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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이야기 - 유라시아 초원에서 디지털 제국까지
김종래 지음 / 꿈엔들(꿈&들)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야만적' 유목민족들이 만들어낸 세계
툰유쿠크의 비문과 '비분강개'한 문체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돌궐 제국을 부흥시킨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p.57)
나는 최근 이 이야기를 두번 들었다. 한번은 신문에서 읽은 것 같고 다른 한번은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이다. 이 이야기를 두번 듣는 사이에 이책을 샀다. 그래서 다시 한번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뢰즈의 <천의 고원>과 이책에 대한 해석인 이진경의 <노마디즘1,2>를 읽으면서이다. 이 책에서는 유목민들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노마디즘과 탈주의 철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나는 이진경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더 많았었는데 최근 일어난 두번의 우연한 만남 때문에 김종래기자의 <유목민 이야기>를 집어들게 되었다.
<유목민 이야기>를 집어들은 후 내용보다도 문체(style)의 장중함이 더 깊이 다가왔다. 그런데 문체의 장중함은 아주 비극적인 내용들과 뒤섞여 나오면서 "비분강개(悲憤慷慨)"한 기상을 끌어내는 듯 했다. 그러면서 읽지도 않은 김훈의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이 생각난 것은 왜일까? 김훈의 예전 직업과 김종래의 지금 직업이 겹쳐지면서 '기자들이 신문이 아닌,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쓰는 문체'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목민 이야기>의 부제는 '유라시아의 초원에서 디지털 제국까지'인데 과거의 유목주의가 디지털 사회와 만나면서 새로운 형태로 코드화되는 듯하다. 나는 톤유쿠크의 비문을 보면서 다시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말한 기동전과 진지전이 떠올랐고, 유라시아 초원과 세계적인 대제국을 만들어 냈던 유목민족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묻게 되었다.
과거의 역사를 살피는 이유
우리는 다시 '끊임없이 이동하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성을 쌓고 사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라고 뒤집어 생각해야 하는가? 사실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의 것(역사)를 살피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를 되뇌일려고 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 있는 맥락(context)나 구조(structure)를 보고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톤유쿠크의 비문은 척박한 초원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리저리 옮겨다여야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초원에 성을 쌓고 살려고 한다면 양들, 말들과 함께 굶어죽을 것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이 톤유쿠크가 유목민인 자신의 민족에게 남긴 이야기
그람시의 이야기를 덧붙이면 시민사회가 발전이 안된 러시아에서는 레닌의 기동전(유목민의 전술과 비슷한)을 통해 혁명에서 성공할 수 있었지만, 시민사회(성곽, 진지와 요새, 보루)가 발전한 서유럽에서는 기동전으로 휩쓸고 지나간다해도 그 뒷쪽에 여전히 강고한 성곽들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순간적으로 빼앗을 수는 있으되 계속해서 지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목민 이야기>에 나오는 원제국의 운명도 이런 틀로 이해할 수 있지않을까? 물론 자본주의 국가체제가 아니긴 하지만 그람시의 틀을 하나의 은유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기동전 - 진지전 - 화력전
1990년 걸프전을 보면서, 그리고 현존하던 사회주의국가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화력전'에 대해여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진지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기동하는 부대를 화력으로 지원하거나 화력으로 기동로를 봉쇄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것은 당시 유행하던 그람시의 책들과 한참 읽기 시작하던 알뛰세르의 책들 영향도 있었다. 1996년 군대에서 포병장교로 근무하면서 화력과 기동에 기반한 군사전술, 전략과 함께 이런 생각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지금 <유목민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정보의 디지털화는 (하나의 개념적 은유인) 화력전의 범위를 전세계화 한다. 인터넷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게 한다는 것은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이동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정보(이 정보들 모두 객관적 투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것들이다)인데, 이 정보는 특정지점(진지)에서 출발한다.
인터넷 내에서도 정보의 소통은 평등한 것이 아니며 위계적이며 제국이 지배한다. 제국의 언어(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형태인 언어)가 아닌 변방의 언어로는 이 세계를 지배하기 어렵다. 구글의 검색은 원격조정되거나 자동항법장치를 갖춘 스마트 폭탄처럼 정확하게 목표를 명중시킨다. 이렇게 할 때 구글의 거대한 검색DB는 진지인 것이다. 구글의 거대한 검색DB에 매시간 새로운 데이터를 긁어오는 로봇(crawler)들은 기동하는 유목민처럼 전세계의 데이터 베이스를 떠돈다.
구글이 제국이라면 제국이 된데는 이렇게 유목이 아닌 진지가 있는 것이다. 또 한국에서 네이버가 제국이라면 마찮가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디지털 노마디즘 운운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착취할 수 있게 만들어진 제국(정보사회)에 대한 나팔수 노릇을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고 있는 내 블로그의 제목도 디지털 노마디즘이다.) 언젠가 화력전에 기댄 에세이를 하나 써야겠다. 이런 생각은 이미 10년전에 갖기 시작했지만!
시간 대 장소: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것
유목민은 정착민과 달리 시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사고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개를 묶는 방식 때문이다. 우리는 끈으로 개의 목을 걸어 끈의 길이로 개의 행동반경을 통제한다. 그런데 몽골에서는 두 뼘도 안되는 끈을 가지고 앞발 중 하나의 관절을 반으로 접어서 끈으로 칭칭 감아 절름발이 걸음으로 만든다. 우리가 해오던 방식이 공간을 제한시켜 개의 활동력을 구속하는 것이라면, 유목민의 것은 시간(개의 속도)을 구속하여 개의 활동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이다.(p.93)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것은 결국 행동을 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지고 행동해봐야 한다. 세계는 한가지 얼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