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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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쳐 〈검은 절벽〉을 읽자마자 다짜고짜 광활한 우주 한가운데로 뚝 떨어진다. 어리둥절해 하는 화자인 마리와 그걸 읽고 더욱 어리둥절해 하는 독자인 내가 있었다. SF를 읽을 때 종종 느끼는 경미한 긴장감을 대번에 느낀다. 활자로 그려지는 우주 공간에 대한 감각들을 더듬으며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 속 구석 어딘가에 자리를 잡아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결국 SF도 사람이 쓰고 사람이 읽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국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어느새 작가 구축한 서사의 세계를 유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만다. 선택적 SF 난독증의 극복이자 어쩌면 SF 입덕 부정기였을지 모를 해도연의 SF 소설집, 《진공 붕괴》. 세계관이나 개념의 이해를 적당히 눙치며 요령껏 읽어도 일단은, 재미가 있다.



광활한 우주 한가운데서 기억을 잃은 채 정신이 든 라미.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무한한 별들만 펼쳐질 뿐이었다. 이런 장면은 읽는 이로 하여금 초반부터 아찔한 기분과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무력한 공포감을 들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같은 우주선에서 생활하던 동료들이 시신으로 발견되고 라미는 자신의 우주복에 묻은 의뭉스러운 핏자국에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는 우주에서의 생활 수칙들이 어긋나 있었고, 우주선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상황에서 라미의 생존 분투와 함께 〈검은 절벽〉 '그들을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후더닛으로 흘러가던 이야기는 '왜?'라는 와이더닛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면서 슬슬 반전이라는 시동을 건다.


지구에서나 우주에서나 인간을 가장 강력하게 추동하는 감정은 역시 사랑이었다. 미스터리에서 서서히 로맨스 스릴러로 변모하는 이야기는 '러브조이'라는 인공지능을 두고 역시나 화두를 던진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이 가능한가? 인공지능의 개성을 각각 독립된 개체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읽다 보면 아주 오래전 보았던 영화 <레지던트 이블>의 '레드 퀸'이 생각난다. 인간에 의해 학습되다가 결국에 자아 아닌 자아를 스스로 생성해낸 인공지능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인간과 반목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행태로 끔찍하게 발현되었을 때 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납득 가능한 시나리오. 인공지능이 선택하는 사랑의 행태와 종국에 인간이 선택하는 사랑의 행태의 구분은 어쩌면 인간이 느끼는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를 상쇄하는 선택은 아니었을까.



또 한 편의 가능한 과학적 사랑 이야기. 여운이 가장 많이 남았던 단편을 꼽자면 〈마리 멜리에스〉를 단박에 꼽을 수 있다. 아내를 잃은 남편이, 나로서는 가늠해 보기도 곤란한, 복잡한 과학 기술을 활용해서 아내를 다시 현실세계로 구현해 내는 이야기이다. 포스트 휴먼이나 프랑켄슈타인 같은 개념을 가져와서 설명할 수도 있으나 요령껏 눙치며 읽은 나는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로 읽었다. 영원한 이별을 한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싶은 인간의 근원적인 소망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구현해놓은 후, 그다음 이야기를 시작한다. 구현된 그 사랑은 전과 '같은' 그 사랑일까?라는 질문을 '마리'라는 존재를 통해 묻는다. 마리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와 의식이 다른 이의 과거로 점철되었다고 한들 현재의 마리를 그렇게 정의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과 과거의 아내에게 느꼈던 감정이 한데 섞여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마리는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일종의 선언을 읽다 보면 어떤 주체를 타인이 정의하고 구현하고자 했던 모든 노력은 결국 무의미하고 일면 오만한 선입견일 뿐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낭만적으로 들리고는 하지만, 마리가 말하는 '선택한 사랑'이라는 의미를 옆에 두고 본다면 사랑의 운명론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덧붙여 과학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방식으로 애도와 사랑을 구현한 마지막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




이 책의 제목인 '진공 붕괴'는 〈텅 빈 거품〉에서 등장하는 지구 종말론의 개념이다. 이 진공 붕괴가 일어나는 것은 세계적으로 소수의 인원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이들은 종말이 오기 전까지 남은 시간 동안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사람들을 선별적으로 유토피아에 살게 만든다는 계획을 가지고 실행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상미는 유토피아와 기생선이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두고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안락한 절망에서 기만적인 삶을 살 것인가, 무지한 희망에서 기약 없는 삶을 살 것인가?


상미만큼이나 읽는 독자도 치열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선택지다. 디스토피아 위에 세운 유토피아라니, 아무래도 사상누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진공 붕괴로 무너질 세상 위에서 기생선이 사람들을 태우는 모습을 보며 상미는 노아의 방주를 떠올린다. 세상의 종말에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보이는 듯한 기생선에도, 상미는 진공 붕괴 원인의 선후 관계를 생각해 보면서 의문을 품는다. 결국 유토피아나 기생선이나 절대적인 구원은 없을 것이다. 모든 사실을 알고도 유토피아를 선택해 아이를 낳은 인물이 있는 것처럼 모두 저마다의 유토피아 속에서 살아갈 뿐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단편들에 비해 결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 〈에일-르의 마지막 손님〉은 호러처럼 읽혔다. 오징어 먹물 파스타에 대한 단상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점점 기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낯선 여행지를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식당에서 이름 모를 황홀한 음식을 게걸스럽게 맛보는 경험을 한 후, 기괴한 정서가 행간에 흐르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이 식재료에 대한 불쾌한 궁금증이 일기 시작하는데, 미각적으로 불쾌한 감각으로 시작하는 위화감은 결말을 향해 달려가면서, 기괴하고도 찝찝한 공포로 치환되고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다 읽고 나면 밤하늘의 별자리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느끼게 될 수도 있겠다.



타임 루프를 다른 두 편의 단편인 〈콜러스 신드롬〉〈안녕, 아킬레우스〉. 마치 영상으로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두 편의 이야기는 타임 루프라는 소재가 어떻게 다른 결로 변주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콜러스 신드롬〉에서는 과거의 회한을 만회하기 위해서 무한한 타임 루프를 하는 인물이 등장하고 〈안녕, 아킬레우스〉에서는 스스로 타임 루프 속에 갇히기를 선택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문제적 인물들은 '타임 루프'라는 능력을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굉장히 유해한 방법으로 이용하고 있었고, 이를 차단 혹은 처단하기 위해 외부에서 인물들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특히 타임 루프를 능력을 이용하기 위한 기술적인 방법이나 반대로 이를 탈피하기 위한 실재적인 기술을 소설적 상상으로 설정한 내용들이 독특하고 흥미로워서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콜러스 신드롬〉에서는 반복되는 생의 사이클 안에서 각 인물들의 과거가 수차례로 분절되는데, 그 분절되는 과거를 하나의 독립된 객체로 인식하는 개념이 흥미로웠다. 그 분절된 과거의 객체들을 구원하기 위해 타임 루프의 순환 고리인 문제적 인물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이런 카타르시스는 분절된 객체를 동일시 여기며 그들을 공감하는 인물이 결국 모든 차원의 객체들을 통합하며 위로하는 데서 기원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나름의 결론을 맺는다.


특히 〈안녕, 아킬레우스〉는 영상화 계약까지 이루어졌으나 제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도 아쉽다. 영화나 드라마 시리즈로도 기대가 되는 단편이다. 왜곡된 쾌락에 중독되어 그 순환에 갇히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광기 어린 인물의 욕망이 지배하는 루프 속에서 어떻게든 탈출하려 발버둥 치는 인물이 빚는 갈등이 스릴러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각자의 욕망으로 타임 루프라는 장치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인물들이 맞이하는 결말을 두고는 여러 결의 상념이 스친다. '거북이와 아킬레우스의 달리기'라는 제논의 역설 같은 개념은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이어서 소설의 상황을 대입하며 생각해 볼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인상 깊었던 작품 두세 편 정도만 추려서 언급하려 했던 초반의 계획은 쓰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재밌었는데 하는 욕심으로 결국 모든 단편을 짤막하게나마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물리학과 천문학을 전공한 작가의 과학적인 지식들이 소설 곳곳에서 여러 장치로 설정되어 진성 SF 소설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긴다. 모든 개념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서두에서 밝혔듯이 본질은 인간의 이야기로 읽혔다. 그런 반면에 한편으로는 관련 분야나 장르에 조예가 있다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물론 나처럼 눙치며 요령껏 읽은 사람도 재미있게 읽었다. 책의 말미에 각 단편마다 있는 짤막한 작가의 말에서는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나, 영감을 받은 작품들에 대한 언급도 있어 각 단편에 대한 이해를 돕기도 한다. 약간의 긴장감으로 시작해 시간을 순삭한 몰입으로 끝난 해도연의 SF 소설집 《진공 붕괴》.









*본 서평은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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