이란 〈주〉를 덧붙여 보내주셨습니다. 〈클라라 비너스〉가 창녀의 별명이라기보다는 마네킹의 상표이고 욕조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실은 망가진 마네킹일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 시의 해석에 중요한 장을 마련할 언급입니다..

랭보가 마네킹 상표가 ‘클라라 비너스’라서 비너스를 떠올린 것인지 그 상표와는 상관없이 그 뒤틀린 이상한 모습에 지독한 냄새까지 풍기는 물에 잠겨 머리만 내놓고 있는 마네킹을 보고 정숙하고 아름다운 기존의 비너스를 능멸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르카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5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민용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정한 유부녀

 

리디아 카브레라와 그녀의 흑인 소녀에게

 

그리고 나는 그녀를 강으로 데리고 갔는데

아가씨라 믿었으나,

남편이 있었지.

산티아고 축제의 밤

거의 약속이나 한 듯 했지.

불들은 꺼졌고

귀뚜라미들이 빛을 냈지.

거리의 마지막 모퉁이에서

그녀의 잠든 두 젖가슴을 만졌더니

그것은 히아신스 꽃다발처럼

돌연 피어났지.

풀 먹인 치마 내는 소리가

칼 열 자루가 찢는

비단 조각이 내는 소리처럼

내 귓전에서 사각거렸지.

은색 달빛도 비추지 않지만

그 아래에선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선

사방에서 개들이 짖어대고 있지.

*

찔레 덩굴과 갈대 가시나무,

골풀을 지나,

그녀의 머리칼 밑 진흙 위에

오목한 자리를 만들었지.

나는 넥타이를 풀었지.

그녀는 옷을 벗었지.

이 몸은, 권총을 찬 혁대를.

그녀는 네 겹 상의를.

수선화도 소라도

그녀의 살결만큼 삼삼하진 않고,

달빛에 비친 크리스탈도

그토록 눈부시게 빛나진 않지.

절반은 열기가 가득하고,

절반은 냉기가 가득해서,

놀란 물고기처럼 그녀의 허벅지가

내 밑으로 미끄러져 들었지.

그날 밤 나는 가장 근사한

말달리기를 했지,

고삐도 등자도 없는

자개 빛 암말을 타고.

그녀가 내게 한 말들을,

사나이로서 난 되풀이하지 않겠어.

이성의 빛이

나를 신중하게 하지.

나는 모래와 입맞춤으로 뒤범벅이 된,

그녀를 강으로부터 데려왔지.

공중에서는 백합들이 미풍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지.

 

나는 지금의 내가 그렇듯이

사나이답게, 진짜 집시답게 행동했지.

나는 담황색의 반짇고리를

그녀에게 선사했는데,

그러니까 내가 강으로 데려갈 때

아가씨인 척한

유부녀와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로르카 시선집》, 민용태 옮김, 을유문화사, 2008, 188-90면. 번역은 수정)

 

“내전 상태에 있던 스페인, 1936년 8월 16일 프랑코 장군의 민병대원들에게 끌려가 38세의 나이에 주검도 없이 사라진 가르시아 로르카, 20대 후반에 발표한 시들을 모아 출간한 《집시 이야기 민요집》(1928년)에 실린 〈부정한 유부녀〉는 그에게 대중적 명성과 개인적 당혹감을 동시에 안긴 시입니다. 이 시에는 출렁이는 관능, 노골적인 에로틱한 표현, 구체적인 성애의 이미지 게다가 완벽한 서사구조 등 온갖 요인들이 넘쳐납니다. 이 요인들이 바로 대중들을 열광하게 하지만 이 요인들의 이면을 독자들이 읽어내지 못하자 시인은 당혹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시를 에로틱 포에지로 뿐 아니라 그 안쪽에 숨어 있는 로르카의 비극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사회성 강한 정치시로 읽어낼 때 우리는 가르시아 로르카와 제대로 만나는 것입니다.”

[더 읽기]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의 〈부정한 유부녀〉는 이미 말했듯이 전 세계적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막상 로르카 자신은 난처해했습니다. 집시풍의 자유로움과 에로티슴이 넘쳐나는 이 시에 대중들이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첫째 연.

 “그리고 나는 그녀를 강으로 데리고 갔는데

아가씨라 믿었으나,

남편이 있었지.”

 

시작부터가 집시들의 성적 자유로움을 물씬 풍기는데, 불란서의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야드〉판 《로르카 전집》의 〈주〉를 보면 이 3행은 로르카의 창작이 아니라 스페인 남부 시에라 네바다 지방의 노새 몰이꾼들이 콧노래로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의 한 부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차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수호신인 산티야고(불어로는 생 작크)의 축제의 날 밤, 늠름한 집시는 집시여인을 유혹하고 그녀 또한 집시답게 뒤로 빼지 않고 당당하게 응합니다. 성희의 묘사가 노골적입니다.

둘째 연.

성애의 과정이 구체적이고 에로틱하게 묘사됩니다. 집시는 우선 풀숲을 지나 강가 으쓱한 곳에 편하게 누울 오목한 자리를 만듭니다. 둘은 각자 스스로가 옷을 벗습니다.

 “수선화도 소라도

그녀의 살결만큼 삼삼하진 않고,

달빛에 비친 크리스탈도

그토록 눈부시게 빛나진 않지.

절반은 열기가 가득하고,

절반은 냉기가 가득해서,

놀란 물고기처럼 그녀의 허벅지가

내 밑으로 미끄러져 들었지.”

 그리고 집시는 집시여인을 근사하고 다이나믹한 암말에 비유합니다. 황홀한 말타기에 열중합니다. 둘째 연의 마지막 두 행에서는 백합 향내가 진동하다고 함으로써 에로틱의 절정을 암시합니다.

 셋째 연.

‘반전의 드라마’가 개입합니다. 예상과는 달리 집시는 집시여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유부녀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트집을 잡아 반짇고리를 선물로 주면서 둘 사이를 끝냅니다.

 겉보기에 더 없이 ‘싱싱한’ 에로티슴을 보여주는 시이지만 로르카는 이미 첫째 연에서 죽음의 빛을 깔아놓고 있습니다.

스페인 최대의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휘황찬란한 불빛이 없습니다. 청각적으로 에로틱의 진수라 할 수 있는 “풀 먹인 치마 내는 소리”가 〈죽음〉을 상징하는 “칼 열 자루가 찢는 비단 조각이 내는 소리”에 비유됩니다. 더 나아가 로르카에게서 〈번식〉을 뜻하는 “은색 달빛도 비추지 않”습니다. 달빛을 쬐지 못하는 나무들, 자라기는 하지만 이미 이 ‘성장’에는 생산성이 거세돼 있습니다.

 첫째 연의 이런 맥락을 감안하고 둘째 연으로 넘어가면 여기에서 펼쳐지는 남녀상열지사가 상호적이 아니라 일방적인 것이 아닐까 머뭇거리게 됩니다. 이 의구심은 세 번째 연에서 현실이 됩니다. 집시가 집시여인에게 준 반짇고리를 ‘선물’이라고 했는데 이제 이 선물은 ‘화대’로 전락하고 집시여인은 ‘창녀’ 취급을 받습니다.

 나는 앞에서, 로르카는 멋진 에로틱 포에지를 쓰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 자기의 비극적 세계관을 숨겨놓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로르카는, 시인으로서든 인간으로서든,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섰습니다. 그에게는 일반 시민보다는 집시가 ‘약자’입니다만 집시라고 해서 다 같은 집시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서 ‘약자’인 집시 가운데에서 다시 ‘강자’와 ‘약자’가 나뉩니다.

 〈마초 집시와 집시여인〉.

 이 시는 유부녀였더라도 유혹했을 게 뻔하면서도 성적 욕망을 해소한 다음에 오는 허망함, 그녀가 유부녀라고 밝히지 않았다는 트집으로 그 허망함을 분노로 바꾸고 함께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집시여인을 창녀로 전락시킴으로써 더 심한 ‘약자’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면서 반대로 자신은 상대적으로 ‘강자’ 자리를 차지하는 비열하고 치사한 마초적 집시를 까발립니다. 이 시는 유부녀이면서도 결혼했다고 하지 않은 집시여인의 부도덕함을 드러내는 시가 아니라, 같은 집시이면서 그 가운데서 다시 더 처참한 ‘약자’ 쪽으로 내몰리는 집시여인의 슬픔, 참담함을 보여줍니다.

 이 시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에 로르카가 당혹스러워 한 것은 대중들이 시의 이면에 숨겨놓은 이런 〈시적 장치〉를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