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헌 옷 추적기 - 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
박준용.손고운.조윤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어떤 문제나 비밀 혹은 사건의 한 가운데를 거침없이 파고들어가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하나의 주체를 두고 골몰히 탐구하며 온몸으로 탐색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가운데 박준용, 손고운, 조윤상이 있다. 두 명의 기자와 한 명의 다큐멘터리 감독이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의류 수거함 속에 버려지는 '헌 옷'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더 이상 입지 않게 된 옷을 의류 수거함에 밀어 넣으며 필요한 누군가에게 다시 제 몫의 쓰임을 다할 것이라는, '재활용'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망상에 불과했다. 그리고 어쭙잖게 예상했던 것보다 현실은 더욱 참혹했다.

《헌 옷 추적기》는 준비 과정부터 상세하게 그려진다. 수 천만 원에 이르는 취재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 사업을 신청하지만 한차례 고배를 마시기도 한다. 재도전 끝에 비로소 취재가 시작되고 국내 헌 옷의 이동 경로를 최초로 추적하기 위해 해외 여러 보도 사례를 참고하여 갤럭시 스마트 태그 제품과 GPS 추적기를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직접 옷의 솔기를 뜯어내어 장치를 부착하는 과정에는 배우자와 취미로 하던 재봉틀까지 동원됐다. 세간의 이목을 끌기 위해 평소 환경 문제에 관심을 보여온 '쓰레기 아저씨' 배우 김석훈, 배우 박진희, 제로 웨이스트 가게를 낸 방송인 줄리안, 밴드 크라잉넛의 베이시스트 한경록,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의 저자 이소연까지, 유명인들의 헌 옷을 기부받는 다각도의 노력을 꾀했다.
추적기를 단 153점의 헌 옷들은 전국 각지의 의류 수거함에 분산적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속속 그들의 행선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말레이시아와 인도, 필리핀, 타이, 인도네시아, 튀니지, 볼리비아, 페루, 세네갈, 우간다, 나이지리아, 가나, 파키스탄…. 주로 개발도상국인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등지로 수출되었다. 이렇게 수출된 수십만 톤의 옷들은 과연 재활용이 되고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직접 현장에 뛰어든 취재진이 마주한 것은 버려진 옷으로 빚어진 쓰레기 산과 불법적으로 매립되고 소각되고 있는 옷 무더기들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필연적으로 사람이 있었다.
불법 매립의 경우 매립시설에서 처리할 때에 견줘 온실가스 배출량이 최대 3배에 이를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 불법 소각 시에도 혼합 폐플라스틱 등이 타면서 많은 탄소를 배출한다. 이 때문에 폐기 과정이 보다 잘 관리되는 국내에서 처리하는 게 개발도상국에서 처리하는 경우보다 탄소 배출이 더 적다. p.65

세계 각지에서 쏟아지는 헌 옷의 수도라 불리는 인도의 파니파트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끔찍했다. 중고 의류로 판매되지 못한 어마한 양의 헌 옷들이 불법적으로 소각되면서 내뿜는 유해한 연기와 더불어 헌 옷에서 섬유를 추출하기 위한 표백 공정에서 사용되는 유해 화학 물질에 노동자들은 무분별하게 노출되고 만다. 최저 시급에도 못 미치는 임금과 적절한 보호 조치 없는 노동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은 약을 먹으며 버틴다. 또 표백 과정에서 발생한 폐수 또한 인근 강에 무단으로 방류되면서 근처 주민들 또한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구더기가 들끓는 매립지를 놀이터 삼아 돌아다니는 어느 노동자의 어린 딸의 눈망울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다.
내가 입고 버린 옷은 누군가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누군가가 고통을 받고 있었다. p.205, 옷을 사고 버리는 일과 누군가의 아픔, 박준용

그래서 그는 '북극곰을 살리자'는 식의 기후 위기 캠페인을 비판적으로 반추한다. 동물권도 중요하지만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이미 무관심 속에 죽어가고 있으므로, 기후 위기를 '북극곰 문제'로 치환하면 선진국들이 마땅히 직시해야 할 불편함, 위기감, 죄책감이 희석된다는 지적이다. p.75, 환상과 죄책감 사이에서, 손고운
'ZARA'나 'H&M'이 주도하는 '패스트패션'까지는 익숙한데 '쉬인'이나 '테무' 같은 중국 온라인 패션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이를 능가하는 '울트라 패스트패션'으로 흐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즉 저가·저질 의류들이 무분별하게 양산되며 버려지는 옷 또한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는 것일까? 무지성으로 옷을 사들이고 무분별하게 옷을 버리는 개인의 죄책감에 호소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기에는 이미 전 지구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미국과 유럽의 여러 선진 국가들은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EPR 제도를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EPR 이란 생산자와 판매자에게 폐기물의 회수 및 재활용 의무까지 부과하는 제도로, 즉 옷을 판 주체가 그 판매에 따른 사후 처리까지 책임지게 만드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시스템이 만들어지며 규제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규제를 만들어 기업들이 선도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시스템을 만들게 하겠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p.230
꾸준하게 제도를 확장시키고 발전해 온 주요 선진국과는 다르게 국내에서는 아직 인식조차 미흡한 실정이고 관련 법안들은 상정되었다가 폐기되기를 반복하고 있다. 게다가 '선 규제 후 시스템'을 취하는 다른 나라의 강력한 국가적 스탠스와는 다르게 한국은 '선 시스템 후 규제'라는 정반대의 안일한 기조를 취하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문제는 도덕적 책무감에 머물지 않는다. 수출 경제 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국내 사정을 미루어 볼 때 점점 친환경과 EPR을 강조하는 세계적인 추세는 제도적인 압박과 규제라는 현실적이고도 경제적인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또한 불법과 편법에 경계에서 타국에 버려지는 헌 옷들 또한 포화 상태에 이르렀으니 하루빨리 자구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우리가 처음부터 원했던 것은 단순한 보도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가 누군가의 삶으로 이야기를 잇고, 그 이야기가 또 다른 누군가의 출발점이 되는 것. 그것이 이 기획의 진짜 끝이자 새로운 시작일 것이다. p.261, 옷 너머의 얼굴, 조윤상
'의류 수거함'은 일종의 사용자가 행한 기만이자 배신이었고 동시에 이용자가 취한 무지이자 외면이었다. 심지어 의류 수거함의 초록색마저 마치 '그린 워싱'을 표방하며 소비자를 우롱하는 기업처럼 이용자를 조롱하는 것만 같다. 이왕이면 친환경을, 이왕이면 재활용을 선택하던 소소한 실천들은 자주 무기력에 빠져버리고 만다. 별생각 없이 소비했던 행위들이 초래한 '환경 문제'라는 실체를 마주할 때도 그렇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 항상 느슨하게라도 관심을 가지고, 보다 나은 선택을 고민하자는 마음을 다시 고쳐본다. 새 옷 앞에서 조금 더 길게 망설이기를, 헌 옷 앞에서 한 번 더 깊게 생각해 보기를….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