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빠의 이름은 친할머니가 작명소에 가서 지어 온 이름이라고 했고, 내 이름은 아빠가 옥편을 찾아 직접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맑고 밝게'라는 의미가 들어간 내 이름.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름이 함의하고 있는 밝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나의 실재는 다소 다크(?) 한지라 그 간극에서 오는 괴리가 있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타인에게 내 이름 끝자의 발음을 교정해 줄 때마다, 과하게 입을 벌린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머쓱해진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작명의 과정과 호명의 역사, 명명의 서사들이 쌓인 것이 곧 나 자신의 정체성, 그 자체라는 것을.

​




 몹시도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일상적인 것에는 쉬이 깊은 관심을 보이기 어렵다. '이름'이 바로 그러한데 저자는 《이름의 빈자리에》에서 바로 그 '이름'을 호명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영화 속에서, 노래 속에서, 드라마 속에서, 시 속에서, 에세이 속에서 미처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을 소환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소거된, 끝내 얻지 못한, 갈급하게 찾아 헤매는, 스스로 쟁취해낸 혹은 비로소 버려야만 할 '이름'의 존재들이 눈앞에 현현한다. 그런 존재들을 탐색하며 '이름'이 지닌 의미와 그것이 존재에게 부여하는 상징성에 관하여 탐구해 보는 것이다.

​





 '이름'에 관한 정체성에 대하여 고찰해 볼 수 있는 시선들이 이렇게나 다양하다니, 놀라면서도 여러 작품들이 등장하는 와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몇몇 작품들이 있다. 영화 <송곳니>에서 이름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딸이 각성하여 스스로를 '부르스'라 명명하는 장면은 폭력적인 구조 속에서 탈출하고자 스스로 송곳니를 깨부수는 장면과 맞물리며 더욱 강렬해진다. 반대로 소설 《시녀 이야기》에서 '오브○○'라는 소유격 전치사로만 존재하는 시녀들은 '이름'의 거세로 완전한 몰인간성을 완성하고 있다. 빼앗기거나 혹은 다시 쟁취하거나 아니면 《프랑켄슈타인》의 크리처처럼 끝내 얻지 못한 이름은 결국 존재의 근본적인 속성까지 뒤흔들며 삶의 궤적까지 통째로 뒤흔들고야 만다.


​



 춘복이를 버려요. 한국 이름을 기억하지 말아요. 그래야 당신이 살 수 있어요. p.169 

​

 그러는 반면에 비로소 버리고서야 진정한 정체성을 회복할 희망이 보이는 이름에 대한 것은 더욱 인상적이다. 한국계 입양인 작가 미야 리 랑그바드의 에세이 《그 여자는 화가 난다》가 그렇다. 친가족을 찾고 끝내 '이춘복'이라는 이름을 찾아냈지만 그 이름은 네 자매 끝에 아들을 기대했던 부모가 성의 없이 지어준 이름이었고, 그런 기대는 결국 그녀가 입양되어야 했던 이유였다. 저자는 그런 그녀에게 '춘복'이라는 이름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이름', '이름'이라는 닻을 내리고 삶의 좌표를 찾아 부유하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소망. 비로소 찾아낸 '이름'은 닻이 아니라 덫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지을 수 있다. 수많은 얼굴을 통과한 뒤에야, 아리아는 처음으로 "나는 아리아 스타크야!" 소리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름과 존재가 완전히 일치한 사람이 된 것이다. p.208 

​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는 가족의 복수를 다짐하는 '아리아 스타크' 또한 '노바디'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비워낸다. 자신의 이름을 지워내고 비워낸 후에야 역설적으로 진정한 자신의 이름을 호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이름 하나의 절대적인 속성을 부여하며 이름으로 대변되는 절대적인 정체성을 부여하는 반면에 에세이 《그곳에선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었다》에서 나오는 '참사람 부족'은 한 사람이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고정 불변의 존재가 아닌 인간이기에 자신의 특기를 발굴하거나 성장할 때마다 새로운 이름을 새로이 부여한다고. 나이테 마냥 특성에 따라 부여된 이름의 변주, 근사하게 느껴진다.

​

 이들 원주민은 몸과 영혼이 성장함에 따라 한 사람이 어려서 받은 이름은 어울리지 않게 된다고 여겼다. 어릴 때는 어릴 때의 몸과 상황에 맞게, 나이를 먹음에 따라 각자 자기의 현재에 맞게 어울리는 이름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p.219 








 "당연하지! 내가 '비정상'인 건 지극히 정상이야. 멋지지 않아? 이제 나 자신을 존중하고 내 한계에 주목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울 거야. 내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p.231 

​

 '이름'이 함의하는 정체성, 욕망, 근원 등은 다시 사회와 타자 사이에 관계성으로 확장한다. 부르고 불리는 일의 숭고한 행위. 그래픽 노블 《제가 좀 별납니다만…》에서 마그리트가 자신의 병명을 찾아 고군분투한 끝에 비로소 확진 판정을 받는다. 자신의 병이 비로소 '명명'되는 순간, 마그리트의 '비정상'은 '정상'이 된다. 그저 '이름'이 주어졌을 뿐이고, 그저 '이름'이 없었을 뿐인데 인물의 세계는 비약적으로 확장하기도 하고 흔적도 없이 쪼그라들기도 한다.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을 호명한다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명명 혹은 작명, 그리고 호명. 그것을 타고 흐르는 묵직하고 찬란한 생동성은 존재를 존재롭게 하는 힘은 아닐까.

​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12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