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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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그리고 IMF체제의 유산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읽은 적은 없다. 하지만 몇번이고 읽을 기회는 있었고 지금도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책이 있다. 이 책에 손이 가지않는 것은 '편협'하게도 세계화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세계화와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말에 대한 반감은 말보다 그 결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때문이다.

1996년 취직을 한 후 1997년 결혼을 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IMF시대'를 만났다. 하지만 나는 지금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거나 시작하려고 준비하는 젊은이 보다는 운이 좋은 편이다. 그리고 그때 '사오정, 오륙도' 소리를 들으면서 떠난 분들과 비교해도 그렇다. 감봉정도의 수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회사를 다니며 씁쓸할 때가 있다. 대학을 막 졸업한, 아니면 대학을 졸업하고 몇년이 지난, 또는 대학을 아직 졸업하지 못하고 '유연한 고용관계'를 맺고 돈을 벌고 있는 동료들을 볼 때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어느 특정회사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지만 내가 몸 담고 있는 곳에서만이라도 이런 문제를 비켜갈 수 없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재작년에는 함께 일하는 이런 친구들 중에 한명만이라도 제대로 된 처우를 받도록 하겠다는 개인적인 연간목표를 세운적도 있다. 이런 동료들은 <88만원 세대>라고 불린다.

많은 회사들(특히 현대판 노가다인 인터넷, IT기업에서는)이 젊은 세대의 창의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이들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주기보다는 이들을 싼 임금의 대상으로 본다. 그리고 '새로운 젊은 인재' 양성보다도 다른 회사의 경력직을 선호한다. 10여년의 사회생활 사이 <88만원 세대>와 함께 만들어진 다른 양상이 'Head Hunting/억대 연봉 회사원'인 듯 하다. (평평하지 않고 한쪽으로 화끈하게 치우친 임금구조, 노동계급 내에서의 양극화!)

첫단추를 잘 꿰어야 - 왜 학교도 직장도 재수, 삼수를 하는가?

어제(4월21일) 한겨레 신문에서 <20대 남성 '눈높이 낮추느니 차라리 백수'>라는 기사를 읽었다. 그 내용을 보면 비교적 고용의 질이 떨어지는 서비스업의 새 일자리는 기대수준을 낮춘 여성들에게 일자리 기회를 제공하지만, 노동시장에 신규 진입하는 고학력 20대 남자들에게는 그다지 관심대상이 못된다.
 
왜냐하면 “남자가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가부장 문화가 건재한 상황에서 학력 수준이 높은 남자들은 질 나쁜 일자리를 택하느니 취업 준비를 계속한다”며 “처음부터 비정규직으로 시작하면 정규직으로 올라서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 공무원 시험을 비롯한 공공부문 취업에 매달리는 것을 두고 눈높이가 너무 높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규직 일자리 수는 최근 7년간 사실상 제자리 걸음을 했다. 20대 '백수'는 109만명이고, 취업자는 399만2천명으로 인구(665만3천명)의 60%를 차지했다. 자영업 부문 종사자가 29만8천명, 임금근로자가 369만4천명이었다. 임금근로자 가운데 정규직인 상용근로자 비율은 58.1%였다. 20대 전체의 고용률(생산가능 인구 가운데 취업자의 비율)은 최근 몇년 동안 뚜렷한 변화가 없었으나, 20대 남성만 놓고 보면 고용률이 급격히 추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2002년 65.2%에서 지난해 60.5%로 5년새 4.7%포인트나 떨어졌다.

어떻게 보면 '여성 상위'라 할 수 있는 시대적 분위기와 학업성취도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에서도 대졸 여성보다 그 다지 나아보이지않는 대졸남자들이 가부장적인 책임까지 뒤집어써야할까? 이 세대가 불행해 보인다. 그리고 '첫단추(첫직장)'를 잘못꿰어 계속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동료들을 볼 때 위에서 말한 '어려운 현실'의 강도가 실제보다 더 클 것이라 생각한다. 이들 세대를 행복하게 만들려면 적어도 이것들은 철폐해야 한다.

1. 여전히 가부장적인 문화(직장생활을 하는 잘나가는 여자에게도 이런 문화는 질곡이다), 2. 학력철폐를 부르짖듯이 비정규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할 때 갖는 선입관과 이를 강화하는 제도적 관행(학력철폐를 위한 블라인드 면접처럼 경력직도 이런 것이 필요하지않을까?), 3. 궁극적으로는 이런 질서를 유지, 강화하는 법제도의 개폐가 필요하다.

재수의 경험을 살려 말하면 재수하여 잘되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으면 문제이다. 나이는 먹어가고 심신은 '썩어' 간다. 그런데 학교와 달리 취업 재수에서는 놀지않고 성실히 준비했다는 자신의 알리바이까지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해외연수' 등에 돈을 박아야 한다. 돈까지 '썩어' 나가는 것이다.(2008년 4월 22일 추가)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던지는 질문

지금 의사결정을 하는 중요한 직책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대학을 갓 졸업한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 시기 누가 그들을 보호하고 다시 가르치고, 창의력과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했을까? '똑똑한' 자신일까? 아니면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던 '사회초년병'에 대한 조직적 보호였을까? 그리고 그때 '당신도 어설프고 실수 많은 사람이 아니었는가?' 묻고 싶다. 마지막으로 '그런데도 기회를 줘서 현재의 당신과 (회사가 잘 나간다면) 현재의 회사가 되지 않았는가?'는 질문도 하고 싶다.

자본주의적 경제시스템의 가장 작은 조직적 원자라 할 수 있는 회사의 인사정책과 새로운 사업에 대한 투자정책에도 이런 질문을 해야하지 않을까?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 BAD SAMARITANS - The Myth of Free Trade and the Secrete History of Capitalism>을 읽고 감상을 쓰면서 갖는 생각이다.

앞의 세대들은 젊은세대(나 역시 아직 젊지만, 더 젊은)의 창의력, 끼, 감성, (가끔은 오만방자하다고 느끼지만) 자유로운 행동을 칭찬하지만 이들이 정작 원할 때 쓰지않고 '비싼' 경력직을 채용하려고 할까? 그것은 그 친구들이 제대로 일을 할 때까지 보호하는데 들어가는 시간과 돈을 투자가 아닌 비용으로 보고,  당장 '열정적이거나 창의적'이지 않더라도, 좀 비싸더라도 경력직을 고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비용효과적)이고 났다는 판단이 깔려있는 듯하다.
 
(이런 비교를 기회비용이란 용어로 설명하며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도 한다. 더 길게 보면 이런 결정이 기회비용을 더 들어가게 할 수도 있다. 시간과 이 시간의 경과에 따른 사람의 발전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회사가 아닌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회사는 다른 회사가 '길러놓은' 사람을 계속 가로챌 수 있다면 현재의 판단이 맞을 수 있다. 현재 상대적일 지라도 잘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라는 비교우위의 정태적 논리를 통해 봐도 이런 판단이 맞다.)

이때 우리는 개발도상국들의 국가정책에 대해 '반시장주의적' 훈수를 두는 장하준 교수의 이야기를 회사 내에도 대입해 볼 필요가 있다.

간단하지만 강력한 원칙, 현재를 희생해서 미래를 개선하라!

능력을 기르는 데 투자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당연히 희생이 따른다. 하지만 그 희생이 무서워 투자를 안 할 수는 없다.  ... 실제로 우리는 장기적으로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단기적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을 흔희 본다. 그리고 이들을 진심으로 격려한다. (p.320)

장하준 교수는 "'현재를 희생해서 미래를 개선하라'는 간단하지만 강력한 원칙"이 현재 잘사는 나라들이 취했던, 그리고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추앙받는 렉서스의 도요타와 핀란드의 노키아의 정책이었음을 보여준다.

최근 만들어진 한국의 인력시장에서의 일반적 관행 - 정규직은 대기업 경력자로 채우고, 신입은 정규사원보다는 파견직이나 계약직으로 채우는 이런 관행은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하는 것이다. 이런 회사가 도요타가 될 수 있을까? 또 사회 내에 있는 전체 회사가 다 이렇게 한다면 높은 생산능력의 원천인 새로운 '경력직'은 어디서, 어떻게, 언제까지 충원할 수 있을까? 장하준교수가 말하는 국가와 마찮가지로 우리는 스스로 '시장에 대항'하면서 생각하지 않고는 일반적인 회사는 될 수 있어도 '위대한 회사'는 될 수 없을 듯 하다.

특히 성공한 기업가들은 시장의 힘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회사에 대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운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한 기간 동안 시장의 흐름을 거스를 필요가 있는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이 진출하고자 하는 새로운 부문에 세운 자회사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돌본다. 기존 회사에서 나온 이익으로 그 손실을 메우는 등의 방법을 통해 말이다. 노키아는 벌목, 고무장화, 그리고 전선 사업에서 번 돈으로 17년에 걸쳐 전자 사업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삼성은 직물과 제당사업에서 번 돈으로 10년이 넘도록 전자 사업에 투자했다. (p.319)

우리가 정말 젊은 세대- 이들을 <88만원 세대>라고 부르는 현실이 슬프지만 -를 믿는다면 이들을 '돌봐야' 한다. 그럭 저럭 먹고사는 회사/국가가 아닌, '위대한 회사/국가'가 되고자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현재 이들이 "생산성이 낮은 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데에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생산성이 높은 활동을 할 만한 능력이 없다." 대학을 갓 졸업한 이들에게는 아직까지 경력직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조직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계속해서 이런 일을 하라고 해야 하는가? 더우기 사람 밖에 자원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나라에서!  "적어도 능력이 크게 변화할 수 없는 단기간에 국한시켜 본다면" 현재의 기업 관행들은 옳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영원히 그럴 것이라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88만원 세대,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막는 조건들

1997년 이후 대학생들은 글로벌 스탠다드에 걸맞는 노동자/회사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실패(실업자, 파견직, 계약직, 시급 아르바이트)하고 있다. 이것이 회사에 '쓸모없는' 사람들을 양산해내는 학교 교육의 문제일까? 아니면 개인적인 자질과 노력의 부족이 문제일까?

나는 '감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교는 기본적인 자질과 인성 등을 만들어내는 곳이어야하지 '실전/실무'에 투입할 노동자/회사원을 찍어내는 곳이어서는 안된다는 이상주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대학을 다니며 '학교가 노동자/회사원을 찍어내는 곳'이라는 사회과학적 분석이 정확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은 법제도의 문제라고, 앞선 세대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외치는 IMF, 세계은행, WTO 등을 앞세운 시장주의적 공세에 무참히 밀려버린 결과이다. 이런 현실이 지속된다면 이제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 학교는 회사에서 일을 배울 수 있는 일반적 기반을 만들고, (적어도 10년전의) 회사에서는 '대졸 신입사원'에게 적어도 2~3년정도 동안은 투자를 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전사회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 할만하면 나간다'해도 서로 맡바꾸기가 될 수 있어 큰 문제가 없었다.

지난 10년 고용이 유연화되고 이 체제가 무너지면서 <88만원 세대>가 나왔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학교 교육과 개인적 자질의 문제도 아니다. (그런데 바보처럼 자기의 개인적 능력에 달린 것이라 생각하며 도서관과 고시원에서 날을 새며 공부하는 세대가 이 세대는 아닐까?) 가끔 면접을 보면서 놀날 때가 있다. In Seoul, 심지어는 SKY(서울대, 고대, 연대 졸업자)마저도 파견직으로 들어온다. 최근에는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100여만원이 조금 넘는 파견직에 이력을 제출한 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나머지 대학의 졸업생들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고 10살 밖에 안된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한다.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시키는 시장주의적 요구, 대기업과 중소기업 /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으로 갈려진 노동시장 구조,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경쟁적 체계들이 삶을 각박하고 힘들게 만든다. 유연한 노동시장은 그것에 걸맞는 유연한 재교육과 복지, 지원체계를 요구한다. 그런 준비없이, 장하준교수의 말을 빌면 곳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도 없이' 세계표준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우리도 지난 10년 젊은세대가 올라가 행복한 삶, 적어도 걱정 없는 삶을 영유할 수 있는 사다리를 걷어차버린 사회, 회사를 만들었다. 국가간의 문제만이 아닌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우리 스스로가 나쁜 사마리아인일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보다 더 할 이명박 정권이기에 더 걱정이 된다.)

글로벌 표준이 아닌 차이의 인정과 미래로 오를 사다리의 필요성

나는 자주 내가 일을 너무 적게 하면서 돈을 너무 많이 받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밤 늦게까지 일을 하면서 있는 <88만원 세대>인 동료를 볼 때 더욱 그렇다. 나는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많은 선배들로부터 업무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 보살핀 덕에 생산능력이 '아주 좋아(?)' 어떤 기획서이고 기획서 찍는 기계처럼 한두시간이면 다 끝내고 하루 종일 '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너무 일을 많이 한다는 소릴 듣는다. 

이렇게 보면 나는 능력에 비해 일을 너무 적게하고 있고, 그들은 능력에 비해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 된다. 거기에다 나는 노동가치설의 가진, 적어도 그것이 '윤리적'인 진리치를 믿고, 회사의 많은 부/매출이 나보다 더 많은 시간 회사 일에 헌신하는 그들의 노동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안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노동가치설의 윤리적 진리치는 정운영 교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정운영 교수가 강의시간에 노동가치설을 해석하면서 적어도 맑스(Marx)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나 팔이나 다리가 불구인 사람이 같은 시간 노동을 하였다면, 그 생산량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는 동일하다고 말했다. 이런 점은 노동가치설이 맞냐, 틀리냐를 떠나 하나의 인간에 대한 윤리적 지침, 평등성에 대한 생각을 준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가 말했던 something, 촉촉/축축한 무엇, 인간을 이루는...)

나와 대학을 갓 졸업한 동료가 평평한 축구장에서 아무런 배려없이 경쟁한다면 문제가 있다. 이것처럼 우리가 현재 듣고 있는 글로벌 스탠다드, 평평한 축구경기장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를 장하준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보여준다. 그것도 아주 역사적으로 접근하여 자신의 주장이 아닌 그들(신자유주의자들)의 선구자들, 그들 자신의 나라의 정책과 사례들을 통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한미FTA를 체결하자고 말하는 시점에, 교육을 정상화한다면 시장자율에 맡기자는 시점에 이런 것들이 정말 '표준'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표준이면 무조건 따라야하는지, 왜 표준을 만드는지, 또는 표준이 만들어지는지 생각해 본다. 이런 모든 것의 결정 기준은 '행복한 삶'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떠나 '불행'한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말로 설득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은, 나쁜 사마리아인 같은 정책으로 개인적인 이득을 볼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이런 정책이 '옳다'고 확신하는 이데올로그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독선주의가 이기주의보다 더 고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희망은 있다. 존 메이나드 케인즈는 자신의 주장이 일관되지 않다는 비난을 받자, "사실이 바뀌면 나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하십니까?"하고 대꾸한 것으로 유명하다. (pp.333~334)

세계경제 질서 안에서 가난한 나라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정말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 안에서도 젊은세대가 경쟁력을 갖고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유연한 고용체계와 경쟁적 교육체계를 도입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정책으로 개인적인 이득을 볼 수 있는 세력이 있을 수 있다. 우리 자신이 그렇지않은가? 암묵적으로라도 동조하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 볼 문제다.

블로그: http://www.dckorea.co.kr/tt/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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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코기타툼 1
켄틴 스키너 지음, 조승래 옮김 / 푸른역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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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2007년 7월 26일 "비정규직 법을 고치려는 협상이 진행되더라도, 이전보다 노동계에 결코 유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일단 비정규직법을 안착시키면서 한편으로 악용 사례를 차단할 수 있는 보완 입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랜드그룹의 비정규직 대량해고에 대해서도 "법을 악용하는 사용자의 자질이 문제"라며 '법의 문제'가 아닌 '개별 기업가의 부도덕성'에서 원인을 찾았다. (한겨레신문, 2007.7.27, 13면)

법 자체가 이런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 "법을 악용하는 사용자의 자질"과 "개별 기업가의 부도덕성"만을 문제삼아야 할까? 정치체가 아닌 기업체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노동자들)이 법 아래서 자유롭다는 것은 개별기업가의 선의를 통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닌 법 아래서 모두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별기업가의 선의를 통해야한다는 것은 노동자들이 법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닌 기업가에게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를 유지하려면 (기업가, 전제군주, 또는 독재자의) 임의적 자유재량권의 요소가 없는 정치 체제하에서 살아야 하며 시민권이 국가의 지배자, 지배 집단, 혹은 또 다른 권력자의 선의에 의존해야만 하는 가능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입법의 유일한 권력이 인민 혹은 그들이 신임하는 대표들에게 있는, 그리고 정치체의 모든 개별적 구성원들이-지배자와 시민 다 함께-그들이 자신에게 부과한 그 어떤 법에도 평등하게 복종하는 체제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치 정부 체제하에서 살아야만 지배자들의 강압적 임의 재량권을 박탈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시민들을 지배자의 선의에 의존하게 해 노예의 지위로 전락시킬 수 있는 그 어떤 폭군의 등장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주의, 푸른역사, 2007>

한국노총 위원장의 주장은 결국 "어떤 법에도 평등하게 복종하는 체제"가 아닌 '기업가들의 강압적 임의재량권',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을 기업가의 선의에 의존하게 해 노예의 지위로 전락'시키려는 것 아닌가? 자유, 법 앞에서의 자유는 정치체만이 아닌 모든 권력에 대한 제한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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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유목민 이야기 - 유라시아 초원에서 디지털 제국까지
김종래 지음 / 꿈엔들(꿈&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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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유목민족들이 만들어낸 세계


툰유쿠크의 비문과 '비분강개'한 문체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돌궐 제국을 부흥시킨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p.57)

나는 최근 이 이야기를 두번 들었다. 한번은 신문에서 읽은 것 같고 다른 한번은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이다. 이 이야기를 두번 듣는 사이에 이책을 샀다. 그래서 다시 한번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뢰즈의 <천의 고원>과 이책에 대한 해석인 이진경의 <노마디즘1,2>를 읽으면서이다. 이 책에서는 유목민들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노마디즘과 탈주의 철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나는 이진경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더 많았었는데 최근 일어난 두번의 우연한 만남 때문에 김종래기자의 <유목민 이야기>를 집어들게 되었다.

<유목민 이야기>를 집어들은 후 내용보다도 문체(style)의 장중함이 더 깊이 다가왔다. 그런데 문체의 장중함은 아주 비극적인 내용들과 뒤섞여 나오면서 "비분강개(悲憤慷慨)"한 기상을 끌어내는 듯 했다. 그러면서 읽지도 않은 김훈의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이 생각난 것은 왜일까? 김훈의 예전 직업과 김종래의 지금 직업이 겹쳐지면서 '기자들이 신문이 아닌,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쓰는 문체'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목민 이야기>의 부제는 '유라시아의 초원에서 디지털 제국까지'인데 과거의 유목주의가 디지털 사회와 만나면서 새로운 형태로 코드화되는 듯하다. 나는 톤유쿠크의 비문을 보면서 다시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말한 기동전과 진지전이 떠올랐고, 유라시아 초원과 세계적인 대제국을 만들어 냈던 유목민족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묻게 되었다.

과거의 역사를 살피는 이유

우리는 다시 '끊임없이 이동하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성을 쌓고 사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라고 뒤집어 생각해야 하는가? 사실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의 것(역사)를 살피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를 되뇌일려고 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 있는 맥락(context)나 구조(structure)를 보고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톤유쿠크의 비문은 척박한 초원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리저리 옮겨다여야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초원에 성을 쌓고 살려고 한다면 양들, 말들과 함께 굶어죽을 것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이 톤유쿠크가 유목민인 자신의 민족에게 남긴 이야기

그람시의 이야기를 덧붙이면 시민사회가 발전이 안된 러시아에서는 레닌의 기동전(유목민의 전술과 비슷한)을 통해 혁명에서 성공할 수 있었지만, 시민사회(성곽, 진지와 요새, 보루)가 발전한 서유럽에서는 기동전으로 휩쓸고 지나간다해도 그 뒷쪽에 여전히 강고한 성곽들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순간적으로 빼앗을 수는 있으되 계속해서 지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목민 이야기>에 나오는 원제국의 운명도 이런 틀로 이해할 수 있지않을까? 물론 자본주의 국가체제가 아니긴 하지만 그람시의 틀을 하나의 은유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기동전 - 진지전 - 화력전


1990년 걸프전을 보면서, 그리고 현존하던 사회주의국가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화력전'에 대해여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진지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기동하는 부대를 화력으로 지원하거나 화력으로 기동로를 봉쇄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것은 당시 유행하던 그람시의 책들과 한참 읽기 시작하던 알뛰세르의 책들 영향도 있었다. 1996년 군대에서 포병장교로 근무하면서 화력과 기동에 기반한 군사전술, 전략과 함께 이런 생각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지금 <유목민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정보의 디지털화는 (하나의 개념적 은유인) 화력전의 범위를 전세계화 한다. 인터넷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게 한다는 것은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이동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정보(이 정보들 모두 객관적 투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것들이다)인데, 이 정보는 특정지점(진지)에서 출발한다.

인터넷 내에서도 정보의 소통은 평등한 것이 아니며 위계적이며 제국이 지배한다. 제국의 언어(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형태인 언어)가 아닌 변방의 언어로는 이 세계를 지배하기 어렵다. 구글의 검색은 원격조정되거나 자동항법장치를 갖춘 스마트 폭탄처럼 정확하게 목표를 명중시킨다. 이렇게 할 때 구글의 거대한 검색DB는 진지인 것이다. 구글의 거대한 검색DB에 매시간 새로운 데이터를 긁어오는 로봇(crawler)들은 기동하는 유목민처럼 전세계의 데이터 베이스를 떠돈다.
 
구글이 제국이라면 제국이 된데는 이렇게 유목이 아닌 진지가 있는 것이다. 또 한국에서 네이버가 제국이라면 마찮가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디지털 노마디즘 운운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착취할 수 있게 만들어진 제국(정보사회)에 대한 나팔수 노릇을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고 있는 내 블로그의 제목도 디지털 노마디즘이다.) 언젠가 화력전에 기댄 에세이를 하나 써야겠다. 이런 생각은 이미 10년전에 갖기 시작했지만!

시간 대 장소: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것

유목민은 정착민과 달리 시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사고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개를 묶는 방식 때문이다. 우리는 끈으로 개의 목을 걸어 끈의 길이로 개의 행동반경을 통제한다. 그런데 몽골에서는 두 뼘도 안되는 끈을 가지고 앞발 중 하나의 관절을 반으로 접어서 끈으로 칭칭 감아 절름발이 걸음으로 만든다. 우리가 해오던 방식이 공간을 제한시켜 개의 활동력을 구속하는 것이라면, 유목민의 것은 시간(개의 속도)을 구속하여 개의 활동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이다.(p.93)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것은 결국 행동을 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지고 행동해봐야 한다. 세계는 한가지 얼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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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코기타툼 1
켄틴 스키너 지음, 조승래 옮김 / 푸른역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17세기 영국혁명을 전후로 만들어진 자유주의 개념은 아주 "공화주의"적이다. "인간 개개인의 육체가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을 할 수 있거나 혹은 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것처럼, 국민과 국가의 조직체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원하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그 의지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데 제약받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것이다, 자유국가란 자유로운 인격체로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국가라는 뜻이다. 즉 자유국가란 정치의 행위가 하나의 전체로서의 그 구성원들의 의지에 의하여 결정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p.81)"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자유주의는 "사적 개인으로서 침해받을 수 없는 최소한의 권리"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17세기 영국혁명을 전후로 형성된 자유주의 개념은 "순전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타인의 혹은 외부의 간섭이 없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며, "정치 제도와도 상관없이 어떤 체제하에서도 느릴 수 있는 것"이라는 현재의 개념이 아니었다. 현재 사용되는 이런 의미의 자유는 "인자한 주인을 만난 노예는 자유인 못지않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17세기 공화주의적인 자유주의 개념을 기준으로 현재, 또는 과거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많은 문제들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일본 국주의의 식민지배를 한국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뉴라이트의 주장에 대해서 엄격하게 한국민은 모두 노예상태였으며, 주인(일본)의 시혜없이는 자신의 의지대로는 무엇을 결정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민족주의적인 시각이 아닌 자유주의적인 시각으로도.

60~80년대의 군부정치에 대해서도 똑같은 판단을 할 수 있다. 단 전제군주와 같이 한사람만 자유로운 체제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독재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모든 국민들이 '인자한' 주인을 만난 노예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의 발전과 같은 경제성장 논리, 현재의 신자유주의를 공화주의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반대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부르조아 정치학 비판"을 통해 비판적인 국가이론을 정립해보고 싶은 생각으로 영국 유학을 생각한적이 있다. 그리고 계급이 없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모든 개인이 자유로운 사회,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는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렇게 단순하게 진행된 논리, 생각은 아니지만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이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공화국"은 궁극적으로 계급이 사멸한 국가이다. 왜냐하면 의지의 자유를 제약하는 조건들의 제거를 숙고하는 곳에는 경제적 지배관계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를 개인의 재산행사의 자유, 사적자유의 영역이 아닌 '의지의 자유'로 읽을 때, 이런 개인들의 의지의 자유로운 발현을 제약하는 사회경제적인 권력구조가 존재할 때 그것 자체가 노예상태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때, 현재의 자유를 포장하고 있는 형식적 자유가 실질적 자유로 변화될 수 있게된다. 결국 자유민주주의의 형식성을 탈피한 실질적인 경제적 민주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17세기의 혁명적인 자유주의 이론이 현재의 미국독립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기반한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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