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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의 비상 - 미셸 투르니에 독서노트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은주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책 읽는 즐거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유용한 일입니다. 무료한 시간, 함께 벗할 수 있어서 좋고, 책 속의 멋진 구절 하나 인용하니 뽐낼 수 있어 좋고, 두툼한 책 베고 누워 잘 수 있으니 좋고, 사발면 뚜껑 위에 덮어 라면의 깊은 맛을 우려낼 수 있으니 좋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책을 읽어서 유용한 일 중 하나는 즐거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법정스님이 쓴 글 중에 허균의 <한정록(閑情錄)>에서 발췌한 멋들어진 구절이 생각납니다. 허균이 말하기를 책을 읽는 즐거움이 세 가지가 있답니다.
첫째 즐거움은 이렇습니다. ˝맑은 날 밤에 고요히 앉아 등불을 밝히고 차를 달이면 온 세상은 죽은 듯 고요하고 이따금 멀리서 종소리 들려온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책을 펴 들고 피로를 잊는다.˝
둘째 즐거움은 이렇습니다. ˝비바람이 길을 막으면 문을 닫고 방을 깨끗이 청소한다. 사람의 출입은 끊어지고 서책은 앞에 가득히 쌓여있다. 아무 책이나 내키는 대로 뽑아 든다. 시냇물 소리 졸졸 들려오고 처마 밑 고드름에 벼루를 씻는다. 이처럼 그윽한 고요가 둘째 즐거움이다.˝
셋째 즐거움은 이렇습니다. ˝낙엽이 진 숲에 한 해는 저물고 싸락눈이 내리거나 눈이 깊이 쌓였다. 마른 나뭇가지를 바람이 흔들며 지나가면 겨울새는 들녘에서 우짖는다. 방안에 난로를 끼고 앉아있으면 차 향기 또한 그윽하다. 이럴 때 시집을 펼쳐 들면 정다운 친구를 대하는 것 같다. 이런 정경이 셋째 즐거움이다.˝
허균처럼 깊은 즐거움을 갖기란 어렵겠지요. 그러나 적으나마 책을 읽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책을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이런 어려운 시절에 조금은 쉬어갈 수 있는 아주 유용한 휴식처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은 미셸 투르니에의 《흡혈귀의 비상 : 미셸 투르니에 독서노트》의 한 대목입니다.
한 권의 책은 한 명의 저자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수의 저자들을 갖는다. 그것은 그 책을 읽은 사람, 읽는 사람, 읽을 사람들 전체가 창조 행위에 있어서 책을 쓴 사람에게 마땅히 보태어지는 까닭이다. 쓰여졌으나 읽히지 않은 책은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半)존재만을 가졌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잠재성이며, 존재하기 위해 열심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알맹이가 없이 텅 빈 불행한 존재이다. 작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한 권의 책을 출판할 때그는 익명의 남녀의 무리 속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새떼를, 피에 굶주려 야윈 흡혈조들을 풀어놓는 것이다. 그 새들은 닥치는 대로 독자를 찾아 흩어진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은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은 활짝 피어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들과 독자의 환상들이 구별할 수 없게 뒤섞여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에 아빠의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섞여 있듯이` `풍부한 상상의 세계이다. 마침내 독서가 끝나면, 소진되어 독자에게서 버림받은 그 책은 제 상상력을 수태시키려 다른 생명을 기다릴 것이며, 그 소명을 실현할 기회를 만나면, 마치 수탉이 무수한 암탉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듯, 이 손에서 저손으로 넘나들 것이다.[미셸 투르니에(이은주 역) 《흡혈귀의 비상 : 미셸 투르니에 독서노트》, 현대문학, 2002, pp. 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