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렇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좋게 말하면 그저 집에 있는 걸 너무 좋아해서, 어중간하게 말하면 새로운 경험과 풍경을 보는 맛을 아직 잘 모르기에, 나쁘게 말하면 돌아다니는 걸 너무 귀찮아한다는 거다. 그렇다고 일 년에 한 번도 (며칠 자고 오는) 여행이란 걸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친한 지인이 당근을 제시하며 억지로 잡아끌면 못 이기는 척 합류하고는 그날 저녁에 술 한 잔 마시며 오길 잘 했네, 끼워줘서 고맙다고 진심을 말하거나, 가족들이 여행을 논의하면 속으로 불평을 하면서도 당장 인터넷을 뒤적거려 잔뜩 정보를 뽑아낸다. 이왕 가는 거 헤매지 않고 철저한 계획 하에 잘 움직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의 저자처럼 혼자 가는 여행이란 내게 낯선 정도가 아니라 큰 모험처럼 여겨진다. 더구나 세계를 무대로 떠난다니...!
이렇게 여행에 별 관심이 없지만 가끔씩 다른 사람의 여행기를 찾아 읽기는 한다. 아무리 귀찮아해도 여행이 주는 새로운 경험과 풍경, 일상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의 맛을 조금은 느껴봤기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대리만족의 차원도 있지만 그보단 내가 주저하는 ‘떠남의 용기’가 부러워서다. 잘 짜인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돌발변수가 가득한 길을 걸어보겠다는 그 시작의 발걸음이 대단해서다. 누군가는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내가 바로 쫄보이기 때문이다...!
겁 많고 걱정은 더 많은, 스스로 쫄보임을 밝히는 저자가 ‘나 홀로 249일, 18개국 62개 도시’를 다녀왔다. 처음 봤을 때, 그래, 나처럼 여행에 별 관심 없는 사람이 있다면 돌아다니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도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내 동생이 그렇기 때문이다. 내가 집을 너무 좋아한다면 내 동생은 스스로 역마살이 있다고 말할 만큼 돌아다녔는데, 이 책의 저자가 그런 역마살 때문에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한 건 아니다.
[p12.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끊임없이 밀려왔고, 부정적인 생각들로 하루를 가득 채우다 보니 내가 원래 뭘 하고 싶었는지도 헷갈렸다. 인생을 주도적으로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무력하게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이 점점 싫어졌다...
... 내가 꿈꾸던 스물둘의 모습과 실제로 마주한 내 모습은 너무도 달랐다.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 괴로워하며, 일주일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민한 끝에 휴학을 결정했다. 열아홉의 이승아와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여행이 바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었다는 걸 자각했다.]
떠나는 계기가 어떻든 (배낭)여행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일상에서 벗어나기, 좀 더 의미를 둔다면 새로운 도전 속에서 진정한 나를 보기,가 아닐까싶다. 저자 또한 그러하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고민과 꿈꾸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공존하는 가운데 절박한 심정으로 선택을 한 것이다. 잘 짜인 패키지여행이 틀에 박힌 미래, 정해진 길을 가도록 강요받는 삶이라면, 배낭여행은 여러 갈림길 중 하나를 스스로 선택해 나만의 길(인생)을 만들어나가는 주도적인 삶이라 비유할 수 있기에, 그런 미래를 꿈꾸고 싶기에 이십대 초반의 어린 나이임에도 그런 과감한 결정을 내린 듯싶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여성이라는 일반적인 우려가 있음에도 말이다.
살다보면 결정을 번복할 수 있다. 사정이 생겨, 미음이 변해 선택을 바꿀 수도 있다. 저자에겐 여행경비 마련을 위한 9개월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를 해 13,500,000원을 모았고, 걱정 때문에 반대하는 부모님을 끈질기게 설득해 기어이 대장정에 들어갔다. 4개월간 남미와 유럽을 여행하기로 한 계획은 어쩌다가 8개월로 늘어났다. 스스로 한 선택을 끝까지 밀고나갔고,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려 예정보다 두 배의 기간을 다녀왔다.
[p 150. 여행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나는 짧은 고민 끝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다... 4학년 1학기 휴학을 신청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4개월 여정으로 일정을 짰고, 그에 맞춰 경비도 준비했던 내 여행이 끝을 알 수 없는 궤도에 진입했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다. 동시에 불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고, 또래 친구들보다 늦어질 졸업이 취업에 악영향을 미칠까 내심 걱정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는 소중한 일들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 컸다.
휴학 신청 버튼을 눌렀던 이날의 용기는 내가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잡는데 꽤 큰 도움을 주었다.]
저자는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게 아니라 어디서 무엇을 할지 꼼꼼하게 계획하고 행동했다. 상황마다 변수가 있긴 했지만 그에 맞추면서도 전체적인 큰 줄기를 놓치지 않고 움직였다. 최소한 자신이 어디로 가고 가야할지를,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들을 인지했기에 두 배의 여행기간이 가능했고 휴학이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저자 또한 이날의 용기가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잡는데 꽤 큰 도움을 주었다 하니, 여행에서 경험한 수많은 선택들 중 꽤 큰 비중이었으리라. 나 또한 이런 형태는 아니지만 대학 시절 1년 휴학의 결정을, 그 선택의 고민을 한 적이 있기에 공감을 한다. 그 시간 동안 경험했던 일들을 잊을 수 없으며 지금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일단 좀 살자,는 생각이 강했고 어찌됐든 지금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p 297.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여행자들에 대한 환상이 컸다... 자유로운 삶을 향유하며 항상 유쾌하고 즐거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직면해 보니, 혼자 여행을 한다는 것은 끔찍이도 외로운 것이었다. 혼자 밥 먹는 것조차 꺼려했던 내게 외로움의 무게는 상상도 못할 만큼 묵직하게 다가왔다.
여행 초반, 한껏 부푼 기대감은 허무한 굉음을 내며 와르르 무너졌다. 상상했던 여행과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호스텔에서 혼자 휴대폰만 만지고 있는 내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혼자가 편하다고 주문을 외웠지만 막상 여럿이서 다니는 또래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고,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혼자만 만끽할 수 있는 자유로움보다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이 훨씬 크게 다가왔고, 이 외로움에 적응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외로움에 점차 익숙해지자, 생각하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자연스레 스스로와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온전히 나만 생각하면서 선택하고 결정한 순간들이 모이게 되니,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나의 진실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나홀로 여행’을 한 번 한 적이 있다. 제대휴가를 나와서 외가인 강원도 주문진으로 이박삼일 다녀왔는데, 마음 편히 숙식이 해결되는, 그저 서울에서 강원도로 버스만 좀 오래 타면 되는 외가 방문길이니 여행이랄 것도 없지만 어린 나이에 혼자 배낭을 메고 며칠 다녀왔다는 점에서 내게는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집 앞의 한적한 해변을 걸으며 바다 보기를 삼십분, 앞으로 뭐하고 살지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자는 거창한 다짐은 단 삼십분 만에 지겨움으로 바뀌었다. 해변에 누워 뒹굴다 곳곳에 모래가 들어가 나에게 짜증을 냈고, 끝도 없이 넓고 푸른 바다는 무료함을 더했으며 무엇보다 시야에 사람 한 명 없어 괜히 외로웠다. 앞날에 대한 계획과 다짐은 따분함에 묻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너무 심심해 주문진 시내로 나갔지만 간만에 보는 외가의 시골풍경도 삼십분 만에 그 설레임이 다해 한 시간 정도를 느릿느릿 걷다가 돌아왔다. 항구의 비린내를 쉽게 적응할 수 없었던 기억도 난다.
예전에 본 어떤 글에서 여행의 진짜 묘미는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는 시간과 떠난다는 설레임에 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은 백인백색이니 개인마다 의미를 다르게 두는 건 당연하기에 공감이 되기는 했다. 아무리 여행을 귀찮아해도 떠나기 직전의 설레임과 기대를 나 또한 한 적이 있기에, 막상 여행을 떠나면 기대만큼은 아닌 적도 많았고 오히려 고생스러워 실망한 적도 있기에 그렇다.
위에 적은 에필로그 지문에서, 저자는 나홀로 여행의 외로움을 절절히 느끼면서 여행이 꼭 환상적이지는 않으며, 현실을 동반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침잠하는 경험을 한다. 외로움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와 깊이 대화를 하고 진실된 모습들을 발견해간다.
누군가에겐 여행의 묘미가 떠나기 직전의 설레임일 수도 있고, 저자와 비슷한 경험일 수 있으며, 나처럼 혼자는 너무 심심하니 누군가와 함께여야 좋다는 것일 수도 있다.
[p 259. 여행의 방식은 한 가지가 아니다. 그것은 여행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다. 그러니 내가 하는 여행은 온전히 내게만 정답이고, 네가 하는 여행은 오로지 네게만 정답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린 비로소 다양성을 배우게 된다.]
어쩌면 여행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다보니 내가 여행에 별 관심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언젠가 이 얘기를 여행에서 함께 돌아오는 지인에게 했더니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갔다 오는 거야. 재밌잖아.”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고생스러우면 고생스러운 대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게 좋다는 거다. 그의 여행의 정답은 그거였다.
저자가 다녀온 249일간의 18개국 남미, 유럽 여행은 어떤 정답을 주었을까. 온전히 저자만이 알겠지만, 이 책을 통해 그의 바람을 알 수는 있다.
[p 208. 그리고 나는 내 글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전할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겐 간접적인 일탈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용기를 건넬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아졌다.]
3시간 만에 완독하게 만드는 이 책이 여느 여행기와 확연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단번에 읽을 수 있었던 건 담백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추린 에피소드들과 그 속에 담긴 저자의 진솔한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보여준 용기어린 행동과, 재밌기도 했지만 위태로웠던 상황들을 잘 대처하는 저자의 모습에 동화되면서 잠시나마 세계일주의 맛을 함께 느꼈기 때문이다.
매번 여행기를 보면서 느끼는 건 여행을 귀찮아하는 나조차 잠시라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는 거다. 특히 이 책이 그런 건 저자 스스로 ‘쫄보’임을 인정하면서 큰 모험을 다녀왔다는 점이다. 여행에 있어 나 또한 쫄보이고 문외한이다. 그래서 더 공감을 하며 일독했다. 앞으로 내가 (이런 식의)여행에 있어 약간의 용기를 얻는다면 이 책의 도움도 분명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