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서툰 오십 그래서 담담하게
허일무 지음 / 파지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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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천명, 하늘의 명을 알게 된다는 나이 쉰.

100세 시대가 된 요즘에 50이라는 나이는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아 지금까지 왔던 만큼의 거리를 다시 앞두고 있는 시점으로 볼 수 있다. 군 생활로 비유하자면 위기가 가장 잘 찾아온다는 시기 일말상초(일병 말, 상병 초) 쯤 되려나.


시중에는 30대, 40대, 50대를 맞이하는 이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제목의 책들이 참 많다. 그런 류의 제목을 한 책들을 10권이상 읽어봤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런 제목들에 강함 끌림을 느낀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나보다 조금 더 앞서 걸어간 누군가가 조언을 해준다면 더할 나위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수능을 마치고 대학교와 전공을 선택할 때, 군입대를 앞두고, 직장을 선택할 때,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 나는 늘 나보다 딱 한 발자국쯤 앞서 경험한 이들의 생각이 간절하리만큼 궁금했었다. 정답이 아니어도 좋으니 관련해서 무언가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곤 했고, 그렇게 들었던 이야기들은 머릿속에 깊게 박혀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꽤나 선명하게 남아있다.


너무 앞서간 사람의 조언은 이미 변해버린 환경과 조건으로 인해 가끔 괴리가 너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불과 얼마 앞서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는 다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불필요한 실수를 줄임으로써 시간과 노력을 아낄 수 있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또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파악하여 본인의 상황에 맞게 선택과 집중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내가 매번 ‘마흔, 쉰’이라는 제목을 쉽사리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다.


저자는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절반이 되는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 현재 정비가 필요함을 느꼈다. 지금껏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왔지만 그만큼의 거리가 또다시 앞에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남은 절반의 레이스 동안 더 가치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운동화 끈을 고쳐 메려고 한다.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수많은 선택과 행동의 결과물이다. 즉 미래에 꿈꾸는 모습을 위해 현재 어떤 선택과 실천이 필요시 되는지 우리 모두 고민이 필요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고 산다. 그 불안정한 감정을 덜어내기 위해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책을 뒤져보거나 인터넷 또는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정보들을 찾아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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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에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남편을 바꾸어 놓겠다고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느느 아이를 바꾸어 놓고 말겠다고 매를 들었고, 쉰이 가까워진 지금 바꿔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조정민 목사 <사람이 선물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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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50이 되었지만 일상 생활 곳곳에서 여전히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 다짐한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자녀에게서, 오랜시간동안 묵묵히 옆에서 큰 의지가 되어주었던 배우자에게서, 어린 시절 친구와 사회에 나와 인연을 맺게 된 소중한 동료, 선, 후배들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반성한다.


나 역시 어릴 적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서른을 지나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앞으로도 흔들리고 넘어질 것이고, 불안해하고 자책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일어설 것이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꿋꿋이 나만의 레이스를 이어갈 것이다. 지금까지의 레이스를 통해 경험하고 배웠던 모든 것들이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양질의 자앙분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나중에 눈음 감는 순간 후회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 '아일랜드의 유명 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이번 서평을 마친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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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2 - 다양성 너머 심오한 세계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2
브래디 미카코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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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너머 심오한 세계'

영국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이 있다

런던의 육체 노동자 계급에 해당하는 남편과 일본인 출신의 아내,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저자는 런던에 살면서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학부형 모임이나 지역 커뮤니티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데 일상생활 중 미처 인지하지 못한 부분에서 종종 '다양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부딪히게 된다.

이 동네는 과거 노동자 계급 출신의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비교적 더 나은 성과를 내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동네 안에서도 생활 수준의 차이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본 이 동네의 전경은 천편일률적으로 빼곡하게 들어차있던 과거 주택들의 모습과 달리 알록달록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렇듯 커뮤니티내에  '다양성'이라는 문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사실은 마을의 외관에서부터 엿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외부에 사람들이 유입되었고, 그 중에는 다양한 인종과 성()문화(LGBTQ)를 지닌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으며 또한 빈부의 격차 역시 존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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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 생기는 변화에 따라 주민들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립하였고, 저자 역시 그 중에 한 명으로 다양한 갈등을 겪게 된다. 학교 역시 작은 사회이기에 아이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다양성'에서 기인한 여러 문제들을 겪게 된다. 상대적으로 빈곤한 친구도 있고, 얼굴 색이 다른 친구도 있고, 다른 성적 가치관을 가진 친구도 모두 한 공간에서 생활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저자는 본인 뿐 아니라 아들을 통해서도 이 '다양성'이라는 다루기 힘든 문제에 대해 여러 번 부딪히고 고민하게 된다.

'중산층과 하층민인종 차별주의블랙시트정치적 올바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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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고 있는  <함께여서>라는 책에서는 한 직장 내에서 함께 어울려 생활하는 X, Y, Z 세대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회의, 자료작성, 회식, 평가, 휴가, 근태' 등의 다채로운 주제들에 대해 각 세대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다루는데 이 책에서 굉장히 놀랐던 내용이 있었다. 신입사원에게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의 유무'를 묻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나도 현재 회사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 친구들이 불편해할까 싶어 사적인 질문은 최대한 삼가는 편인데, 이 책에서 말한 내용은 남자 사원에게 당연한 듯 "여자친구 있어요?"라고 묻는 게 '실례'라는 것이었다. LGBTQ(레즈, 게이, 바이, 트렌스젠더, 퀘스쳐닝)를 고려하면 특정한 '()'을 지칭하는 대신 "혹시 애인 있어요?" 혹은 "만나는 친구 있어요?"정도가 적당하다는 것이다. 이전에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었기에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다양성이라는 지뢰밭'

이토록 다양성이란 여간 다루기 힘든 문제가 아니다.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자꾸만 '침묵'을 택하는 것만이 최선인 것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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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에는 출산율 저하와 인구감소가 아주 심각한 문제 중 하나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예견하듯 멀지 않은 미래에 지역자치단체들에서 외국인들의 이주를 쌍수들고 반기게 될 것이다. 어찌됐든 그 지역에 경제가 살아나고 노동 가능한 인구가 많아야 무언가 계획을 세우고 추진해 볼 것이 아닌가.

미래에는 지역구 의원 자리를 두고 다양한 얼굴색을 지닌 여러 후보들이 함께 경합을 벌이는 모습을 보게 될 날이 도래할 것이다. 이렇듯 자연스러운 패러다임의 변화 앞에 우리 모두는 침묵 대신 '다양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미리부터 준비해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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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라는 센스가 돋보이는 책의 제목은 읽는 내내 많은 메세지를 시사하며 몇 번이고 상념에 빠지게 만든다. 독자들 역시 저자의 목소리를 통해 '다양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다같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배려'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과 노력만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다. 환경적 문화적 지원이 필요하며 화합이 필요하고 인식의 개선 역시 동반되어야 한다

혹자는 말한다.

'배려'는 곧 '지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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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 / 푸른숲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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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이름은 벤. 서른 살이고 지역 신문에서 일한다. 기사를 작성하는 일 보다는 기사에 관련된 학술적인 이론이나 유용한 정보를 괄호 안에 덧붙여 기사의 질을 높여주는 업무를 맡고 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바로 괄호맨이다.


벤은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책을 만나게 된다. 책의 표지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있었고 마치 어디선가 벤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현재 주변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우선 신뢰를 좀 쌓읍시다’라며 벤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 책은 필요한 순간에 열어보면 직면한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하임울프라는 노인은 죽기 전 인연이 있던 벤에게 위스키 한 병을 남기게 되는데, 벤은 이 술을 한 모금 먹고는 생전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임에도 마치 두 눈으로 직접 본 것 같은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후 이 신비한 술의 출처를 따라 그리고 그 술을 노리는 누군가에게 쫓겨 기묘한 책이 안내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다다른 곳, ‘바 없는 바’. 그곳에서 가게 주인인 벤처, 그리고 호쾌한 성격의 바텐더 오스나트를 만나게 된다. 벤처는 이 신비한 위스키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었고, 오스나트는 벤과 마찬가지로 하임울프가 죽기 전에 위스키를 남겨준 또다른 한 명이었다.


이 소설에는 아주 다양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의문의 누군가가 요아브 블룸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빌려 앞날을 예지하는 기묘한 책을 펴냈다는 것, 그 요아브 블룸은 주인공 벤과도 연관이 있으며, 실제로 이 책의 작가라는 점, 위스키를 마시면 그 안에 담긴 경험을 마치 본인이 겪은 것처럼 자신의 경험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컨셉.


빌런인 스테판은 자신과 일면식도 없는 여인에게 접근하여 연인 관계의 경험이 담긴 위스키를 마시게 한 뒤 본인이 원하는 바를 얻곤 한다.


우린, 그 사람이랑 나는 함께 술을 마셨죠. 난 물어보는 사람들 모두에게 스테판이 내 남자 친구라고 했고, 모두들 내가 그때까지 스테판을 숨겨 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하지만 난 그 사람을 숨긴 게 아니었어요. 그저 어제가 되기 전까지 그 사람을 몰랐을 뿐이죠. 그 놈이 내 술에 그걸 탄거에요. 그 놈이 경험자예요. 내가 안 볼 때, 그 놈이 내 술에 그걸, 아예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가지고 다니다가 여자한테 뭔가를 얻고 싶어질 때마다 그 경험을 마시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짜잔, 그 여자가 놈의 것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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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없는 바’ 건물의 지하실에는 하워드가 그의 일생에 거쳐 남겨놓은 모든 업적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부터 수많은 경험자들이 제조해낸 진귀하고 다양한 경험이 담긴 술 저장고였는데, 그 셀 수 없는 술들은 이 세상을 뒤바꿀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사실을 눈치챈 빌런 경험자 스테판과 주인공 패거리는 이 값진 유산을 둘러싸고 스펙타클한 혈투가 벌이는데 위스키에 담긴 경험만큼이나 기묘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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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당신이 울프의 일생의 업적이 고스란히 살아숨쉬는 이 지하실에서 술 한 병을 고를 수 있다면 과연 어떤 경험이 담긴 위스키를 선택할 것인가?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고 정해진 한계없이 자유롭게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보면서 이 책을 읽으면 또 다른 신선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끝.

그래도 가끔은 작은 지식 한 조각이 그의 인생의 한 모퉁이를 밝혀 주었다. 예를 들면, 외로운 고래에 관한 기사가 그랬다. 태평양 깊은 곳 어딘가에서는 과학자들이 52헤르츠라는 별명을 붙인 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다. 고래류의 다른 모든 개체가 15~25헤르츠의 주파수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비해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고래만은 52헤르츠로 노래를 부른다. 다른 어떤 고래도 녀석에게 응답하지 않는다. 그 고래는 다른 무리와 합류하지 않고 수십 년 동안 허공에 음을 발사하며, 아무 응답도 받지 못한 채 헤엄치고 있다.



벤은 그 기사를 읽고 의자에 깊숙이 기대 눈을 감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쩌면 벤 역시 그랬는지도 몰랐다. 벤 또한 자신만의 주파수로 방송을 하며, 다른 어떤 고래도 쓰지 않는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모두 외로운 고래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주파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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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 아버지, 당신은 사랑이었습니다
최선겸 지음 / 파지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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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동생, 그리고 막내와 함께 자라온 저자는 이 가정의 맏딸(장녀)이다. 아버지의 힘겨운 암투병 생활과 숨을 거두실 때까지의 모든 과정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저자는 본인과 가족이 살아온 그간의 나날들을 되돌다 보게 되었고,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새겨보게 된다.

억척스럽게 절약하며 가끔은 까칠한 성격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던 어머니와 누구보다 딸들을 사랑하지만 무뚝뚝하고 엄했던 아버지, 한날 한시에 태어났지만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쌍둥이자기 앞가림 잘 하고 자기 몫을 확실히 챙길 줄 아는 영특한 막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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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생김새만큼 슬픔을 마주하는 모습도 제각기 달랐다.

저자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자신과는 달리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모습에 적잖은 충격과 배신감을 느끼고때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격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읽는 동안 책을 뚫고 나에게 까지 전해지는 불편함이 너무 극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슬픔을 대하는 모습은 제각기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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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 역시 폐암으로 1년 넘게 고생하시다가 작년 초에 떠나셨는데, 1년 반이 지난 지금 이런 내용의 책을 읽으면서도 눈물을 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솔직히 조금 놀랐다..

책 속의 여러 대목들은 기억 속 2년 전 어느 장면 속으로 나를 다시 데려다 놓았다. 가슴 속에 여전히 남아있던 응어리가 몇 번씩이나 다시 타올랐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한 쪽으로 밀어두었던 그 용암 같은 슬픔이아직 다 꺼지지 않고 여기 그대로 남아있다고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았다.

기억 조각들을 하나씩 모으다 보니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기 힘들어 일부러 고개를 돌리곤 했던 그때의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머물다가 오실 때면 어김없이 상태는 더 안좋아졌고, 체중은 눈에 띄게 줄어만 갔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마른 나뭇가지가 바깥 쪽부터 천천히 젖어 들어가듯 온 몸은 차례대로 기운을 잃었고 아주 천천히 물 속으로 가라 앉는 듯 했다.

아버지와 눈을 마주칠 때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재간이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거울삼아 아버지가 본인의 상태를 직감 하실까 여러 번 이를 꽉 깨물고 표정을 숨겼다. 우리는 불씨가 잦아들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애써 태연한 척 밝은 이야기만 했고, 더 이상 그 어떠한 거짓말로도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포장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냥 그렇게 점점 말 수가 줄어들었다.

절대로 넘을 수 없는 큰 벽을 만난 것처럼 그저 주저앉아 어린애처럼 울고 매달리며 속수무책인 상태로 시간이 흘러갔다. 이제 나도 어엿한 어른이라고, 모든 일은 스스로 해쳐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오만한 내 모습이 그토록 한심하고 하찮게 느껴질 수 없었다.

아버지의 상태를 걱정하면서 한편으론 금전적인 문제들이 올랐을 땐 스스로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이 나를 집어 삼켰고, 허우적거려 볼 의욕조차 없이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 깊은 무력감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나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전과 다를 바 없이 유유히 돌아갔다. 뒤섞인 감정이 폭풍우처럼 소용돌이 치는 와중에도 잔인한 현실은 끝없이 내게 무언가를 하길 요구했고 슬픔의 바다에 부유하도록 절대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2년간 가족 모두가 끝 모를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 기간 동안 내 인생 그 어떤 시기보다도 극심한 성장통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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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 모르게 그 이후로 나는 조금 변했고, 그 모습은 아버지와 조금 더 닮아있는 듯 하다.

어느 누구도 결코 피할 수 없는 .

나의 죽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우리들 대부분은 잘 사는 법에 혈안이 되어있지만, 가끔은 이런 책을 읽으며 잘 죽는 법에 대해서도 한번쯤 고민해보면 너무 좋다.

원래 인생은 참 역설적이게도 이별 후에야 얼마나 사랑 했었는지 깨닫고 죽음 앞에서 삶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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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보물들은 아빠, 엄마보다 아름다운 하루하루 따사로운 빛을 바라보면 살아가기를 이 못난 아빠가 어제나 오늘이나 생을 마치는 그날까지 꿈속에서라도 항상 사랑하며 보살펴줄게.
– 못난 아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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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세계에서 이 눈물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미사키 지음, 김윤경 옮김 / 모모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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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라는 책의 스핀 오프로 출판된 책이지만 본편을 읽지 않았음에도 스토리를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리고 본편의 대략적인 내용을 추정해볼 수도 있었다.)

본편에서는 가미야 도루라는 한 남학생과 선행성 기억장애를 겪고 있는 여학생 히노 마오리의 애틋한 사랑을 다뤘다면 이번 편에서는 히노 마오리의 친구이지만 가미야 도루에게 호감을 갖게 된 와타야 이즈미라는 여학생의 시선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 소설 속에서는 이야기의 풍미를 더하는 두 가지 강력한 장치가 있는데, 한 가지는 히노 마오리가 겪었던선행성 기억장애라는 병이고, 다른 한 가지는 둘도 없는 단짝 친구의 연인을 짝사랑하게 된 상황이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히노에게 있어 와타야는 전부와도 같은 존재였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전날의 기억이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전날 부지런히 남겨둔 기록조차 숭숭 뚫려버린 기억의 구멍들을 완벽히 메꿀 순 없었다. 이때 히노의 옆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의지할 수 있도록 세심한 부분까지 배려해준 친구가 바로 와타야였다.

히노의 연애를 시작으로 서로의 분신과도 같았던 이 둘 사이에 가미야 도루라는 제 3자가 개입하게 되었고, 와타야는 묘한 질투심을 느끼게 된다. 처음엔 가미야의 존재를 그저 가볍게 여겼으나 히노의 병을 알게 된 이후에도 변함없이 헌식적인 사랑으로 히노의 빈자리를 채워주고자 노력하는 그의 따뜻하고 자상한 모습에 호감을 갖게 된다.

대게 사람은 자신이라는 존재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자신 이상으로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건 무리다. 항상 이해득실을 따지고 자신에게 유리한 일만 하기 마련이다.

일시적으로 잘해주는 거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은 계속된다. 소중히 대하겠다 마음먹은 그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일쯤이야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슬플 정도로 가차 없이 모든 것은 움직이기 때문이다.

와타야는 히노를 소중하게 여겼고 가미야와 함께 지내며 행복한 그녀의 모습을 진정으로 바랬기에 자신의 짝사랑하는 마음을 거두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기침과 사랑은 결코 숨길 수 없는 법. 점점 커져만 가는 가미야를 향한 호감과 히노를 향한 죄책감은 와타야를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날 가미야는 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는 죽기 전 와타야를 찾아와 히노의 인생에서 자신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짝사랑의 존재,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에 대한 그리움은 오히려 더욱 깊어져만 가고, 과거에 발목을 붙잡혀 현실에 집중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한편 히노는 병이 회복되고 일상 생활 가운데 문득 문득 낯선 기시감을 느끼며 한 남학생에 대한 기억을 조금씩 되살리게 된다.

떠나간 사람의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하나의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그 자체로의 가치를 점점 깨닫게 된다.

한 때 유행했던 친구에 친구를 사랑했네라는 카피라이트가 떠올랐던 소설. 와타야의 입장에서 감정 이입을 해보며, 그녀가 간직한 추억을 한 장씩 함께 들춰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순간 세상이 무거워졌다.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던 레스토랑의 소음이 갑자기 귀에 들어와 꽂혔다. 나이프와 포크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커플들의 즐거운 대화 소리, 홀에서 일하는 지구인들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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