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세트 - 전10권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기대를 많이 걸었었다. 두툼한 책 10권. 여기에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이야기들이 서로 이어지고 꿰어져 살아있을 것 아닌가. 그 기대가 어느 정도 충족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 책 전질을 사놓고 이렇게 후회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내 서점 한 구석에 앉아 우선 몇 페이지 뒤적거리며 읽어보았더라면, 그냥 그 자리에 다시 놔두었을 그저 그렇고 그런 책이었다. 이제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책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인내심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인하는 나 자신이.

화려한 문장. 당연하다. 작가 이문열 아닌가. 방대한 내용. 당연하다. 열권인데. 하지만 좋은 말은 그런 통속적 표현으로 끝이다. 아무리 역사소설이라 하더라도 그 기본구성은 소설다워야 하는 것 아닌가? 독자를 끄는 두 가지 요소. 이야기 전개에 대한 호기심과 중간 중간 책을 덮어놓고 되새길만한 생각의 깊이. 이 둘 중 어느 것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이야기와 설명이 이어지는 역사책’에 지나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 이토록 서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은 분명 아직 출판할 단계는 아니었다. 아마추어가 글을 쓰더라도 이보다는 더 다듬어 진 다음에야 블로그에 올린다. 한번 나왔던 내용을 표현까지 바꾸지 않고 반복하는 것은, 그것도 한군데가 아니라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그렇게 하는 것은, 읽는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앗아가는 행위요, 독자에 대한 모독이다. 등장인물의 배경설명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미리 장황한 인물평을 곁들여 선입견을 심어주고, 또 그 사람이 나중에 어떤 운명을 맞게 되는지 까지 미리 이야기해서야, 독자가 무슨 ‘맛’으로 책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

책 군데군데 나오는 설명, 작가가 무슨 책을 읽으니 이야기가 어떻고 또 자기가 추측하기엔 어쩌고 하는 부분은, 역사소설이라기보다는 학생들의 문헌작업 보고서 같은 생경한 느낌조차 든다. 어차피 작가의 말대로 ‘역사소설은 사실 70 픽션 30’이라면, 그 사실과 픽션이 작가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녹아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자기가 무슨 책을 읽고 어디까지 생각했는가를 ‘자랑’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직설적 교훈강의는 피했어야 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고, ‘주인공’에 대한 이해와 그 시대 그 상황에서 인물판단은 독자의 몫 아닌가. 정 교훈을 정 포기할 수 없다면 은유법으로도 충분했다.

또, 제1권 거의 끝까지 계속되는 진나라부분은 과감히 뺐어야 했다. 유방과 항우 등장 배경설명에 필요하거나 나중의 이야기의 복선역할로 필요했다면, 거기에 맞게 아주 간단히 정리했어야 했다. 작가자신의 지식이 얼마나 해박한가를 알리려 해봐야 그게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라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그것도 진부한 상식적 내용을 지루하게 끌어가면서 말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삽화. 책에 칼라를 집어넣었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내용의 어느 부분과도 연결되지 않는 추상화에 가까운 그림들. 원래 ‘예술’은 워낙 고상한 영역에 속해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독자의 내용이해를 돕는다거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다거나 그런 효과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지금이라도 내용을 새로 정리하여 개정판을 내야 한다. 작가 이문열의 이름에 걸 맞는 작품으로 기억되려면 말이다. 중언부언 웅얼웅얼 부분 다듬기만 해도 삼분의 일은 가볍게 정리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도 훨씬 더 짜임새 있게 살아날 것이다.
권수가 줄어들면 ‘전질 10권’이라는 느낌이 사라진다고? 그거야 말로 허풍이요 얄팍한 상술에 다름 아니다.
(강희대제 12권을 사기가 너무 아까워 중국원서를 샀더니, 단 4권이더라. 공연히 글자 크게 하고 빈 페이지 집어넣어 책값에 헛거품 집어넣는 이 잔재주는 언젠가 우리 출판계를 호된 부메랑효과로 몰아칠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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