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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정육점
김도연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이 한 대목]
“그리고 마침내 팔각구층석탑이 바라보고 있는, 큰절의 대웅전인...적광전 지하는 거대한 가축 우리였다. 돼지들, 소들, 닭들, 개들, 염소들, 토끼들, 오리들…각 각의 가축들이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는 게 아니라 모두 한데 있었다. 젖이 주렁주렁 매달린 돼지들이 모로 누워 새끼들에게 젖을 먹였다. 도식은 들어가지 않으려 버티는 옥자의 손을 잡고 가축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어미 돼지의 젖에 매달린 새끼돼지들은 거의 필사적으로 젖을 빨고 있었다. 송아지는 서 있는 암소의 배 아래에서 치켜든 주둥이로 축구공을 헤딩하듯 젖을 빨았다. 그 옆의 가축들은 교미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퇘지가 암퇘지의 엉덩이에 매달려 교미를 하고 있었고 수탉이 암탉의 등에 올라타 부리로 목덜미를 쪼았다. 암탉의 목덜미는 털이 모두 빠져 닭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암캐와 수캐는 특이한 방식으로 교미를 했다. 엉덩이와 엉덩이를 서로 맞대고 있었는데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자세였다. 옥자가 얼굴을 붉혔고 도식은 옥자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덩치가 큰 수소가 번쩍 뛰어올라 암소의 등에 올라타자 지진이 난 것처럼 건물이 잠시 흔들렸다. 또 한쪽 편은 출산의 시간이었다. 눈이 붉은 토끼들은 땅굴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줄줄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나왔고 둥지에 앉아 있는 암탉의 날개를 비집고 병아리들이 톡톡 튀어나왔다. 암탉은 다른 암탉들이 낳은 알들을 공평하게 품었는데 거기서 태어난 병아리들은 모두 그 암탉의 새끼들이었다. 염소는 새끼를 낳으면서도 매에- 울었고 소는 갓 태어난 새끼의 태를 먹고 정성껏 새끼의 온몸을 혀로 핥아주었다. 그 모든 장면을 유리 천장 위의 부처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도식과 옥자가 눈 한번 감았다가 뜨고 다시 가축들을 바라보니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얼굴에 소, 돼지, 염소, 개, 닭, 토끼, 오리의 형상을 한 반인반수였다. 도식과 옥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반인반수들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교미를 시작했다. 천장 너머 법당에서는 스님들이 예불을 드리려고 하나 둘 들어오고 있었다. 도식은 법당 지하의 바닥에 누웠고 그 위에 옥자가 올라앉은 자세여서 예불을 드리는 스님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살필 수 있었다. 지하에서는 위를 볼 수 있는데 위에서는 아래를 볼 수 없는 구조라는 걸 비로소 알아차렸다. 도식은 옥자를 사타구니에 앉힌 채 부처님의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사정을 했다. 절의 지하가 아닌 지상으로 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김도연, 《마지막 정육점》, 문학동네, 2015, 304-06면)
[더 읽기]
내가 소설가 김도연을 만난 것은 1987년 대학에서입니다. 나는 시간강사였고 김도연은 3학년 재학생이었습니다. 우리는 두서없이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꽤 나눴고 어지간히 술도 함께 마셨는데 그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이를테면 김도연은 몇 안 되는 내 〈젊은 친구〉의 하나입니다. 그 시절 기억나는 것 가운데 하나. 그는 내게 ‘로트레아몽’을 강의해달라고 했는데 네 불어실력 가지고는 무리라고 쫑코를 주면서 얼버무렸지만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을 실력이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일이 기억에 남은 것은 그의 문학세계를 읽을 수 있는 단초가 여기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글쓰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 시작할 때부터 ‘현실세계와 상상의 세계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섞이는 세계’를 보여주는 글을 쓰거나 보고 싶었는데 김도연이 언젠가는 그런 세계를 보여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게 바로 그때부터입니다. 그는 지금 현실세계와 상상/몽상/꿈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더 나아가 그 두 세계를 녹여 하나의 서사 안에 하나의 광경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한국의 소설가 대열에 우뚝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지막 정육점》이 그 결정판입니다.
드러난 삶과 숨겨진 삶을 합쳐서 따지면
인생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렇다
《마지막 정육점》,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직후부터 지금까지, 대관령 동서지역, 월정사와 상원사가 있는 오대산 인근 지역과 동해바다와 면한 강릉지역이 소설의 무대입니다.
휴전하던 해 가을 월정사에 들어와 이미 중이 된 우연과 그 얼마 뒤 5년간 예정으로 공부하러 들어온, 갓 시인이 된 종욱, 서울, 강릉, 월정사 방향이 갈리는 삼거리 〈월정거리〉에 있는 푸줏간 딸 정옥, 사하촌의 땅을 부치는 농부의 딸로 보육원 선생노릇을 하는 은실 사이에 얽힌, 치정관계까지 끼어있는, 삶의 모습, 그리고 대를 이어 우연-정옥 사이의 아들 도식과 종욱-은실 사이의 딸 옥자가 엮어내는 인생 쌍곡선이 소설의 서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연과 정옥, 종욱과 은실, 도식과 옥자 이들 말고 이 소설에는 색다른 등장인물이 있는데 월정사와 상원사를 뭉쳐서 만들어 낸 하나의 등장인물 〈절간〉입니다. 그리고 이 ‘절간’의 실체와 다른 등장인물들의 운명은 닮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대설주의보가 내린 어느 날 대관령 중턱, 결혼식 뒤풀이를 끝내고 돌아오던 도식과 옥자가 탄 차는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비탈 허공에 매달렸습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신랑 도식은 빼도 박도 못하고 집구석에 붙잡혀 살 게 뻔한 자기 신세가 기가 막혀 기절해 있는 신부 옥자를 차 안에 놔두고 줄행랑을 칩니다. “한 바퀴 돌고 올 테니 애 잘 키우고 있어.” 신부도 눈을 뜹니다. “결혼식 올린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도망을 쳐?” 상황파악이 끝난 옥자는 기가 막힙니다. “신혼여행 첫날에 도망을 쳤다...” “나쁜 놈!” 미끄러지는 차 안에서 조심조심 짐을 챙겨 나온 옥자는 눈보라 치는 새벽의 대관령 고갯길에서 비장한 얼굴로 내뱉습니다.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간다!” 이 소설의 시작입니다. 이제 소설은 도망치는 도식과 쫓아가는 옥자, 좀처럼 좁힐 수 없을 듯한 둘 사이의 심적心的 거리가 사라져가는 과정을 따라갈 텐데 동시에 이 소설은 교통사고로 망자가 돼 두 집안의 기억 속을 뒤죽박죽 돌아다니는 도식과 옥자의 동반 여행기이기도 합니다. 이제 과거의 세계를 함께 돌아다니는 도식과 옥자, “우린 지금 우리 부모들이 살아온 시간 속을 돌아다니고 있어”, 그들 둘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갈 텐데, 둘의 신혼 첫날밤에서 시작한 이 소설의 끝은 둘 사이의 자식 도옥과 그의 처가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오는 것으로 마감돼, 어쨌든 3대가 등장하는 ‘가족사’가 됩니다.
이 소설의 전개에서 등장인물들 사이에 정확하게 드러난 시점時點은 두 군데입니다. 앞서 말한, 중이 되려고 월정사를 찾아오던 우연이 월정거리 푸줏간에서 정옥을 만나던 1953년 “휴전되던 해의 가을”, 이때는 첫 세대가 등장하는 시기이고, 도식이 옥자의 작업에 말려, 시쳇말로 숫처녀를 따먹는 횡재성 사고를 쳐, 빼도 박도 못하게 되기 시작하는 날 1989년 8월 20일(“세 번째 일요일”), 이때는 다음 세대가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1953년에서 오래 지나지 않은 어느 해 4월 종욱이 공부를 위해 5년 계획으로 월정사를 찾아오는데, 1990년대 초반을 살다 사고가 난 도식과 옥자가 망자들의 기억의 세계로 들어와 떠돌기 시작하는 날은 바로 여기입니다.
양쪽 부모들의 기억의 세계에 올라탄 도식과 옥자는 부모들인, 우연-정옥, 종욱-은실, 우연-정옥-종욱, 종욱-은실-우연 사이에 얽힌, 몰라도 될 일들까지 시시콜콜 알게 됩니다. 사랑을 위해 승적을 버리는 우연, 정옥을 사랑하나 우연을 위해 내색을 않고 물러나는 종욱, 은실과 종욱 사이에 주고받은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들, 그러나 보기 좋은 일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대처승의 입장에 선 우연과 중도 아니면서 비구니의 입장에 선 종욱 사이의 갈등, 삼밭을 전전하며 욕정을 불태우는 비구니 우연과 처녀 정옥, 이처럼 불편한 일이 많았지만 그 압권은 나중에 종욱과 사랑하게 되는 은실을 우연이 겁탈하는 일입니다. 중이라서가 아니라 우연은 성품으로 봐 여자를 겁탈할 리 없습니다, 아닙니다, 남녀관계는 성품과는 관계없나 봅니다, “허리를 구부린 은실의 엉덩이를 본 순간” 돌연 겁탈의 수순을 밟습니다. 은실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숨기는 게 없어야 한다며 종욱에게 이 일을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은실도 변합니다. 딸 옥자와 우연의 아들 도식이 결혼할 때는 지난 일은 덮자고, 다만 자기는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정옥에게 제안합니다. 속속들이 들춰보니, 별 볼 일 없는 것 같던 부모들의 인생살이, 예외 없이 희비, 미추, 냉온, 완급, 강약의 쌍곡선으로 넘칩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삶,
예외 없이 희비쌍곡선이다
루소가 평생 추구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겉모습’과 ‘존재’가 일치하는 삶을 사느냐는 것이었는데 2백년도 더 지난 다음, 존 쿳시가 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사물들은 겉보기와 같은 때가 거의 없습니다.’ 겉과 속이 같게 살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살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고(물론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잘못 사는 삶의 척도일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이 소설은 부모들의 삶의 겉과 속을 들여다보면서 이들이 희비쌍곡선을 거치지만 실은 슬프고 아프고 성실하고 착한 삶을 살았다는 진실을 자식들이 깨달아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과정에 함께 하면서, 겉보기에 배운 데라곤 없고 막돼먹고 또 철딱서니 없는 도식과 옥자 또한 실은 사랑할 줄 알고, 슬퍼할 줄 알고, 배려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소설은 변형된 하나의 ‘십우도’일 수 있습니다.
발작의 《고리오 영감》의 중요 등장인물의 하나가 ‘돈’이듯이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의 하나가 ‘절간’입니다. 월정사를 창건하거나 중건한 큰 스님들의 사진을 모신 진영각眞影閣의 지하는, 사진들이 걸려있는 한 면만 뺀 나머지 “벽면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들이 줄줄이 갈고리에 매달려 있”는 푸줏간이고, [이 한 대목]으로 소개한 월정사의 대웅전인 적광전寂光殿의 지하세계는 “거대한 가축우리”입니다. 그 모습은 [이 한 대목]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진영각, 적광전(세상의 번뇌를 끊고 적정한 열반의 경계로 들어가 발휘하는 참된 지혜의 빛 이 가득한 전당)으로 드러나는 ‘절간’의 지상과 지하세계의 모습은 극한적으로 상반된 모습입니다. 여기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위험에 빠진 꿩, 닭들의 행태입니다. 김도연의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매나 독수리가 공격하면 밭에 있던 닭은 가까운 볏짚가리로 피신한다. 그러나 머리만 그곳에 파묻을 뿐 다른 부위는 모두 밖으로 드러나 있다.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죽어도 무섭지 않은 것이다......사랑의 뒤편에 있는 풍경이다”
볏짚가리 속의 닭 머리 모습이나 볏짚으로 가리지 못한 몸뚱이 각자만으로는 이 닭의 참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몸뚱이와 숨겨진 머리 전체를 동시에 보아야만 닭의 실체를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간’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상이나 지하세계 각자만으로는 ‘절간’의 참모습이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세계를 함께 보아야 ‘절간’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양자의 세계가 “극한적으로 상반된 모습”이라고 했는데 이제 그 상반성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지상의 세계가 위선이고 지하세계가 폭로된/감춰진 진실이 아니라 둘을 합쳐져 서로에게 스며들어 더 이상은 구분할 수 없도록 하나 된 모습이 참모습입니다. 등장인물로서의 ‘절간’의 캐릭터는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비구니였다가 대처승이 되고 살생하는 포수가 된 우연, 그는 은실을 겁탈하기까지 합니다. 살생에 겁탈까지, 그러나 우연이라는 인물을 그 속에 가둬놓거나 그 점만으로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됩니다. 포수가 되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신실한 불심이 살아있으며 은실을 겁탈했지만 자기가 생각해도 자신이 어처구니없으며, 정옥을 사랑하는 마음에 모자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종욱, 정옥, 은실의 캐릭터를 들여다 볼 때도 이와 마찬가지여야 함은 당연합니다.
소설에는, 우연의 자식인 도식이 자기 아버지가 은실을 겁탈한 것에 대해 딸 옥자에게 용서를 빌며, 종욱의 딸 옥자는 그 때문에 우연을 폭행한 자기 아버지에 대해 사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지상, 지하세계를 하나로, 겉과 속을 하나로, 숨겨짐과 드러남을 하나로 녹여낸 다음에라야 참모습을 알 수 있으며, 그만큼 참모습은 알기 어려우니 나는 물론 타자/타인의 참모습에 대해 쉽게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라는 작가 김도연의 정신세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나는 읽었습니다. 그 대목에서,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실은 용서 못할 것도, 용서를 받아야 할 것도 없으며, 용서할 수 있는 것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대단하지도, 대단하지 않지도, 숭고하지도, 천박하지도 않은, 살아온 그 자체로서의 〈그냥 삶〉이라는 작가의 깨달음도 나는 읽었습니다.
소설은 월정사-상원사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비극을 담아냈습니다. 1965년 여름에 일어난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 계곡조난사고와 1981년 10 ․ 27 불교법난을 문학성을 가미하여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 사고에서 살아남은 여대생을 “긴 머리 여대생”으로 끌어다 등장시키는데 아마 여승이 된 여학생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근거지가 될까 우려한 국군들이 오대산 상원사를 소각하려하자 소신공양하겠다는 각오로 절을 지켜낸, 1951년 입적한 한암 스님 말씀, 일생패궐一生敗闕(이번 생은 크게 망했다)로 마무리한 불교법난, 이 소설 덕분에 월정사-상원사의 이 두 비극은 이제 영원한 생명력을 갖게 됐습니다. 나는 ‘일생패궐’로도 이 소설을 족히 읽을 수 있겠습니다.
흙의 냄새가 물씬한,
강한 착지력을 지닌 김도연의 문체
《마지막 정육점》은 김도연이 자기의 문체를 한껏 펼친 작품이기도 합니다. 도식과 옥자 네들을 중심으로 보여준 대담하고 노골적이기까지 하지만, 느끼한 끈적거림의 늪에 빠지지 않는 성적 묘사를 빼놓을 수 없으며, 걷기예찬자 세례를 받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흙의 냄새가 물씬한, 강한 착지력을 지닌 문체는 이제 작가 김도연을 이야기할 때면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됐습니다. 예문은 도처에서 뽑을 수 있지만 이미 죽은 종욱이, 멧돼지의 몸을 빌려 나타나 포수가 된 우연과 만나는 장면, 사월초파일 행사를 성공적으로 끝냈다고 큰 스님이 두둑이 채워준 주머니로 하진부에 가서 놀다 월정사로 돌아오는 밤길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밤길 장면의 한 대목입니다.
“종욱도 무거운 바랑의 끈을 고쳐 메고 돌멩이가 고무신에 톡톡 차이는 신작로를 우연과 나란히 걸었다. 아무래도 혈기왕성한 두 청년이다 보니 장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금방 따라잡고 선두에 섰다. 마치 바람 고무신을 신고 있는 것만 같았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걷기만 했다. 물을 댄 논에선 개구리들이 울고 산에선 멧비둘기와 소쩍새가 경쟁하듯 울었다. 세상 만물이 짝짓기를 하느라 바쁜 봄밤이었다. 마치 몽롱한 꿈길을 걷는 기분이랄까. 논밭이 끝나면 마을이 나타났고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초가집 굴뚝에서 흘러나왔을 연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개가 짖었고 아기가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신작로에서 벗어난 길들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연결되었고 길과 길이 만나고 갈라지는 곳엔 장에 간 누군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속도감 있게 읽히면서도 흙냄새 짙게 풍기는 그의 문체는 나름으로 연구 대상입니다. 이제 마무리합니다. 지금까지 김도연은 네 권의 소설집과 네 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마지막 정육점》을 다 읽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제 〈김도연론〉을 쓸 때가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