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 Secret Suns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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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잃은 여자, 신애는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온다. 신애의 과거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는 그녀를 보니 이전의 시간이 그녀에게 결코 녹록치 않은 모양이다. 허나 새로운 곳에서의 시간도 그녀는 버겁기만 하다. 이방인인 그녀를 둘러싼 소문이 그녀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도착해 그녀는 졸지에 ‘불행한 여자’가 된다.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아이는 갑작스럽게 납치되어 영영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렸다. 밀양이 시작되는 곳에서 만난 종찬. 그는 그녀의 시크릿 선샤인처럼, 그때부터 내내 그녀의 주변을 맴돈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신애가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 아이가 어쩌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는지 이 영화는 관심이 없다. 그녀를 둘러싼 사건들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오롯이 자그마한 신애의 몸뿐이다. 우리는 그녀의 반응을 통해서만 사건을 느끼고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빠진 그녀가,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불편하다. 관객으로서, 신애한테 감정이입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신애는 낯선 캐릭터다. 이것은 감독의 계산이다. 이창동은 관객이 그녀를 “주관적으로 이입되는 것보다 한발 물러서서 보도록” 했다. 컷과 컷 사이에 그녀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도 극단적인 감정을 오가는 여자다.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고, 생활력도 강하고, 무엇보다 의지가 강한 인물이다. 때문에 다른 여자와의 관계가 있던 남편이 자신만을 사랑했다고 굳게 믿을 수 있으며, 고통 가운데 단번에 종교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이 흔들렸을 때 철저하게 절규하고, 저항한다. 누구도 그녀 곁에 다가설 수 없다. 누구도 함부러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위로할 수 없게 만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위로하고 기도하고 가까이 다다가지만, 실제로 그녀의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은 매번 그녀의 몇 걸음 뒤에 머물러 있는 종찬이다.

 

두 번째 불편했던 영화는, 종교적인 부분이다. 기독교의 풍경이 그려지는 모습에 의구심을 품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감독은 이런 풍경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이창동 감독은 스스로 말하듯이 종교에, 혹은 타인에게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신애를 묘사하는 방식이나 교회 풍경의 묘사에 있어서 고민한 흔적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감독 코멘터리를 참고하시길) 적어도 대상을 두고 함부로 아는 척 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철저히 신애의 신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어찌보면 자극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기독교 설정은 사실 하나의 배경에 그친다. 그것은 그저 위로하는 사람들의 풍경인데, 종교가 건네는 위로는 일반인이 건네는 그것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때때로 우리가 너무도 쉽게 건네는 위로의 풍경- 너를 이해한다고 쉽게 단정짓는 풍경을 극대화시킨 것을 기독교적인 설정으로 표현했다고 본다. 위로하려는 노력보다 앞서는 말은 때때로 소외를 낳는다. 신애 근처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신애를 위하지만, 신애는 늘 소외되어 있다. 신애 스스로도 자신의 내면과 화해하지 못하고, 애써 웃음을 지으며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녀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극단에 치달은 그녀의 모습은 사뭇 공포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무섭고 충격적이다. 하늘(신)에 저항하는 그녀의 작은 몸뚱아리는, 인간 존재의 한계에 부딪쳐 안간힘을 쓴다. 누구도 그녀의 고통에서 예외일 수 없고, 누구도 그녀를 위로하는 실체없는 손과 다름 아니다. 그러기에 관객은 주체이자 객체가 되고, 어느새 밀양이라는 세계 속 하나의 조연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는 듯한 몰입을 하게 된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겨우 용서를 베풀러갔더니, 그 죄인은 벌써 구원을 받고 평화 속에 놓여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용서(그녀)와 용서(신)의 간극.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 벌어진 망망한 간극 속에 홀로 놓여진 작은 영혼. 그녀는 바람처럼, 때때로 작은 회오리처럼 흔들린다. 관객은 그런 그녀를 계속 본다. 우리는 타인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그녀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감독은 왜 그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한 가운데로 관객을 몰아넣는가?

 



영화는 끝이 나도, 그녀의 삶은 그렇게 계속 될 것이다. 그녀는 때때로 눈을 치켜뜨며 하늘을 올려다 볼지도 모른다. 종찬은 계속 그렇게 머물기만 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그녀의 삶에 어떠한 변화도 구원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희망이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미미하지만,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 웃는다. 양복가게 주인여자와 평상시처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앞에서도 충분히 나누던 일상적으로 나누는 안부임에도 불구,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나는 주인여자가 그녀에게 “병원에서 잘 먹고 잘 쉬었나베”하며 툭 말을 꺼냈다 얼른 살짝 ‘아차 잘못말했다’하며 고개를 돌려 입을 가리는 장면. 그 모습을 보고 터덜 웃음을 터뜨리는 신애.

 

함께 웃는 두 사람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살아갈 수 있겠다. 타인의 고통에 섣부른 위로가 아니라, 작은, 아주 작은- 입을 가리고 실수를 용인하는 정도라도- 배려가 있다면, 당신과 나는 함께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결코 아픔을 치유해주지는 못하지만, 그 아픔도 삶의 한 조각처럼, 내리쬐는 햇볕처럼 그대로 품고, 한번 웃어주고 우리는 그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만용, 덜 불행한 내가 더 불행한 너를 위로해주겠다는 무의식적인 만용에 한번만이라도 의심을 품을 수 있다면, 한번만이라도 그것이 상대를 소외시킬 수 있다고 배려할 수 있다면,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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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들의 도시 - In Brug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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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대주교 암살이라는 임무를 마치고 난 레이에게 보스는, 2주간 벨기에의 관광도시 브리주에 가 있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함께 떠나있으라는 명령을 받은 켄은 브리주의 자연풍경과 예술미 넘치는 도시 관광을 즐기지만, 입만 열면 욕이요 불평인 레이는 모든 것이 지루하기 짝이없다. 이윽고 레이는 영화촬영장에서 만난 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켄은 자신만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평안한 시간을 보낸다. 그것도 잠시. 캔은 보스인 해리의 연락을 받는다. 바로 임무 수행 중 실수로 아이를 죽인 해리를 처벌하라는 것.

2인자 캔은 보스의 명을 따라 공원에 있는 레이의 뒤통수를 총으로 겨누지만, 그때 레이 역시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겨눈다. 아이를 죽였다는 자책감에 본인 역시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이 순간, 그러니까 캔이 해리의 명령을 무시하고, 레이를 설득하여 떠나 보내는 순간, 순조롭게 흘러가던 모든 이들의 일상과 브리주라는 공간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원칙을 어기는 순간에 촉발된 것이다. 레이가 임무에 없었던 아이를-고의든 실수든-죽였기 때문에, 캔이 죽여야하는 레이를 살려보냈기 때문에, 호텔방에만 있으라는 명령을 어기고 레이가 여자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원칙을 만든 자-보스-는 이 모든 어긋난 일들을 심판하러 브리주로 날아온다. (해리는 바로 <더 리더>의 훈훈한 남자 랄프 파인즈다! 짧은 머리에 야윈 얼굴로, 냉혹한 인상의 킬러를 만들어냈다!) 



정말이지 그들은, 킬러라고 치기엔 이상하단 말이지. 그들은 원칙주의자고, 도덕을 중시 생각한다. 임무로 자행하는 살인과 범죄는 도덕 예외로 적용된다. 그것은 일이기 때문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쉽게도 죽이는 킬러 주제에, 실수로 저지른 아이의 죽음 앞에서 자살을 시도할 정도다. 또한 보스는 그 때문에 자신의 부하를 처단하려고까지 한다. 이게 웬 아이러니란 말인가.

이렇게 원칙적인 킬러들 앞에 놓인 세상은 결코 원칙적이지 않다. 우연과 무계획적이고 뜻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들만이!) 이들의 예상과 계획을 보기 좋게 비웃는다. 그 때문에 이들은 충돌을 일으킨다. 레이는 죽고자 할땐 살고, 살고자 할땐 죽는다. 캔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레이를 떠나보내고 싶어하지만, 레이는 어쩔 수 없이 돌아오게 된다. 해리는 자신의 원칙을 완수함으로써 고고한 킬러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 역시 끊임없는 우연에 휘말려 레이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킬러들의 도시>가 흥미로웠던 지점은, 이 원칙주의자들- 고결한 삶을 살아내고 싶어하는-앞에 놓인 세상 속 우연의 풍경이다. 여기에서의 우연은 헐리우드 영화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하필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든지, 뻔히 예상되는 우연을 남발한다는 식 등의 쉬운 아이러니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모든 일에 원인과 결과가 있다. 이를 테면, 레이가 다시 브리주로 돌아오는 것을 보자. 우연히 해리에게 붙들린 것도 아니다. 마음이 바뀐 것도 아니다. 참 레이다운 이유다. 전날 여자의 집에서 그의 옛 애인을 때린 이유로,(이것 역시 레이에게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떠나는 기차에서 붙들려 돌아오게 된다. 레이의 모든 행동과 수다스러운 말이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된다.  

 



이 영화를 보고 숭고미를 떠올린 까닭은, 바로 이들이 고결한 삶을 살고자 하는 킬러들이기 때문이다. <킬러들의 수다>라고 제목을 헷갈려도 무방할 정도로 영화 속 세 명의 킬러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물론 말은 그다지 통하지 않는다. “너는 네 삶을 고쳐나갈 수 있어!”라는 켄의 말에 “그럼 의사가 되라구요? 시험봐야 되잖아요!” 레이는 이런 식으로밖에 대꾸할 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원칙을 염두에 두고, 그것에 대해 대화한다. 때문에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킬러들의 모습들이 포착된다.

캔과 레이가 미술관에서 종교화를 보며 죽음에 대해 논하는 모습을 보라. 이들은 죽음 자체보다 그들이 살며 저지른 죄를 두려워하고 있다. 죄를 인식하고 죽음, 끝을 인식한다. 숙소(BnB)에서 해리와 레이의 대결장면은 어떤가. 숙소 주인이 임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밖에서 싸우자고 한다. 레이가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해리는 문밖으로 뛰어나갈 것. 서로 정한 원칙을 위배하는 일은 결코 없다. 적어도 레이의 적인 해리는 반칙으로 레이를 공격할 것 같지만, 그들은 충실하게 약속을 행한다. 그들은 약속과 원칙을 지키는 고결함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숭고함이란, 자신의 존재가 광대한 우주 속에 하찮음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하찮고 사소한 감정, 욕망, 의지를 내려놓는 순간 더 큰 질서와 자연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과 바라는 것 너머의 원칙을 목숨만큼이나 지키려고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고결한 삶에 대한 갈망(혹은 강박)을 느꼈고, 과대 해석해서 나는 그만, 숭고한 아름다움까지 느껴버린 것이다. 그들의 죽음, 혹은 집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약한 인간인 그들이 지닌 의지와 신념에 관한 감동이다. 우연의 세상속에서 그것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그들의 고투에 대한 감동이다.

결국, 세 사람은 모두 죽는다. 세 사람 모두에게 살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 기회를 선택하지 않았다. 끝까지 원칙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희생하고, 스스로 죽고 말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마지막 장면에서 허무의 감정을 느끼려는 찰나, 어쩌면 그들은 고결한 삶을 지키기 위해, 어쩌면 집착한 나머지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브리주의 이 세 명의 킬러들은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아름다운 브리주에서. 시간을 고수하듯, 변함없이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예술의 도시 브리주에서 말이다.   

여기서 레이는 콜린 파렐이다. 가장 없어보이는 킬러를 기막히게 연기해냈다. '이런,진상!'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끔 하는 특유의 블랙코미디스러운(?)연기는 골든글로브도 인정했다. 그는 이 영화로 골든글러브 남우주연상을 타냈다. (브랜단 글리슨, 랄프라인즈의 연기도 물론 좋았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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