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다 - 이길여 회고록
이길여 지음, 김충식 인터뷰어 / 샘터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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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인터넷 게시판에서 네 쌍둥이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쌍둥이에 내용이 집중되어 있었던 터라, 병원비를 받지 않았던 은혜를 잊지 않고 성장하여 그 병원으로 다시 취직했다는 이야기가 주요 골자였다. 그런데 병원비를 받지 않고 퇴원시킨데다 아이들을 키워 자신에게 다시 보내달라고, 그리고 정말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은 물론 졸업 후 자신의 병원에 취직시켜준 그 의사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 이길여 총장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연달아 읽은 뒤라 이길여 총장님의 유년시절이 더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두 분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 시대, ‘순수하게’ 공부를 했다던 그 열정들이 뜨거웠다. ‘환자에 미쳐’있었던 의사로서의 그녀는 누구보다 반짝였다. 품에 넣어다녔던 따뜻한 청진기, 보증금 없는 병원, 무료 경부암 진료 … 그 모든 새롭고 참신한 그녀만의 진료철학은 모두 환자를 향한 진정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뿐이랴. 산부인과 개업의에서 그치지 않고 의료법인 및 문화재단 설립, 새생명찾아주기 운동 본부 발족, 개발도상국 어린이 심장병 무료 치료, 4개 대학을 통합한 가천대 출범, 인공지능암센터 개소 등 간단히 정리하기도 힘든 많은 업적들을 이루어냈다. 이 모든 발자취마다 ‘일단 하자’ ‘당장 내일’이라는 그녀의 불도저같은 추진력도 늘 함께였다. 여전히 활기찬 에너지와 웃는 얼굴이 트레이드 마크인 그녀는 진정 따라잡을 수 있는 저 세상의 사람인 것만 같다.



{그 때의 제 상태를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아무도 없는 8차선 고속 도로를 저 혼자 벤츠를 타고 최고 속도로 막 달리는 거예요. 그러다가 도로 한복판에 커다란 바윗덩이가 터억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나 자신이 보이는 겁니다. ‘어? 지금까지 내가 뭐 했지?’ ‘나는 지금 뭐지?’ ‘앞으로 나는 뭐가 되지?’ 이런 생각을요(234p).}
그런 그녀에게도 막연한 허무와 우울이 밀려오던 시기가 있었다. 나 역시 33살 가을, 덜컥 그런 우울의 늪에 빠진 적이 있었던지라 더욱 눈이 갔다. 그녀는 그 시절, 사흘 밤낮을 안 자고 안 먹고 골똘히 생각했다고 했다. 그렇게 몰두하며 화두를 좇다 보면 해결책이 나오는 법이라고. 1973년, 그녀는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이미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왔고, 개원한 산부인과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내달렸다.



단지 성공한 한 여성의 단편적인 모습이나 성공 비결 같은 것들보다 ‘이길여’ 한 사람의, 여성의, 친구의, 딸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두께가 제법 나가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소설, 에세이, 긴 일기를 읽는 기분으로 읽었다. 2년 간 이어진 대담을 구성하고 이끌어간 김충식님의 능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리라. 윤은기 박사가 실력, 담력, 매력을 골고루 갖추었다고 한 이길여 총장의 실력과 담력은 답을 보여준 것 같은데 매력에 관해서는 충분한 답을 내지 못했다는 김충식님의 말이 마지막 페이지에 나온다. 글쎄, 동의하지 않는다. 이미 이 책 한 권 전반에 이미 그녀의 매력이 짙게 깔려있지 않은가. 길고도 먼 여정, 한 사람의 생을 오롯이 담아낸 큰 호수같은 회고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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