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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 개정판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평점 :

작가 조지 오웰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대표작은 단연코 소설 《동물농장》과 《1984》일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도, 유명한 이 두 작품은 학창 시절에 항상 추천도서나 권장도서 목록에 꼭 올라있었고, 대학교를 다닐 때에는 어느 교양 수업의 주교재이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최근에 연달아 읽고 있는 조지 오웰 시리즈에서, 에세이 선집인 《나는 왜 쓰는가》와 르포르타주인 《위건 부두로 가는 길》도 그랬지만 소설인 《숨 쉬러 나가다》를 읽으면서도 조지 오웰이 추구하고자 했던 '정치와 예술의 합치'를 꾀하고자 했던 노력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숨 쉬러 나가다》는 《동물농장》과 《1984》가 나오기 전에 출간된 만큼 그의 정치적 문학관이 발현되기 시작한 출발 지점에서의 첫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결코 매력적이지 않은 중년의 남성인 조지 볼링이다. 그는 아내와 아이 둘이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며, 보험영업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평범한 이 사내는 아침에 일어나 목욕을 하며 나이가 들어 퉁퉁 해져있는 자신의 몸을 보고 열심히 변명을 해보지만 끝내 우울해하며 좌절한다. 뒷덜미에 어쭙잖게 남은 목욕 거품을 불쾌해하며 간만에 휴무를 맞아 새로운 틀니를 찾으러 나선 길에서 그는 어느 포스터의 조그 왕에 관한 어떤 소식을 듣다가 어린 시절 교구 성당에서 듣던 찬송가의 한 소절을 떠올리게 되고 그 순간을 틈타 속절없이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짙은 과거의 향수는 그의 유년 시절부터 훑어가기 시작한다.
책의 꽤 많은 부분은 조지 볼링의 과거 시절을 회상하며 묘사하는데 할애한다. 곡물 가루가 살포시 내려앉은 아버지의 모습, 매일 반죽을 빚던 든든한 함선 같은 어머니의 모습과 각자의 읽을거리를 들고 모여 앉아 즐기던 티타임에서의 단상들 또는 어릴 적 패거리들끼리 어울려 다니며 벌였던 소동극도 빼놓을 수가 없다. 특히 어린 조지 볼링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낚시였는데 이 '낚시'라는 행위는 현재의 볼링을 추동하기 시작한다. 어릴 적 빈필드하우스라는 로어빈필드의 어느 저택 근처에서 발견한 숨은 못에서 거대한 잉어를 발견하게 되고, 기필코 그 잉어를 낚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지만 그 다짐은 끝내 이뤄지지 않은 유년 시절의 한낱 소망으로 남아버렸다.
로어빈필드에 다시 가본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힘이 난 것이었다. 어떤 느낌인지 아실 것이다. 숨 쉬러 나간다는 것! 커다란 바다거북이 열심히 사지를 저어 수면으로 올라가 코를 쑥 내밀고 숨을 한껏 들이마신 다음, 해초와 문어들이 있는 물 밑으로 다시 내려오듯 말이다. 우리는 모두 쓰레기통 밑바닥에서 질식할 듯 지내고 있는데, 나는 바깥으로 나갈 길을 찾은 것이었다. 로어빈필드로 돌아가는 것 말이다! p.265
현실의 권태와 과거의 향수는 그를 계속해서 추동했고 마침내 과거 그 시절 빈필드하우스의 그 숨은 못, 거대한 물고기를 잡기 위해 비상금 17파운드와 일주일 간의 거짓 휴가를 비밀에 부치며 어린 시절 그 마을로 혼자만의 휴가를 떠난다. 그러나 수십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은 볼링의 노스탤지어를 무용하게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가 알던 이들의 이름은 묘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고, 산업화가 진행된 마을에 그의 추억이 설자리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였다. 그를 추동했던 그 신비한 연못이 있던 저택은 어느새 요양원으로 용도를 변경한지 오래였고, 거대한 연못 또한 주택단지로 개발되었으며 소망이 가득했던 그 신비한 못은 말 그대로 쓰레기 구덩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꿈에다 수류탄을 투척한 것이었고, 실수가 없도록 공군이 따라와 500파운드짜리 TNT를 떨어뜨린 것이었다. p.353

피상적으로는 조지 볼링이라는 인물이 '중년의 위기'를 겪는 웃픈 에피소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전후의 시대적 상황과 당대의 인간 군상을 자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지 볼링이라는 인물이 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희망이라고 표상되는 삶의 어떤 것들이 분절되고 생의 행로가 변곡점을 만나 휘어가면서 겪는 개인적인 변화, 이를테면 전쟁을 통해서 애국심이 고취되거나 참전으로 인한 계급 상승의 기대 같은 것이 전후에는 극심한 실업난에 빠지며 모든 것이 신기루였음을 깨닫는 과정 속에서 변모하는 냉소적인 태도 등이 그러하다. 또한 노동 계층인 자신과 중산층이었던 아내 힐다와의 '돈'이라는 가치를 두고 갈등하는 계급 관념의 차이도 드러난다. 상황과 인물에 대한 볼링의 자조적인 인식은 오웰의 냉소적인 위트와 만나 볼링이라는 인물과 잘 버무려진다.
조지 볼링은 어느 날 파시즘을 타도하자는 연설을 듣고, 애국심에 고취되어 전쟁을 옹호하던 청년들과의 문답에서 전쟁의 현실을 냉소적으로 일갈해 준 뒤, 울적한 마음으로 포티어스라는 친구의 집을 찾아간다. 포티어스는 전직 교장 출신으로 박학다식한 인텔리였다. 볼링은 포티어스에게 2차 세계 대전 발발에 대한 불안과 팽배해지는 파시즘에 대한 우려를 표출하지만 포티어스는 전혀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딴소리를 한다. 볼링은 결국 자신의 지식에만 매몰된 포티어스에게 크게 실망하게 된다. 또 기대에 부풀어 찾아간 로어빈폴드에서 폭격기의 오발탄 사고로 사상자가 발생한 현장을 목격하고는 학을 떼며 집으로 돌아온다. 이 장면은 오웰을 목이 볼링을 빗대어 비판하고자 했던 당대 사회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비참한 전쟁의 현실과 전쟁 이후의 경제난과 실업, 온갖 선전이 판을 치는 혼란스러운 시대상에 대한 오웰의 우려는 현실에서 곧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비극적인 예언이 되고 만다.
영국이 파시스트 천지가 되면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될까? 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연사와 청중 가운데 네 명의 공산주의자의 운명이야 물론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다. 그들은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상대의 얼굴을 뭉개버리든 제 얼굴이 뭉개지든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고만고만한 사람이야 아마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살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정말이지 두렵다. p.237

조지 볼링의 삶의 궤적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그것으로 비롯한 시대적 부산물인 여러 갈래의 비극을 따라간다. 작가인 조지 오웰의 냉철한 정치적 인식이 비판적으로 녹아 있는 《숨 쉬러 나가다》는 조지 볼링이라는 인물이 과거 자신만의 비밀 연못 속 거대 잉어라는 희망이, 산업화에 좌절되는 과정을 통해 과거 시대의 영광이 이제 더는 현재를 구원할 수 없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성실한 노동자들이 거대 자본에 의해서 스러지는 희망 없는 현실, 전쟁의 현실적인 참혹함과 모순, 전후의 대책 없는 실업난, 점점 팽배해지는 파시즘의 위협, 인텔리들의 피상적인 현실 인식, 2차 세계 대전 발발에 대한 우려와 불안 등은 거대 담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들의 삶 곳곳에 지독하게도 들러붙어있다. 에세이와 르포를 거치면서 터득한 조지 오웰의 섬세하고 꼼꼼하며 냉철한 시선이 소설 《숨 쉬러 나가다》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는 것이다. 특유의 비판적인 관점이 자조적인 위트로 구현되는 필력 또한 유려해서 흡입력도 대단한, 여러모로 문학의 저변이 넓어지는 기분이었던 조지 오웰의 시간이었다.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