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보의 여행 - 나 홀로 249일, 유쾌한 18개국 62개 도시 정복기
이승아 지음 / 시드페이퍼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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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렇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좋게 말하면 그저 집에 있는 걸 너무 좋아해서, 어중간하게 말하면 새로운 경험과 풍경을 보는 맛을 아직 잘 모르기에, 나쁘게 말하면 돌아다니는 걸 너무 귀찮아한다는 거다. 그렇다고 일 년에 한 번도 (며칠 자고 오는) 여행이란 걸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친한 지인이 당근을 제시하며 억지로 잡아끌면 못 이기는 척 합류하고는 그날 저녁에 술 한 잔 마시며 오길 잘 했네, 끼워줘서 고맙다고 진심을 말하거나, 가족들이 여행을 논의하면 속으로 불평을 하면서도 당장 인터넷을 뒤적거려 잔뜩 정보를 뽑아낸다. 이왕 가는 거 헤매지 않고 철저한 계획 하에 잘 움직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의 저자처럼 혼자 가는 여행이란 내게 낯선 정도가 아니라 큰 모험처럼 여겨진다. 더구나 세계를 무대로 떠난다니...!

 

이렇게 여행에 별 관심이 없지만 가끔씩 다른 사람의 여행기를 찾아 읽기는 한다. 아무리 귀찮아해도 여행이 주는 새로운 경험과 풍경, 일상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의 맛을 조금은 느껴봤기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대리만족의 차원도 있지만 그보단 내가 주저하는 떠남의 용기가 부러워서다. 잘 짜인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돌발변수가 가득한 길을 걸어보겠다는 그 시작의 발걸음이 대단해서다. 누군가는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내가 바로 쫄보이기 때문이다...!

 

겁 많고 걱정은 더 많은, 스스로 쫄보임을 밝히는 저자가 나 홀로 249, 18개국 62개 도시를 다녀왔다. 처음 봤을 때, 그래, 나처럼 여행에 별 관심 없는 사람이 있다면 돌아다니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도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내 동생이 그렇기 때문이다. 내가 집을 너무 좋아한다면 내 동생은 스스로 역마살이 있다고 말할 만큼 돌아다녔는데, 이 책의 저자가 그런 역마살 때문에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한 건 아니다.

 

[p12.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끊임없이 밀려왔고, 부정적인 생각들로 하루를 가득 채우다 보니 내가 원래 뭘 하고 싶었는지도 헷갈렸다. 인생을 주도적으로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무력하게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이 점점 싫어졌다...

... 내가 꿈꾸던 스물둘의 모습과 실제로 마주한 내 모습은 너무도 달랐다.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 괴로워하며, 일주일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민한 끝에 휴학을 결정했다. 열아홉의 이승아와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여행이 바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었다는 걸 자각했다.]

 

떠나는 계기가 어떻든 (배낭)여행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일상에서 벗어나기, 좀 더 의미를 둔다면 새로운 도전 속에서 진정한 나를 보기,가 아닐까싶다. 저자 또한 그러하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고민과 꿈꾸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공존하는 가운데 절박한 심정으로 선택을 한 것이다. 잘 짜인 패키지여행이 틀에 박힌 미래, 정해진 길을 가도록 강요받는 삶이라면, 배낭여행은 여러 갈림길 중 하나를 스스로 선택해 나만의 길(인생)을 만들어나가는 주도적인 삶이라 비유할 수 있기에, 그런 미래를 꿈꾸고 싶기에 이십대 초반의 어린 나이임에도 그런 과감한 결정을 내린 듯싶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여성이라는 일반적인 우려가 있음에도 말이다.

 

살다보면 결정을 번복할 수 있다. 사정이 생겨, 미음이 변해 선택을 바꿀 수도 있다. 저자에겐 여행경비 마련을 위한 9개월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를 해 13,500,000원을 모았고, 걱정 때문에 반대하는 부모님을 끈질기게 설득해 기어이 대장정에 들어갔다. 4개월간 남미와 유럽을 여행하기로 한 계획은 어쩌다가 8개월로 늘어났다. 스스로 한 선택을 끝까지 밀고나갔고,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려 예정보다 두 배의 기간을 다녀왔다.

 

[p 150. 여행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나는 짧은 고민 끝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다... 4학년 1학기 휴학을 신청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4개월 여정으로 일정을 짰고, 그에 맞춰 경비도 준비했던 내 여행이 끝을 알 수 없는 궤도에 진입했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다. 동시에 불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고, 또래 친구들보다 늦어질 졸업이 취업에 악영향을 미칠까 내심 걱정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는 소중한 일들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 컸다.

휴학 신청 버튼을 눌렀던 이날의 용기는 내가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잡는데 꽤 큰 도움을 주었다.]

 

저자는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게 아니라 어디서 무엇을 할지 꼼꼼하게 계획하고 행동했다. 상황마다 변수가 있긴 했지만 그에 맞추면서도 전체적인 큰 줄기를 놓치지 않고 움직였다. 최소한 자신이 어디로 가고 가야할지를,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들을 인지했기에 두 배의 여행기간이 가능했고 휴학이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저자 또한 이날의 용기가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잡는데 꽤 큰 도움을 주었다 하니, 여행에서 경험한 수많은 선택들 중 꽤 큰 비중이었으리라. 나 또한 이런 형태는 아니지만 대학 시절 1년 휴학의 결정을, 그 선택의 고민을 한 적이 있기에 공감을 한다. 그 시간 동안 경험했던 일들을 잊을 수 없으며 지금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일단 좀 살자,는 생각이 강했고 어찌됐든 지금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p 297.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여행자들에 대한 환상이 컸다... 자유로운 삶을 향유하며 항상 유쾌하고 즐거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직면해 보니, 혼자 여행을 한다는 것은 끔찍이도 외로운 것이었다. 혼자 밥 먹는 것조차 꺼려했던 내게 외로움의 무게는 상상도 못할 만큼 묵직하게 다가왔다.

여행 초반, 한껏 부푼 기대감은 허무한 굉음을 내며 와르르 무너졌다. 상상했던 여행과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호스텔에서 혼자 휴대폰만 만지고 있는 내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혼자가 편하다고 주문을 외웠지만 막상 여럿이서 다니는 또래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고,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혼자만 만끽할 수 있는 자유로움보다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이 훨씬 크게 다가왔고, 이 외로움에 적응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외로움에 점차 익숙해지자, 생각하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자연스레 스스로와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온전히 나만 생각하면서 선택하고 결정한 순간들이 모이게 되니,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나의 진실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나홀로 여행을 한 번 한 적이 있다. 제대휴가를 나와서 외가인 강원도 주문진으로 이박삼일 다녀왔는데, 마음 편히 숙식이 해결되는, 그저 서울에서 강원도로 버스만 좀 오래 타면 되는 외가 방문길이니 여행이랄 것도 없지만 어린 나이에 혼자 배낭을 메고 며칠 다녀왔다는 점에서 내게는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집 앞의 한적한 해변을 걸으며 바다 보기를 삼십분, 앞으로 뭐하고 살지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자는 거창한 다짐은 단 삼십분 만에 지겨움으로 바뀌었다. 해변에 누워 뒹굴다 곳곳에 모래가 들어가 나에게 짜증을 냈고, 끝도 없이 넓고 푸른 바다는 무료함을 더했으며 무엇보다 시야에 사람 한 명 없어 괜히 외로웠다. 앞날에 대한 계획과 다짐은 따분함에 묻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너무 심심해 주문진 시내로 나갔지만 간만에 보는 외가의 시골풍경도 삼십분 만에 그 설레임이 다해 한 시간 정도를 느릿느릿 걷다가 돌아왔다. 항구의 비린내를 쉽게 적응할 수 없었던 기억도 난다.

 

예전에 본 어떤 글에서 여행의 진짜 묘미는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는 시간과 떠난다는 설레임에 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은 백인백색이니 개인마다 의미를 다르게 두는 건 당연하기에 공감이 되기는 했다. 아무리 여행을 귀찮아해도 떠나기 직전의 설레임과 기대를 나 또한 한 적이 있기에, 막상 여행을 떠나면 기대만큼은 아닌 적도 많았고 오히려 고생스러워 실망한 적도 있기에 그렇다.

 

위에 적은 에필로그 지문에서, 저자는 나홀로 여행의 외로움을 절절히 느끼면서 여행이 꼭 환상적이지는 않으며, 현실을 동반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침잠하는 경험을 한다. 외로움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와 깊이 대화를 하고 진실된 모습들을 발견해간다.

누군가에겐 여행의 묘미가 떠나기 직전의 설레임일 수도 있고, 저자와 비슷한 경험일 수 있으며, 나처럼 혼자는 너무 심심하니 누군가와 함께여야 좋다는 것일 수도 있다.

 

[p 259. 여행의 방식은 한 가지가 아니다. 그것은 여행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다. 그러니 내가 하는 여행은 온전히 내게만 정답이고, 네가 하는 여행은 오로지 네게만 정답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린 비로소 다양성을 배우게 된다.]

 

어쩌면 여행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다보니 내가 여행에 별 관심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언젠가 이 얘기를 여행에서 함께 돌아오는 지인에게 했더니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갔다 오는 거야. 재밌잖아.”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고생스러우면 고생스러운 대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게 좋다는 거다. 그의 여행의 정답은 그거였다.

저자가 다녀온 249일간의 18개국 남미, 유럽 여행은 어떤 정답을 주었을까. 온전히 저자만이 알겠지만, 이 책을 통해 그의 바람을 알 수는 있다.

[p 208. 그리고 나는 내 글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전할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겐 간접적인 일탈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용기를 건넬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아졌다.]

 

3시간 만에 완독하게 만드는 이 책이 여느 여행기와 확연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단번에 읽을 수 있었던 건 담백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추린 에피소드들과 그 속에 담긴 저자의 진솔한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보여준 용기어린 행동과, 재밌기도 했지만 위태로웠던 상황들을 잘 대처하는 저자의 모습에 동화되면서 잠시나마 세계일주의 맛을 함께 느꼈기 때문이다.

매번 여행기를 보면서 느끼는 건 여행을 귀찮아하는 나조차 잠시라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는 거다. 특히 이 책이 그런 건 저자 스스로 쫄보임을 인정하면서 큰 모험을 다녀왔다는 점이다. 여행에 있어 나 또한 쫄보이고 문외한이다. 그래서 더 공감을 하며 일독했다. 앞으로 내가 (이런 식의)여행에 있어 약간의 용기를 얻는다면 이 책의 도움도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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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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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첫 한겨레 21(1143)‘2016년 올해의 판결이란 기사를 실었다. ‘박수친다, 이 판결’, ‘경고한다, 이 판결이란 이름으로 각기 5건씩 선정했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의 판결로는 촛불시위 금지 통보 집행정지 가처분 인용 결정’, 최악의 판결로는 세월호 참사 당일 청와대 기록 비공개 결정이다. , 최고의 판결 덕분에 점차적으로 청와대 100m 앞까지 촛불시위의 무대를 확장시킬 수 있었고, 최악의 판결 때문에 국민의 알권리는 외면당하고 지금도 소모적인 논쟁과 더불어 대통령지정기록물이 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해있다. 이렇게 되면 최장 30년까지 공개되지 않는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은 같은 피해에는 같은 방법으로 보복한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유명하지만, 오히려 사적인 복수, 귀족의 권력남용을 제한하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어 오늘날에는 문명화된 법전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법원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의 주인공들 직업은 법정드라마의 단골 직업인 변호사, 검사가 아니라 판사다. 현직 부장판사가 썼으니 당연하겠지만 역시나 생소하다. 그건 우리가 익히 보아온 발로 뛰어 증거를 수집하고 증인을 설득하는 등의 그림이 그려지는 액션의 역할이 아니라, 제출된 기록지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판단해야 하는 역할이기에 그렇겠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고리타분할 수도 있겠고, 다수의 법감정과 배치되는 판결이 나올 때면 사법부에 대한 불신의 골은 깊어진다. 몸으로라도 뛰면 최선을 다했다는 표시라도 날 텐데 그렇지도 않으니 당사자들이 아니면 그 어려움을 알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작가 또한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분쟁의 모습을 그리되, 그것을 재판하는 판사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솔직하게 그려보고 싶었다. 신비의 베일이 불신과 오해만 낳고 있다는 반성 때문이기도 하다.”

 

, ‘2016년 올해의 판결에 전부 동의한다. 최고의 판결에 엄지척을, 최악의 판결에 혀를 차고 분노하는 건 내 성향이 크게 좌우했기 때문이겠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최악의 판결을 내린 판사들에게 욕을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법부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 사법부 안에는 내가 동의하는 판결을 내린 판사들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는 나와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들도 있으며, 그들은 최악의 판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해하고, 모르는 판사들이라고 해서 욕을 한다는 건 일단 논리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개인적인 감정이란 전제를 깔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20년 정도 판사로 일하면서 든 생각은 법정이든 세상이든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미스 함무라비에서도 재판부가 화끈하게 결론을 내린 것은 하나도 없다. 항상 그런 식이다. 판사는 늘 벽에 부딪힌다. 햄릿처럼 갈등하고 고민한다. 정작 해결의 실마리를 쥐는 것은 시민들이다.” 2부 고깃집 사건을 보면 조선족 종업원에게 동정이 가지만, 원고의 사정을 들어보면 이해도 된다. 4부 자살기도 사건을 보면 회사 팀장의 압박도 상당하지만 집안과 아내에 대한 스트레스도 그에 못지않았다. 6부 교수와 대학원생 여제자의 준강간 사건의 내막 또한 어느 한쪽이 일방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7부 국민참여재판을 보면 작가가 말한, ‘정작 해결의 실마리를 쥐는 것은 시민들임을 볼 수 있다.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단언컨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법을 믿고, 법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이자 최대한의 권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겠다. 아울러 성향이 다름에도 모두가 감동을 느끼기도 하는 건 법에도 눈물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겠다. 법이 만능이 아님을, 완벽하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법이 더욱 신뢰를 받으려면 시민들이 이끌고 판사들이 깨어있어야 한다. 작품 속 세 명의 판사들은 그러한 모습들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법과 판사를 믿어주고 싶은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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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세트 - 전2권
말런 제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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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1976년부터 1991년까지 15년이란 시간을 다루며, 75명의 등장인물들 중 13명의 화자를 선택해 구술이란 특이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자메이카를 중심으로 미국까지 무대를 확장시켜 다양한 공간배경을 보여주고, 혼란스러운 자메이카의 속살과 초강대국 미국의 음흉한 공작의 민낯을 정치적 역학관계로 엮어 복잡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총 1176쪽의 이 대작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건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생산해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작품을 지탱하고 관통하며 중심이 되는 하나의 소재는 있다. 실화인 1976년 레게 황제 밥 말리 암살기도사건이 그것이다. 이 역사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파생되는 일련의 사건들과 그로인해 오랜 시간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의 삶의 모습. 13명 화자들의 비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개개인의 삶속에서는 각자가 인생의 주연이기에 살벌하게 다가오는 모습들일지라도 가벼이 넘어갈 수 없다. 비록 총질과 폭력, 마약으로 얼룩진 인생의 실패자의 결말이라도 말이다.

 

페미니스트+퀴어 관점

작품의 옮긴이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런 바람을 드러냈다.

[2p 680. 실제의 어떤 인간도, 어떤 삶의 방식도 주변화 될 수 없듯 소설 속 화자들을 각각 하나로 꿴다면 커다란 줄기가 굵직굵직하게 잡힐 것이다. 예컨대 위퍼나 존-K, 니나 버지스를 사건의 축에 두고 이야기를 정리한다면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나 퀴어 비평의 관점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흥미로운 비평작업이 더 많이 이루어져 즐거운 의사소통의 시간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옮긴이의 말처럼, 대작이다 보니 이야깃거리가 많을 수밖에 없고, 여러 이야기 축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단 위 지문처럼 페미니스트적 관점이나 퀴어 비평의 관점을 합쳐서 중심으로 이야기 축을 세워본다면, 위 지문에 언급된 세 인물들은 남성 중심적인 시각 때문에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비참하게 드러내는 여성이거나(니나 버지스) 동성애자다(위퍼와 존-K). 이들은 기존에 만들어진 질서나 체제에 순응하기를 강요받는 인물들로 자신의 위치를 억압받거나 또는 내면의 다른 모습을 감추며 살아간다. 페미니스트와 퀴어를 한 축으로 묶은 건 약자숨김이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강요와 폭력으로 드러나는 약자의 모습이나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행동이 결국은 약하기때문이라는 범주에 들기에 두 양상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위퍼는 코펜하겐시티 갱단의 던(보스), 조시 웨일스의 오른팔이이고, -K는 살인청부업을 하는 백인소년이란 점이다. 두 남성은 감추고 싶은 모습(약함)과 동시에 총이란 폭력성을 보유한 인물들로, 언제든 그러한 약함을 감추거나 지워버릴 수 있는 힘이 있다. 반대로 니나 버지스는 약함 이외에 가진 게 없는 인물. 그녀에겐 자신의 위치와 공간(자메이카)에서 탈출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동기를 가진, 두 남성과는 한 범주 안에 들면서도 완전히 다른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요소가 페미니스트+퀴어 관점에서 보면 꽤 흥미롭게 다가온다.

 

갱단+CIA의 관점

작품의 시작이자 중심이 되는 밥 말리 암살기도사건은 자메이카 갱단과 미국 CIA의 합작품으로 벌어진다. 정치적 혼란은 극도의 사회적 불안을 동반하고 증폭될 수밖에 없기에 폭력집단이 창궐하는 건 당연한 모양새다.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을 양분하는 코펜하겐시티와 그보다 세력이 조금 약한 에이트레인즈란 두 갱단 중 코펜하겐시티의 행동대장 조시 웨일스는 CIA의 사주와 지원,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져 갱단원들과 함께 밥 말리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하지만 미수에 그친다. 이러한 사건의 배경을 잠시 따져보면, 당시 자메이카는 쿠바의 전철을 밟아 사회주의가 될 가능성이 높았고 이에 불안을 느낀 미국이 자본주의를 표방한 노동당을 지원하는 코펜하겐시티 갱단을 움직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건은 미수에 그치고 CIA는 목적달성에 실패하지만 행동대장이었던 조시 웨일스는 몇 년 후 갱단의 보스가 된다.

 

[2p 248. 세상은 게토가 아니고 게토는 세상이 아니다. 게토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건 그들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하는 일로 밥을 벌어먹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절은 누군가에게는 나쁜 시절이기도 하다.

노동당도 인민국가당도 평화조약에 씨발 아무 관심이 없는 게 바로 그 때문이다. 전쟁으로 얻을 게 너무 많은 경우에는 평화란 게 생길 수가 없다. 또 평화라는 게 계속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라면 누가 그걸 원하겠는가? - 화자 조시 웨일스. 코펜하겐시티 갱단의 던(보스)]

 

누군가의 이득은 누군가의 손해로 충당된다. 자메이카의 사회주의를 막는 것은 미국에게 이익이 되고, 혼란한 정치, 사회상황은 폭력을 기반으로 하는 갱단에게 권력과 부를 준다. 그에 반해 자메이카 국민은 스스로 선택할 권리와 자유를 잃으며 폭력에 유린당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1976년 암살기도사건이 벌어진 2년 후 1978년에 자메이카의 두 갱단 보스는 지긋지긋한 폭력의 전쟁을 끝내고자 영국에 체류 중인 밥 말리를 설득해 두 번째 평화콘서트를 기획해 성사시키지만 평화는 요원하다. 누군가들에게 평화란 눈앞에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못한 가치일 뿐이다.

자메이카의 현실을 보여주는 갱단의 폭력성과 평화를 가장한 미국 CIA의 음흉한 공작은 목적은 다르지만 같은 범주 안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두 집단이 암살계획을 모의해 실행에 옮긴 것이고 말이다. 이 작품은 내내 폭력을 보여줌으로써 폭력의 부당함을 역설하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코펜하겐시티 갱단의 보스, 조시 웨일스의 관점

작품의 중심소재인 밥 말리 암살기도사건의 실행자는 후에 갱단의 보스가 되는 행동대장 조시 웨일스다. 보스 파파-로가 기획한 밥 말리 평화콘서트를 방해한다는 건 그가 파파-로에 대한 배신을 넘어서 자메이카의 평화를 원치 않는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다. 조시가 왜 평화를 바라지 않을까란 대답은 간단하다. 앞서 언급한, 평화보다 눈앞에 현실적인 이익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는, 78명의 등장인물들 중 13명의 화자로 선택된 가운데에서도 제일 비중이 크다.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을 장악한 후에도 미국의 뉴욕 등으로 세를 확장시키는, 어떻게 보면 폭력갱단의 보스로서는 아주 적합한 인물이기도 하다. 총질과 폭력은 기본이고 임산부를 죽이는 데도 망설이지 않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악당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CIA의 지원을 받으며 실행한 암살계획이 성공 직전까지 갔음에도 밥 말리는 살아남는다. ?

[p 220. 지금 수많은 남자와 여자가 가수(밥 말리)를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일인데, 가수를 죽여 버리는 순간 그자가 순교자 등급 졸업장을 따게 된다는 건 왜 모를까. 그렇게 하면 온 세상이 뭘 알게 될까? 예언자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냥 사람일 뿐이라는 것.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총을 맞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 나라에 있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수의 신변 또한 안전하지 않다는 것도. 가수를 쏴서 그자가 딛고 있는 반석에서 떨어뜨리면, 가수는 인간 정도의 크기로 추락하게 된다...

1976128일이 되자마자 가수와 모든 사람들이 살아남았다는 뉴스가 나왔다. - 화자 조시 웨일스]

 

그러니까 조시는 밥 말리를 죽여서 이득을 얻는 게 아닌 역풍과 손해를 예측하고 그가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한 거다. 그럼으로써 이 총격사건은 사방으로 퍼져나갈 것이고,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사람들의 추측으로 지목될 것이며, 그로 인한 갱단의 내분과 사회적 공포는 그의 위치를 높이고 공고히 쓰이게 된다는 걸 계산한 것이다. 그는 단순히 악마적 폭력성만 지닌 게 아니라 갱단과 사회를 움직이는 자신만의 효율적인 방식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그의 성향을 따라가 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품분석이겠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분량만 따로 떼어내 읽어도 작품의 전반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이다.

 

4개의 이름을 가진 니나 버지스의 관점

자메이카에서 사회적 약자로 힘든 생활을 하는 니나 버지스는 밥 말리 암살기도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유일한 목격자다. 당시 총격사건의 현장에서 들켰음에도 조시는 그녀를 살려두었다. 그에 불안을 느끼던 니나는 가정불화의 사건을 계기로 집을 떠난다. 이후 그녀의 이름은 킴 클라크, 미국에 도착해서는 도카스 파머, 마지막에는 밀리센트 세그리로 위장된 삶을 살아간다.

내가 총 1176쪽에 달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13명의 화자들 중 가장 흥미롭게 본 캐릭터가 유일한 여성 화자, 바로 니나 버지스다. 강간이란 단어가 농담처럼 수시로 튀어나오고 실제 그러한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발생하는 자메이카에서 사회적 약자로 어떡하든 살아보려던 그녀는 그러한 공간(자메이카)을 탈출하는 것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는다. 미국이란 나라로 가기 위한 그녀의 행동과 들이는 노력은 안쓰럽다 못해 치열하다. 우선, 대체 이 자메이카란 공간은 어떤 곳인가.

 

[2p 305. 상상해봐, 백인 친구. 급수탑 두 대, 욕실 두 군데, 인간 5천 명 변기도 없고, 수돗물도 없고, 허리케인으로 찢겨나갔지만 원래 자석으로 붙여놓았다는 듯이 곧 다시 붙을 집들을. 그리고 그걸 둘러싼 것들을 보는 거야. 범퍼 홀에서 가장 큰 쓰레기장, 지금은 고등학교가 들어선 가비지랜드, 거리를 따라 도랑까지 그대로 피를 흘려보내는 도축장, 업타운 사람들이 자기네 똥을 곧장 우리에게로 내려 보낼 수 있게 하는 최대 규모의 하수처리장, 서인도제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 시체보관소와 서인도제도 최대 규모의 산부인과 병원 두 곳, 카리브해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장인 코로네이션 시장, 거의 대부분 여기서 장례식을 치르지. 기름에, 철도와 버스 터미널에, 그리고... 그런데 자넨 여기 왜 온 건가, 알렉스 피어스? 정말 알고 싶은 게 뭔가? 왜 자메이카 안내소에서도 해결해줄만한 질문으로 내 시간을 낭비하는 거지? - 화자 트리스탄 필립스. 자메이카 출신 마약상]

 

단순히 자메이카의 낙후된 환경을 보여주는 걸 넘어 필연적으로 폭력과 범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하기 위해 긴 지문을 썼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서 그러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가 아닌가. 이런 공간을 벗어나려는 니나의 몸부림, 미국에 도착해서도 의지할 사람 한 명 없고, 곳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살아가려는 삶의 의지를, 난 그녀에 대한 이 표현에서 가장 크게 느꼈다.

- ... 길을 걷는다...

암살사건을 목격한 후 그녀는 밤늦은 시각에 멀리 떨어진 집을 향해 길을 걷는다. 여동생 키미와의 불화가 발단이 돼 집을 뛰쳐나와서도 길을 걷고, 미국에서 간병인으로 찾아가는 집에서도 끊임없이 길을 걷는다.

[2p 286. 그렇게 나는 120번가부터 브로드웨이를 따라 걷고 있었다. 모르겠다. 걷다보면 너무 멀리까지 온 나머지 계속 가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지는 시점이 온다. 언제까지 그렇게 걷느냐면 잘 모르겠다. 항상 잊어버렸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다시 걷고 있다. - 화자 도카스 파머(니나 버지스)]

 

길을 걷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아가겠다는 무의식의 의지가 아닐까. 그런 의지가 그녀를 자메이카에서 탈출시켰고 이후 여러 다른 이름으로 힘들게 살면서도 어떡하든 살아가게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바로 그런 끊임없는 의지가 한발 더 나아가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로 조시 웨일스를 꼽았다. 난 작가가 조시를 통해 폭력적인 자메이카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고 있다면, 니나를 통해서는 평화로운 자메이카의 미래를 꿈꾸고 그러한 방법의 하나로 이러한 그녀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밥 말리가 콘서트를 통해 평화를 외치려한 것처럼, 작가는 니나를 통해 평화를 위한 끊임없는 의지의 한 걸음이 필요하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싶다.

 

암살미수사건의 목격과 가정불화로 인해 집을 떠나온 지 15. 작품의 맨 마지막, 니나는 자메이카 폭력의 상징인 조시 웨일스의 죽음을 알게 되면서 원망의 대상이었던 여동생 키미에게 전화를 건다. 화해의 손짓인 것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건 의미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주었으니까. 그저 관계의 회복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갈 뿐이다. 13년 전 자메이카의 두 갱단 보스가 서로에 대한 폭력을 그만두자고 합의한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니나와 여동생 키미를 이렇게 치환해 자메이카의 희망을 염원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역사의 기록

화자 중 한 명인 잡지 롤링 스톤의 기자 알렉스 피어스는 당시 암살기도사건의 현장에 있었지만 니나 버지스처럼 관여된 인물이 아닌 우연히 현장에 있었던 자였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메이카의 갱단 역사를 쓰려고 여러 인물들을 만난다(위 화자 트리스탄 필립스의 지문 참조). 알렉스는 밥 말리를 쏜 자가 조시 웨일스임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로 총 7부로 기획한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잡지 뉴요커에 3부까지 연재하다가 뉴욕 갱단원들에게 협박을 당한다. 그들의 요구는 자신들에 관해서는 빼달라는 것. 이후 알렉스가 나머지 4부를 어떤 식으로 쓸 지는 알 수 없다. 자메이카 역사의 기록은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싶다. 빈 공간의 기록에는 피의 역사가 아닌 자메이카의 희망이 쓰여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도 들어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13명의 화자들이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이끄는 이 작품에는 다양한 인물군이 등장한다. 갱단의 보스와 갱단원이 있으며 어린 살인청부업자, 음흉한 CIA요원, 유령 정치인, 무시당하는 기자, 여러 이름을 가진 여자 등이 등장해 15년의 시간을 말한다. 수많은 사건들이 얽혀있고 화자들의 말 속에는 비속어와 욕설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와 거부감을 느낄 사람도 있겠다(개인적으로 이러한 번역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요소 중 하나라고 본다). 그러나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각각의 화자들이 걸어온 파란만장한 길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이해가 안 되거나 설명이 부족한 부분들이 나중에 언급되면서 전체의 퍼즐이 맞아나간다. 맞아나가면서 작품 전체를 차분히 정리해주려고 애쓴 작가의 흔적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그러니 초반에 잘 이해가 안 돼도 흐름 따라 넘어가면 되겠다.

 

위에서 4가지 관점을 예로 든 건 작품의 색다른 재미, 복잡한 서사와 낯선 이야기 방식의 이해를 돕고자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언급했듯 흐름 따라 넘어가다보면 13명 화자들의 삶, 자메이카의 피로 얼룩진 역사에 조금씩 젖어들게 된다. 그리고 밥 말리를 떠올리게 된다.

눈을 뜨고 내면을 바라보라. 당신들이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만족하는가?”

밥 말리의 말처럼 내면의 각성을 하는 인물은 13명 화자들 중 여성 화자 니나 버지스가 유일하다. 그리고 그녀만이 유일하게 총을 들지 않았다. 작품 전체가 총으로 상징되는 폭력을 드러내는 가운데 이러한 니나의 행보는 새로운 삶에 대한 각성과 의지, 평화를 얻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겠냐는 작가의 의도로 읽힌다.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한 걸음씩 길을 걷는, 그래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의 빈 공간을 자메이카의 희망으로 쓰고 싶은 작가의 바람을 느낀다.

 

밥 말리는 암살기도사건이 있던 1976년에서 5년이 흐른 1981, 36살의 나이에 암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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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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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이란...

자신의 직업세계와 다른 사람들을 칭할 때 일반인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연예인과 일반인, 군인과 일반인, 정치인과 일반인 등등. 조폭(또는 건달)도 그렇다. 조폭과 일반인. 이 속에는 그 세계를 모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일반인인 거다. 알면 그 세계의 사람이거나 밀접한 연관을 가진 사람이다. 연예인과 매니저, 조폭과 형사 같은. 작품은 구암이란 1993년 부산의 어느 변두리, 가상의 작은 바닷가 공간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조폭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익히 떠올릴 수 있는 행태를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뇌물과 폭력을 기본으로 밀수를 하고, 무엇이든 독점으로 공급해 이득을 얻으며, 사채와 매매춘이 횡횡한다. 너무 자연스러워 당연하게 보이고 이런 모습이 구암이란 공간과 사람들의 전부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조폭이거나 연관된 사람들이 아니면 전부 일반인이고 일반인은 이 작품에서 의미가 없다. 그 세계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고로 구암에서 평범하게 땀 흘려 일하는 일반인들의 생활은 언급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불법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을 평범한 일반인들이 도덕이나 윤리란 잣대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도 않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소리다. 이 작품에서의 구암이란 공간은 오로지 조폭과 그에 연관된 사람들의 세계이며, 폭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정글이다. 또한 그들의 삶의 터전이다.

 

구암이란 변두리 공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이끌어가는 손영감과 그의 오른팔이자 주인공 희수는 구암을 이렇게 말한다.

[p 414. “이 바다가 뭣이 좋습니까. 소매치기에, 사기꾼에, 포주에, 창녀에, 양아치들하며, 만날 싸우고 지지고 볶고, 기껏 화해시키려고 자리 마련하면 이야기 쪼매 하다가 결국 욕하고, 술판 뒤집고, 소주병 날아다니고, 대가리 깨지고, 울고, 그래놓고도 또 술 처마시면 서로 껴안으면서 사랑한다, 우리가 남이가, 이 지랄이나 하고 자빠지고, 영감님, 저는 마 요즘엔 신파가 딱 싫습니다.” 희수가 농담처럼 말했다.

나는 만날 싸우고 지지고 볶아서 이 바다가 좋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위험하고 전혀 살만하지 않은 곳인데도 그들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구암에서 살아간다. ? 그들은 조폭이고, 이런 구암에서 오래 살아왔기 때문이다. 일반인이 평범하게 땀 흘려 일하는 구암이 아닌, 싸우고 지지고 볶고 그러다 서로 껴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구암에서 말이다. 그러니 구암에서 폭력이 벌어지고 사기꾼이 돌아다니며 매매춘이 벌어진다고 그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자연스럽고 자신들과 연관된 일이다. 그건 곧 그들의 일상이란 거다. 그들이 하는 일, 그들과 연관된 일 말이다. 그런 터전에 불길한 변화가 불어온다. 시작은 손영감의 빨래공장이 용강이란 자에게 넘어가면서이고, 결국 다른 조직들에게 계륵 같은 존재였던, 그래서 삼십년 동안 나름 평화로웠던 구암은 영도를 장악한 전국구 조직이 등장하면서 피바람을 맞는다. 양측의 전쟁은 희생을 낳고 희생은 새로운 변화를 만든다. 그 새로운 변화가 구암의 조폭세계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작동하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고 말이다.

 

아버지란...

모자원이란 고아원에서 자란 희수에게 보스 손영감은 아버지 같은 존재다. 피를 나눠준 진짜 아버지가 아닌 같은존재. 그건 적당한 이유만 있으면 언제든 떠나거나 배신해도 용인이 가능한 관계라는 거다. ‘의심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희수는 손영감을 잠시 떠난다. 이십년을 충성한 아버지 같은 존재에게서 애정을 못 받았다는 서운함의 확인 끝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첫사랑인 인숙과 함께 살며 그녀의 아들 아미를 자식으로 삼아 같은존재가 아닌 진짜 아버지로 살아가려 한다. 불법적인 일을 하지만 나름의 평범하고 단란한 생활을 꿈꾸기도 하고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 벌어진다. 조폭이면서 폭력과는 상관없는 일반인의 생활을 바랐다는 것. 구암과 영도의 조폭전쟁은 아미가 도화선 역할을 하지만, 희수가 폭력적인 조폭의 세계를 정말 벗어나길 바랐다면 그는 양아들 아미의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함께 구암을 떠나야했다. 이미 조폭세계에서 유명한 아미이고 그만큼의 실력을 갖고 있지만 그 세계의 위험성을 충분히 경험한 마흔 살의 희수라면, 폭력과는 상관없는 평범한 가정을 바랐던 그라면 그래야했다. 하지만 희수는 방관했고 그래서 아미를 잃었으며 인숙을 떠나보냈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 같은존재로서의 손영감은 어쨌든 어떤 식으로라도 희수를 그늘에 두고 보호하려했으나, 희수는 아버지란 관계와 위치를 받아들였으면서도 오히려 양아들 아미를 방기했다.

희수는 왜 그랬을까? 손영감이 희수를 말로만 아들 같다고하는 것처럼, 희수 역시 아미를 아들이 아닌 조폭이란 위치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게 당연한 것처럼 보였던 거다.

 

[p 371. 오랜만에 신이 난 아미의 패거리도 모두 아슬아슬하고 위험해 보였다. 그거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아니다. 건달의 일이란 건 언제나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것이다. 남들이 꺼리기 때문에 건달이라는 직업이 생기는 거고 아슬아슬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돈을 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경계 속에서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것은 온전히 아미의 몫이다. 희수는 모처럼 신이 난 아미의 기를 꺾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미가 그 정도도 눈치 채지 못할 바보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족을 보호하고 희생하며 이끌어간다는 아버지란 존재 자체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며, 희수에게는 아버지란 역할보단 조폭세계의 에이스라는 게 더 중요했던 거다.

[p 543. “아버지가 된다는 게 뭔지 아나? 자기가 이 세상에서 좆도 아니라는 걸 아는 거다. 희수 니는 멋있게 사는 게 중요하겠지만 나한테는 그런 게 별로 안 중요하다. 나는 사는 게 중요하다. 나는 그냥, 숨 쉬고 밥 처묵고 찌질하게라도 사는 게 중요하다.”

철진이 한참이나 희수를 쳐다봤다.

 

p 305. “니는 씨발 정신이 없다.” 씨발 정신은 또 뭐냐는 듯 희수가 양동을 쳐다봤다.

니는 너무 멋있으려고 한다. 건달은 멋으로 사는 거 아니다. 영감님에 대한 의리? 동생들에 대한 걱정?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하는 평가? 좆까지 마라. 인간이란 게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 별로 훌륭하지 않은 게 훌륭하게 살려니까 인생이 이리 고달픈 거다...

세상은 멋있는 놈이 이기는 게 아니고 씨발놈이 이기는 거다.“

그래서 씨발스럽게 이겨서 얻는 게 뭔데요?”

양동이 이 새끼가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처먹었네, 하는 표정으로 희수를 잠시 쳐다봤다.

그래야 입에 풀칠이라도 한단 말이다.]

 

찢어지는 가난에 고아원에서 자란 희수가 아무리 손영감을 만나 그의 그늘에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손영감은 진짜 아버지도 아니고 아버지의 관계와 위치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나중에 드러나는 희수에 대한 손영감의 애정과 신뢰, 보상은 희수를 정말 친아들처럼 생각해서 그런 건지에 대한 의문이 들며, 그렇기에 손영감은 언제든 갈라설 수 있는 아버지 같은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런 손영감이 희수에게 진짜 아버지의 부재를 대신할 영향력은 없다. 자신을 이끌어줄 아버지의 개념이 없는 희수이니 양아들 아미를 방기한 게 이해되고, 그런 희수는 아버지의 역할로 보면 손영감보다 훨씬 못한 존재가 된다. 적어도 손영감은 아들 같은희수를 돌보며 살리기라도 했으니 말이다. 희수는 멋있어 보이는 아버지가 되려고 했지 진짜 아버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핑계조차 댈 수 없다. 그동안 손영감이 보호해주었고, 모자원 출신의 절친한 친구 철진은 이미 스스로 알았으니까. 구암을 보호하려하고 사람들의 분쟁을 나서서 해결하려 했던 희수의 행동과 걱정은 결국 희수 자신을 좋게, 멋있게 보이려는 것으로밖에 작동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희수는 이기적이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낸 다음에야 아버지란 존재의 의미와 역할을 알게 된다.

 

[p 576. “세상에 좋은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는 힘이 없는데 애기들은 계속 앵앵거리거든. 아버지는 좆도 힘이 하나도 없는데.” 철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쩌면 철진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고 희수는 생각했다. 아버지란 좆같은 것이다. 원래부터 좆같았거나 아님 아버지가 되면서 서서히 좆같아졌거나. 문밖에는 칼바람이 불고 무서운 승냥이떼가 돌아다닌다. 아버지는 힘이 하나도 없는데, 애기들은 계속 앵앵거린다.]

 

결국 희수는 원래 있던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이 아닌 주인으로, 누군가의 오른팔이 아닌 구암의 보스로 말이다. 그런 희수 옆에 죽은 아미의 절친 흰강이 있다. 마치 손영감과 희수에서 희수와 흰강처럼. 희수는 흰강을 어떻게 대할까? 아미의 일을 교훈삼아 정말 아버지의 역할을 할까?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겠으나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 맨 마지막 희수의 취임식 장면에서 희수는 흰강에게 살인을 지시한다. 정말 아버지의 역할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직접적인 살인을 지시하지는 않을 거다. 희수는 흰강을 자신처럼 보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희수는 이미 가정과 아버지란 역할을 포기한 것이다. 대신 자신이 나고 자란 구암에서 타협하며 살아가는 걸 택한다. 자식에게 아버지의 부재가 남기는 대물림의 영향력을 끊고 지긋지긋하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터전을 유지하려한다. 그에게 남은 건 구암밖엔 없으니까 말이다. 손영감이 그랬던 것처럼.

 

[p 514. “왜 그런지 아나? 너는 이 용강이랑 닮았거든.”

내가 왜 당신 따위랑 닮았는데.”

너는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거든. 그런 인간이 갈 곳은 딱 두 군데밖에 없다. 저 바닥으로 계속 추락하거나 아님 저 위로 하염없이 올라가서 왕이 되거나. 둘 다 존나게 쓸쓸하고 무의미한 곳이지... 희수 니는 올라가서 왕이 되어라.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말고.”]

 

뜨거움이란...

[p 158. 구암 바다는 큰 조직에게 계륵 같은 곳이었다. 보고 있으면 군침이 돌지만 막상 먹으려들면 먹기도 힘들고 먹어봐야 먹잘 것도 없는 동네였다. 겉보기엔 비리비리해 보이는 구암의 핫바지 건달들도 누가 자기 밥줄을 끊으러 오면 미친 독종으로 돌변했다. 늙은 똥개라도 입에 물고 있는 뼈다귀를 뺏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조폭에 소매치기, 사기꾼, 포주, 창녀, 양아치들이 지지고 볶고 싸우며 살아가는 곳이 구암의 조폭세계다. 남의 눈치 안 보고 어떡하든 입에 풀칠하려고 살아가려는 곳이 그곳이다. 그런 곳에서 살아가려면 뜨거워야 한다. 일반인의 세계에선 그걸 열정이라 부르겠지만, 조폭세계에서 열정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폭력과 불법과 살인으로 얼룩진 곳에서 열정이란 단어는 고급스럽고 멋있다. 그러니 열정이 아니라 뜨겁게 살아가는 거다. 각자의 생활환경에서 구질구질하게라도 살아가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구르는 삶. 피가 뜨겁지 않다면 구암의 조폭세계에서 잠시도 살아갈 수 없고 죽거나 퇴출된다. 자신이나 누구에 의해 피가 데워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구암의 조폭세계에서 뜨거운 피는 살아가는 최소한의 요건이다. 그리고 그 뜨거운 피가 활화산처럼 폭발할 때 자신은 커다란 분출구멍을 멍에처럼 안고 살아가며 그렇게 흘린 피로 주변은 황폐화가 된다. 뜨거운 피를 분출한 자의 숙명이다.

 

손영감은 그걸 알고 있었기에 조폭끼리의 대거리를 자제하며 살아왔다. 한 번 분출한 희수는 사화산이 되었을까, 아직도 용암이 흐르며 언제든 활성화될 수 있는 휴화산일까?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겠으나, 가족을 데리고 구암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구암의 조폭세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요원해 보인다. 즉 구암의 조폭세계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무엇을 얻어가며 살아가는 게 아닌 어떻게 뜨거운 피를 유지하는가가 중요한 그런 곳이다.

 

[p 414. “이 바다가 뭣이 좋습니까. 소매치기에, 사기꾼에, 포주에, 창녀에, 양아치들하며, 만날 싸우고 지지고 볶고, 기껏 화해시키려고 자리 마련하면 이야기 쪼매 하다가 결국 욕하고, 술판 뒤집고, 소주병 날아다니고, 대가리 깨지고, 울고, 그래놓고도 또 술 처마시면 서로 껴안으면서 사랑한다, 우리가 남이가, 이 지랄이나 하고 자빠지고, 영감님, 저는 마 요즘엔 신파가 딱 싫습니다.” 희수가 농담처럼 말했다.

나는 만날 싸우고 지지고 볶아서 이 바다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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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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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댓글?!

 

국정원 댓글조작사건이 처음 보도되었을 때 들었던 생각(또는 의문)은 두 가지였다. 댓글을 소수가 조작한다고 다수의 여론을 흔들거나 유리한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을까? 나라를 대표하는 정보기관에서 그깟 댓글 따위에 관여를 할까? 사건의 후속보도와 실제로 여러 사례에서 여론을 움직이는 그깟 댓글의 힘을 보면서 뒤늦게 그 위력을 알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댓글은 그깟으로 느껴졌다. 쏟아지는 기사의 홍수 속에 개인이 달 수 있는 댓글이야 네이버의 경우 하루에 20개가 고작이고 아무리 많은 계정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봐야 소수다. 그러니 양적인 면에서 본다면 다수의 흐름과 다른 댓글들은 그야말로 소수의견일 뿐이다. 질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다른 의견의 댓글을 아무리 논리적으로 풀어서 단다고 하더라도 수에 밀리면 묻히기 십상이다. 이게 상식적이다. 그런데 이 작품 댓글부대는 소수의 의견(또는 논란)으로 다수의 흐름과 응집력을 깨버리는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논리로 부수는 게 아니라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거다. 말하자면 공작 댓글인 건데, 이를테면 집단 내의 영향력 있는 표적 몇 개를 선택해 집중적으로 건드려 의도를 의심하게 만들거나, 털어서 나온 먼지 몇 개를 부풀려 키우거나, 문제의 핵심과는 다른 감정적인 부분으로 몰아가 본질을 흐려버리거나, 센 척하다 유리한 증거물만 모은 후 갑자기 법대로 하자며 피해자 코스프레로 변신한다. 명백한 선동과 날조다. 그러니까 소수의 댓글이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상식적인 논리가 아닌 선동이거나 날조여야 한다는 거다. 그렇지 않은 상식적인 논리의 댓글은 그깟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내가 이 작품을 재밌게 읽은 건, ‘댓글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이면서도 위의 예처럼 잘 몰랐던 이면(혹은 위력)을 빠른 호흡으로 개연성 있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불편하게 읽은 건, 영화 내부자들의 대사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 적당히 짖어대다 알아서 조용해질 것이라는 시선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기 때문이고 말이다. , 아무리 떠들어봐야 괴벨스의 말처럼, ‘대중에게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생각이라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기에 언제든 선동과 날조로 휘두를 수 있는 생각 없는 존재, 의미 없이 짖어대는 개돼지란 의미에서의 대중이란 집단에 내가 강제적(또는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모멸감이 들어서다. 난 누군가의 그깟 댓글에 휘둘리다 알아서 조용해지고 쪼그라드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에 강제로 부끄러움을 당한 느낌이 들어서다. 그리고 무섭게 읽은 건, 이런 선동과 날조의 공작 댓글이 주로 사용하는 분노와 증오의 힘을 현실세계에서 지금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작게는 내가 가입한 커뮤니티에서, 크게는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이란 나라의 공화당 대선주자 트럼프가 그렇다. 내가 가입한 커뮤니티의 회원들이 가끔씩 싸우는 모습을 보면 뭘 그런 걸 가지고...’란 생각으로 끝나지만,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는 상상을 해보면 그가 주로 사용하는 분노와 증오를 바탕으로 한 선동과 날조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 한 번 목격하는 게 아닌가.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말 하려는 바를 풀어내는 형식이 소설이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댓글을 조작해 여론을 선동날조하거나 집단을 부수는 팀-알렙이란 세 명의 청년이지만, 작가는 이들을 통해 말 하려는 바를 드러내지 않는다. 작품은 그저 개연성이 충분한 핍진성 있는 이야기를 보여주기만 한다. 즉 말하는 소설이 아니라 보여주는 소설이란 거다. 주인공의 말과 행동으로 주제를 풀어나가는 게 아니라 주인공은 화자로서만 존재하고 소비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 이야기를 경험하는 독자라는 거고, 주제는 댓글이란 소재를 통해 개개인의 독자가 실제로 경험한 무한대의 이야기다. 작게는 개인에서 크게는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과거를 되짚거나 현재진행중이거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가능성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이 재미와 불편을 넘어 무섭게 다가오는 건 그러한 이야기의 확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개 댓글이 그깟이 아닌 분노와 증오를 바탕으로 하는 선동과 날조의 댓글로 기능할 때의 파괴력. 작품에서는 폭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줄 뿐 실제로 떨어졌을 때의 파괴력과 영향력을 미시적으로 보여주는 선에서 끝낸다. 그것이 미칠 파급효과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상상하는 게 무의미할 수도, 아니면 진정한 공포는 터졌을 때가 아닌 만들어가거나 갖고 있을 때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일 수도 있다. 바로 내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작은 이야기의 환경이 작은 불씨가 되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산불로 번질 수도 있다는 확장의 가능성과 파괴력. 일개 댓글이 마냥 그깟으로 여겨지지 않고, 그 주인공이 나, 내 옆의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 작품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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