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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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로, 나에게는 《너무 한낮의 연애》로 유명한 작가 김금희의 에세이집인 《나의 폴라 일지》는 작가가 <한겨레>의 특별 취재기자 자격을 부여받고 비로소 남극 세종 기지에서 한 달 정도를 체류하게 되며 겪은 일을 엮은 글로, 10개월 동안 <한겨레>의 기고한 뒤, 전면 개고를 거쳐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과학도가 아닌 작가가 다녀온 남극 이야기는 어떤 서사로 흘러갈지 사뭇 궁금해진다. 왜 하필 남극이었을까?





'남극'이라니. 나에게는 아득한 이름이자 생경한 풍광이었지만 저자는 오랜 시간 남극을 열망하며 그곳을 가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부단한 노력을 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남극행이 확정되고 사전 준비 과정을 거치는 도입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남극 자체보다도 그 남극에 가고자 하는 저자의 열망은 과연 어떤 온도의 마음일까. 나는 어딘가, 무엇을 이토록 순수하게 열망한 적이 있었던가? 저자가 그리는 남극의 모습을 기대하며 책을 펼쳐 들었다.




남극이라는 순수한 열망


남극에 가기 위해 선발되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선발 후 교육 과정이나 남극으로 가기까지의 여정도 굉장히 험난하다. 해양에서의 조난을 대비한 생존 훈련을 배우면서 '먹깨비처럼 기대감에 휩싸인(p.23)' 작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모든 과정을 기꺼이 인내하는 모습에서 작가의 남극에 대한 순수한 열망에 관한 초반의 나의 궁금증은 작은 경탄이 되었다. 게다가 비행기를 타고 여러 번의 환승을 거치는 과정은 활자로만 그 과정을 더듬어도 피곤한데, 어디에 있든 집이 항상 최고인 내향인인 나로서는 그것마저 더욱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잠시 '관광'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오래 머무르며 인간종으로서 작고 단순하고 겸손해지는 과정을 겪어보기를 원했다. p.14


남극에서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존재로 자아를 단순하게 만들어 보기를 소망한 작가의 이러한 태도는 남극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감상에서 드러난다. SNS 속에서 자신을 한껏 드러내기 바쁜 현대 사회에서 역설적이게도 '작고 단순하고 겸손해지는 과정'에 나도 덩달아 마음이 차분해지고 어째서인지 안도감마저 들었다. '주권도 화폐도 국경도 없는 세상의 끝'을 상상하면 끝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빙원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다. 남극이라는 압도적인 환경이 선사하는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는 동시에 겸허해지는 안도감이랄까? 남극의 서사를 따라갈수록 형언할 수 없는 감상이 남는다.




남극의 비펭귄 인간들


남극에서 작가는 여러 사람들과 만난다. 남극의 옆새우나 지의류 같은 생태를 연구하는 생물학자들, 남극의 대기를 연구하기 위해 매번 풍선을 띄우는 대기학자들 외에도 식량을 담당하는 셰프, 기상청에서 파견되어 온 기상청장이나 해군의 SSU 대원, 소방 공무원 시험 합격 후 대기 발령 중인 미래 소방관 등 이력이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인 것이 놀랍기도 하고 그들의 이력 자체만으로도 흥미롭기도 하다. 이과들만 가득한 곳에서 문과인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은 경계를 넘나들며 더욱 다채롭게 그려진다.


특히 기지 내의 여러 과학자를 만나면서 나누는 대화들도 흥미로웠는데, 종종 연구 목적이나 계기를 묻는 작가의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에서 생물의 근원에 대한 원초적이고도 순수한 호기심을 엿볼 수 있던 점이 그랬다. 그들을 추동하는 호기심과 탐구욕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 남극을 품은 사람들의 제법 순수한 구석에는 웃음이 나기도 한다.


'인간'보다 대륙 자체의 '자연성'이 앞섰고 그 안에서 인간은 모두 다를 것 없는 '종'이었다. p.252


경계 없이 자유로운 남극은 동시에 폐쇄적이고 제한적이기도 하다. 대원들은 기지 안에서는 옹기종기 모여 생활을 한다. 기지 외부에서는 남극의 생태 보호 때문에 최대한 인간의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하고, 탐구나 채집을 위한 외부 활동 시 안전을 위해 꼭 2인 1조로 동행해야 한다. 사람의 수는 확 줄어들었지만 밀도는 높아진 세계에서 작가가 그리는 비펭귄의 존재들은 각각의 개성을 가지고서도 마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서로의 몸을 밀착시키는 펭귄처럼, 한 종種으로써 남극의 일부가 된다.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그들과 잘 지내기 위한 작가의 고민과 노력이 엿보이기도 한다.




남극의 생동하는 층층

나에게 남극의 이미지는 귀여운 펭귄으로 시작해서 기후 위기 속에 녹아내리는 빙산으로 끝나는 스펙트럼의 어디쯤에 있었다. 눈이 시릴 만큼 하얗기만 하다고 생각한 나의 편협한 남극은 《나의 폴라 일지》에서 다양하게 변주한다. 민트처럼 푸른빛을 띠는 유빙, 바닷속에 가라앉은 짙푸른 빙산의 뿌리, 땅이 얼고 녹으며 만든 그라운드 서클, 하얀 빙원 위에 우뚝 솟은 위엄의 플로렌스 누나탁…. 빨간 구명복을 입은 비펭귄 인간들이 총총 거리며 남극을 누비는 모습을 상상하면 펭귄에 비견할 만큼 귀여운 모습일지도?





남극의 풍경을 바라보고 감각하는 작가의 감상은 종종 마음 어딘가를 떨리게 만들기도 했다. 장엄하면서도 유려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 인간종으로서 작고 단순해지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저자의 소망이 독자인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나 또한 어느새 그렇게 감각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감각과 동시에 드는 '기이한 상실감(p.138)'에 대한 언급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종종 느끼곤 하는 경이로움과 함께 드는 기묘한 감정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었다. 남극을 바라보는 작가의 사유를 통해 자연 앞에서 느끼는 뭉뚱그려진 감정들이 작가의 언어를 빌려 비로소 선명해지는 느낌이다.


정작 나는 추워 덜덜 떨고 있었지만 마음은 녹듯이 포근해졌다. 일면 슬퍼지기도 했는데 너무 순정한 것, 아름다운 것, 들끓는 자아 따위와는 무관한 자연 자체의 풍경과 맞닥뜨릴 때 느끼는 기이한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남극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나는 실제 내 삶은 이곳과 얼마나 다른가를 동시에 감각했다. p.138


우리가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은 자연 그 자체의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통해 내 안의 무한한 것을 표현해 내려는 욕망이 깨어나기 때문이라는 어느 책의 말이 떠올랐다. p.269


감각하는 남극은 동적이다. 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생동한다. 남극에서 발생하고 발견되는 모든 것들은 다시 지구 전체로 확장하며 그 생동력을 발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후나 생태계뿐만이 아니라 활자를 거쳐 사람에게까지 발산한다. 마음 한켠이 웅장해지는 까닭은 그런 역동성이 느껴지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감각으로 환원된 남극은 희고 차갑기도, 베일 듯이 아리기도, 익숙하고도 낯선 냄새들이기도 했다.





연휴를 앞두고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밤마다 열이 올라 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고 얼음찜질을 하며 책을 읽었다. 열 때문에 달아오른 몸을 모로 뉘여 이불 속에서 책으로 읽는 남극은 해열제가 따로 없었다. 하얗고 푸른빛의 차가운 유빙을 매번 상상하고, 얼굴이 베일 것 같이 날카로운 남극의 바람은 고통의 해갈이었다. 특히나 '창문 밖 유빙을 바라보며 느끼는 투명한 느낌'을 상상해 보는 순간에는 무거운 몸이 한없이 가볍고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지구를 한참 돌아 펭귄들 앞에 서 있는 나도 이 순간을 손쉽게 얻은 건 아니었다. 살아남기를 잘했다고 나는 해변에서 생각했다. 그건 반대의 순간들 또한 있었다는 얘기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위기들이었을 것이다. p.63


책 속에서 작가의 사유를 따라 남극을 유영하다 보니 많은 것이 해소되었다. 특히나 거대한 자연물 앞에 선 인간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언어들이 그러했다. 남극에 관한 작가의 열정은 과연 그럴만했다. 남극으로 가는 것은 사람 세상으로부터 자연 세상으로의 이동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남극에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했고. 자연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남극에서도 저마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펭귄과 해표. 갈매기를 비롯해 각종 식생들까지…. 남극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인간을 인간종種으로 겸허하게 만들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에겐 궁금하기만 했던 남극으로 대표되는 '어떤 무엇'을 향한 작가의 열정이 납득을 넘어서, 이제는 조금 부러워졌다.




*본 서평은 한겨레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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