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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삶
정소현 지음 / 창비 / 2019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소현 작가가 7년 만에 선보이는 두 번째 소설집인 『품위 있는 삶』에는 2013년에서 2019년 사이에 쓰인 여섯 개의 단편들이 실려있다. 이 단편들 속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 ‘건강하지 못함’은 곧 ‘죽음’과도 연결되는데, 그래서인지 소설 속 인물들은 죽거나, 죽어가거나, 이미 죽었거나, 죽다 살아났거나 한 상태다.(그리고 이 ‘죽음의 상태’는 이전 정소현 작가의 작품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작품 말미에 독자들을 놀라게 만드는 ‘반전’ 서사의 키워드로 작용하기도 한다.) 계속 그렇게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상태의 인물들이 일상을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리 만무하다. 죽음과 지옥의 자음이 같으니 마치 이 둘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듯 『품위 있는 삶』 속 죽거나 죽어가거나 이미 죽었거나 죽다 살아났거나 한 인물들은 곧 지옥에 갈 것 같거나 이미 지옥에 있거나 지금 살고 있는 곳을 지옥이라고 생각하거나 남이 보기엔 지옥이어도 자신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중이다.
내가 좋아하는 괴담 하나가 있다. 짧지만 다 읽고 나면 다소 오싹해지는 이야기다.
꿈속에서 처음 보는 온통 하얀 공간에서 눈을 떴는데 어떤 남자만 혼자 앉아서 조용히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
이거 꿈이에요?
하고 물어보자 남자가 엄청 무심하게 신문을 접으며
이게 현실이야.
라고 대답했다.
『품위 있는 삶』 속 소설들이 내게는 이 괴담의 확장판처럼 느껴졌다. 인물들이 모두 ‘알고 보니’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죽음과 지옥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여) 설명하자면 이렇다. 노후를 편하고 안락하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험을 통해 품위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알고 보니 치매 환자였다든가(「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 땅속 판잣집만이 온전하고 안락하게 머물 공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진짜’ 집과 가족들은 햇빛이이 비추는 땅 위에 있었고(「그 밑, 바로 옆」) 작업실에서 재기를 노리며 차곡차곡 작업물을 쌓아가는 중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지만 알고 보니 본인이 그곳에 스스로를 가둬둔 것이나 다름없었다든지(「꾸꾸루 삼촌」), 와 같은. 소설 속 인물들은 여기가 꿈, 그러니까 행복, 안락, 평화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불안과 불행과 고통이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내 기억에 남는 단편은 「엔터 샌드맨」이다. 「엔터 샌드맨」 역시 ‘알고 보니’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인물인 지수가 나오는데, 지수는 소설 속에서 이미 과거 한 번 ‘알고 보니’를 겪고 난 인물이기도 하다. 과거 뮤직비디오 감상실이 있던 건물이 무너지면서 매몰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지수는 의식을 잃었던 동안 당시 같이 있던 친구 은하와 함께 구조되어 어른이 되는 미래를 꿈으로 겪고, 현실에서 은하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그 꿈만을 현실이라고 여기다가, 유일하게 함께 구조되었던 지훈의 도움을 받아 은하가 죽고 자신만이 살아남은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지수는 그렇게 알게 된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 괴담 사이트 운영에 매달리면서 다시금 현실을 외면한다. 「엔터 샌드맨」은 이미 ‘알고 보니’를 겪고 난 뒤의 인물을 다루고 있다는 점, 그 인물이 죽다 살아나 지옥과도 같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한다는 점, 그러나 그 도피는 지옥같은 현실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특히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작품집 속 소설들을 계속 읽다보면 인물들이 겪는 ‘알고 보니’에 독자인 나 역시 놀라게 되고 그럴수록 점차 소설 속 화자와 인물들을 믿을 수 없어진다. 그렇게 신뢰를 잃고 소설 속 지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보고자 허우적거리는 인물들을 통해 소설은 삶과 죽음, 현실과 지옥의 경계를 묻는 것 같다. 그 경계에서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지옥인 걸 모르고 살아갈수록,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할수록, 지옥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삶은 품위와 거리가 멀어진다. 하지만, 그런 세계 속에서 품위가 있거나 없는 삶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남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악문 사람들의 삶을 품위의 유무로 비난할 수 있을까. 세상이 여기도 지옥, 저기도 지옥이라면, 결국 지옥이 뭐가 나쁘냐는 거다. 당신은 뭐 얼마나 다른데. 지금 품위가 중요해? 이걸 품위 없다고 비웃을 수 있어?
그런 점에서 수록작 「어제의 일들」의 마지막 부분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모든 게 화무십일홍인 거라. 후회하고 원망하고 애끓이면 뭐해. 좋은 날도 더러운 날도 다 지나가. 어차피 관 뚜껑 닫고 들어가면 다 똑같아. 그게 얼마나 다행이냐.”
(중략)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은 명백히 지나가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어제의 일들」, 92~93p)
책 표지 뒤에 있는 정세랑 작가의 추천사 속 말마따나 이 소설집은 위로나 안도보다는 계속해서 고통이 남아있고 그 고통을 망각하거나 마주하거나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옥같은 세상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이거 꿈이에요? 아니, 현실이야. 저 여기서 행복할 수 있어요? 여기 지옥인데. 그래도 어쩌겠어요. 난 계속 살아있는데, 어차피 계속 여기서 살아야 한다면... 지옥에서도 살아 있어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정말 다행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