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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말이 될 때 - 우리의 세계를 넓히는 질병의 언어들 ㅣ 맞불
안희제.이다울 지음 / 동녘 / 2022년 4월
평점 :
이번 책은 두 번역가의 대화,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라는 책에 이어 출간된 또 하나의 ‘맞불’ 시리즈로, 이번에는 희소 질병을 앓고 있는 두
작가의 대화를 담아냈다. (이 책을 통해 ‘희귀’라는 표현 대신 ‘희소’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맞불’시리즈는 공통 분모를 가진 두 작가가 편지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책인데, 각자의 경험과 일상 그리고 생각과 고민의 흔적들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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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서평은 <책은
도끼다>에서 박웅현 작가가 ‘독서는 이래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굳어있던 생각에 균열이 생기고 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던 부분에 좀 더 집중해보려고
한다.
사실 이번 책을 통해서는 크게 반성하고 부끄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그 연장선에서 ‘독서의 커다란
장점’ 하나를 더 발견하고 사고의 영역이 조금 더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뿌듯함을 느꼈다.
우선 반성했던 점은 ‘타인
혹은 세상을 바로 보는 눈’에 관한 것인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존의 경험을 토대로 짜깁기해 상대 혹은 상황을 넘겨짚어 판단하는 ‘선입견’ 혹은 ‘편견’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책을 읽기에 앞서 책에서 다뤄지게 될 ‘희소 질병’을 앓고 있는 두 사람의 삶에 대해 몇 가지
지레 짐작을 했었다. 어떤 고통이 수반되는 지, 얼마나
일상 생활을 힘들게 만드는지, 대인 관계에서는 얼마나 큰 방해요소로 작용하는지 등등의 이야기들
말이다. 그리고 가끔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질병’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서 뭉뚱그려 해석하고 그 그룹에 속한 이들에 대해서 마치 어느 정도는 이해한 것으로
착각하곤 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
두 저자는 공통적으로 병을 가지고 있지만 ‘크론병’과 ‘섬유근육통’으로 그 종류가 서로 다르고, 단지 병의 종류뿐만이 아니라
각자의 취향이나 성격 등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즉 두 명의 환자가 아닌 그냥 어떤
병을 가지고 있는 한 명과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게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주 무지로 인해 마음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그룹화 시켜버린다. 이 우매함은 때론 그들에게
잔인한 폭력으로 또 가혹한 차별로 가 닿는다. 한 명의 인간이 아닌 한 명의 환자로 대하는
이러한 태도가 이들을 사회적 약자로 규정짓고 침묵시켜 일상에 섞이지 못하도록 암묵적인 선을 긋는 행위인 셈이다.
단지 추측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떨 때는 극히 제한적이라
사실상 그 추측이 무의미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책을 읽기 전 질병을
앓음으로 인해 생활 속에서 조심해야 하는 것들을(이를테면 음식이나 과격한 운동, 장거리 운행 등) 손쉽게 떠올렸으나, 질병이 더 이상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익숙하고 지루한 일상이 되어버린 이들의 삶은 상상 이상으로 많은
부분에서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타인에게 수없이 자신의 증상이나 고통을 설명해야 했으며, 온갖 의심과 연민의 눈동자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해 항변하듯 끝없이 변명거리를
늘어놓는 억울함을 느껴야만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그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육체의 불편함은 필연적으로 마음과 정신에 불편함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기 마련인 듯 하다.
이와 동시에 또 깨닫게 된 ‘독서의 커다란 장점’ 한 가지는 바로
나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이다. ‘메타인지’와도 연관 지을
수 있겠으나 이것은 지식에 관련된 것이 아닌, 타인에 대한 이해심을 바탕으로 한 ‘배려’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책을 통해 그 안에 담긴 여러 인생들을 엿보면서 ‘역지사지’의 중요성을 매번 깨닫는 것 같다. 나의 무지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미루어
유추해보는 나의 추측은 너무 얄팍할 뿐이라는 것, 이러한 배움을 통해 더 성숙한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고 타인과 조화롭게 잘 융화되어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알아갈수록 오히려 ‘적절한 말’ 보다 ‘침묵’을 선택하는 일이 점점 더 빈번해지는 것에 대해서도
시간을 내어 고민해보고 싶다. (이해심이 깊어지는 것과 회피형 인간이 되는 것 사이의 기준에 대하여)
저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검열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동안 제가 너무 열심히 살아서 몸이 아픈 것이라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제가 너무 나태하기 때문에 몸이 아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는 욕망을 줄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감추어둔 욕망을 분출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모든 진심 앞에서 종종 열이 받았습니다. 저의 모든 과거는 과오가 되었습니다.
처음엔 병원에서 하도 혼나니까 말을 잘 못했어요. 섬유근육통이라는 진단명이 없을 땐 그 강도가 더욱 심했죠. 운동 부족이라며 혼을 내는 병원과 운동 과다라며 혼을 내는 병원 사이에서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귀띔해 들은 의한 정보를 살짝 꺼내기라도 하면 비웃음을 사기 일쑤였습니다. 게다가 의사 선생님은 늘 바쁘고 내 뒤로 간절한 환자는 많고… 어서 말을 마치지 않으면 그야말로 민폐라는 생각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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