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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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긴 서사에다가 몰입도가 강렬한 소설을 읽고 싶던 참이었다. 그러나 서사 자체에 압도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 수 있는 소설을 찾는 행운은 좀처럼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캡처 된 책들만 차곡차곡 쌓이던 와중에 발견한 《나의 작은 무법자》의 신간 소개 글을 읽는다.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수상하는 골드대거상 수상을 비롯해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 제작 확정, 유명 범죄심리학자의 추천사 등의 굵직한 소개 내용과 더불어 한 문구가 눈길을 끈다. '나의 죄, 나의 영웅, 나의 살인자'라는, 상충하는 단어들의 역학 관계를 간략한 줄거리와 곁들이니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행운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INTRO_


소설의 시작은 실종된 소녀를 수색하는 장면으로 다짜고짜 시작한다. 불길한 예상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고, 시시 래들리의 죽음은 주변 인물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다. 범인은 빈센트 킹. 그는 시시 래들리의 언니인 스타 래들리의 연인이었다. 이 비극은 마치 유기체처럼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들 줄 모르고 현재에 이르는 시점까지 여러 인물들의 삶을 관통하면서 꿈틀대며 살아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비극의 원흉인 빈센트 킹이 수십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여기 우리의 작은 무법자, 더치스라는 소녀가 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스스로에게 '무법자'라는, 다소 무시무시한 정체성을 부여한 소녀는 바로 스타 래들리의 딸이었다. 약과 술에 취해 딸인 더치스와 아들인 로빈을 돌보기는커녕 하루하루를 그저 평범하게 보내기에도 벅찬 스타를 대신해서 더치스는 동생 로빈을 살뜰하게 보살핀다.


충분히 고달픈 더치스의 인생에 무엇을 더 더할 것이 있을까 싶지만 비극은 여전히 생동하고 있었다. 스타 래들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현장에는 피를 묻힌 빈센트 킹이 가만히 앉아 경찰에 체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시점부터 소설은 과연 빈센트 킹이 스타 래들리를 죽였는가? 하는 질문을 워크를 통해 추적하기 시작한다.




추적하는 자, 워크


질문을 추적하는 인물은 빈센트 킹의 오랜 친구이자, 케이프 헤이븐의 보안관인 워크라는 인물이다. 이 모든 비극을 목도한 인물인 워크는 킹에게도, 스타에게도 안타까움과 연민을 가지고 스타의 아이들인 더치스와 로빈을 조용히 돕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감옥에 수감될 위기에 처한 킹을 돕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의 무죄 증거를 찾아 나선다.


킹을 대하는 워크의 태도는 과거 시시 래들리 사건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찬란하게 빛나던 과거, 그들의 학창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킹과 연인이었던 스타에 대한 연민이 뒤섞인 복잡하고도 농도 짙은 회한에 가깝다. 사건을 추적하면서 자신의 친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빛바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하고, 유력 용의자의 배경을 파고들면서 그가 보던 일면이 무용한 것은 아닌지 고민하기도 한다. 또, 자신이 평생을 알던 이웃들의 숨겨진 불쾌한 면면을 발견하면서 내적인 고민과 갈등의 과정을 겪기도 한다.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은 매우 느리게 진행된다. 결정적인 단서는 요원하고, 오히려 진실로 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레드 헤링(red herring)은 의혹의 씨앗에 불을 지필 뿐이다. 방법의 도덕성일랑 잠시 차치하고서라도 워크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관철시키려 분투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건과 인물을 가장 입체적으로 경험하는 인물인 워크를 통해 선과 악에 대한 인간 군상의 모순을 목도하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여백의 간극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




살아남은 자, 더치스


우리의 작은 무법자 더치스의 인생은 지독하게 고달프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아직 어린 소녀에게 이렇게나 많은 비극을 선사하는 서사를 마뜩잖게 목도하는 독자였던 나는 결말을 읽고 나서도 씁쓸한 마음에, 어쩔 도리 없이 마음대로 더치스의 미래를 아주 밝게, 지난 삶의 그림자에 대한 보상으로도 차고 넘치게 밝게 밝게 그려 넣었다.


더치스의 삶은, 삶에서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것들이 모두 상실된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리고 더하여 최소한의 것들도 모두 스러져가는 상황에서 소녀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무법자로 설정한다.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선택한 무법자로서의 정체성은 되로 그녀를 자꾸만 삶의 가장자리로 밀어낸다. 어지럽게 얽힌 인과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더치스의 삶은 평범한 일상의 궤도를 잠시 회복하기도 하지만 이내 앗아가버린다. 이런 상실의 상태를 기본으로 두는 더치스의 건조하고도 퍼석한 현실 인식을 마주할 때마다 서늘해진다.


더치스는 너무 지쳐서 그의 토실토실하고 친절한 얼굴과 감정이 넘치는 눈을 마주할 기력이 없었다. 그는 부드러웠고, 젤리나 푸딩 같았다. 부드러운 웃음, 말랑말랑한 몸, 소녀의 세상을 바라보는 부드러운 눈길. 부드러운 것은 더치스에게 쓸모가 없었다. p.83


이따금 더치스는 어떤 느낌일지, 좀 더 평범하다면, 좀 더 아무것도 아니라면 어떨지 궁금했다. p.123


더치스는 코코아를 들어 숟가락으로 마시멜로를 퍼서 입에 넣었다. 그러자 너무 달아서 깜짝 놀라버린 자신이, 마치 삶의 좋은 것들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p.322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천연의 색을 보며 감탄하기 보다 지난했던 삶 속에서 고통의 흔적을 먼저 발견해 내고야 마는 이 장면에서는 안타까움을 넘어, 슬프지만 무기력한 분노가 일었다. 같은 장면에서 어떤 삶은 아름다움을, 어떤 삶은 고통을 읽을 수밖에 없는지…. 답을 구할 수 없음에 작은 한숨만을 토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가장 애련했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소녀는 다시 무법자 더치스의 정체성을 꺼내들고 스스로 구원의 길을 나선다. 그 종착점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의 구원을, 이것을 구원이라 불러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구원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목도하게 된다. 인생 전반을 흩뜨려놓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참과 거짓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상황들은 기필코 더치스의 거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나서야 종료된다.




OUTRO_


소녀의 얄팍한 생을 이토록 야멸차게 흔드는 서사에 비교하면 그녀가 맞이하는 결말은 결코 온당치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추미스 장르를 읽고 난 후, 그러니까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나면 응당 카타르시스가 흐르기 마련인데, 반면에 이 책을 읽고 나서 제일 먼저 든 감정은 먹먹함이었다. 생의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성하고, 보다 긍정적인 무엇을 기대하지만 더치스의 구원은 삶에서 거의 모든 요소가 소거된 상태로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너무 야박한 구원이 아닐까 싶지만 생각을 곱씹을수록 핍진한 현실 인식인 것 같다는 나름의 결론에 이르렀다.


추리의 서사는 마치 마르틴 베크 시리즈처럼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단서들을 꼬깃꼬깃 손에 쥐고 느리디 느린 속도로 전개된다. 범죄가 일어나고 추리를 시작하지만, 이 서사의 본질은 더치스의 성장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범죄 뒤에 남겨진 피해자 가족들의 비극과 수십 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은 후유증을 가진 채 너덜너덜 해진 그들의 삶을 조명한다는 점이 여타 추미스와는 구별되는 특장점이다. 더불어 워크가 여러 인물들의 면면을 마주하면서 느끼는 인간 군상의 입체적인 속성들도 서사의 깊이를 더해준다. 또한 글이 표현하는 정서나 묘사되는 표현들도 굉장히 문학적이어서 다방면으로 풍성하게 읽힌다.





한국 독자에게 전하는 작가의 말에서 작가의 내밀하고도 사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자연스레 더치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미래가 어떠할지 섣부르게 단언하지 않고 그저 미래가 앞에 있다는 현실적인 위로를 건넨다. 더치스 삶의 어느 지점에서 피난처가 되어주었던 핼이나 워크, 셸리 그리고 돌리 같은 조력자들은 삶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생의 희망을 상기시킨다. 거나한 희망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사건의 종착점인 동시에 생의 시작점에 선 더치스를 보며 원제의 의미를 곱씹는다. WE BEGIN AT THE END.



길지 않은 기간에 소녀는 아무것도 없는 처지에서 뭔가가 있는 처지로 옮겨갔고,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기는 해도 분명히 소녀 앞에 있었다. p.560

 




 *출판사 위즈덤하우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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