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녀와 산책하는 낭만제주
임우석 지음 / 링거스그룹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어쩌다 보니 며칠 새에 여행기를 두 권 연달아 읽게 되었다.
임우석이 찍고 쓴 <그녀와 산책하는, 낭만 제주, 링거스그룹>과
이우일이 찍고 쓰고 그리기까지 한 <이우일, 카리브 해에 누워 데낄라를 마시다, 예담>이다. (이하, 카리브해 데낄라)
출판된 건 이우일의 책이 2006년 7월이고, 임우석의 책이 2009년 5월인데
내가 읽은 건 임우석의 책이 먼저고, 이우일의 책이 그 나중이다.
세상에 나온 책에 선배와 후배가 따로 있고, 형 동생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선호도에는 선과 후가 있으니 참 재밌는 일이다.
우선 두 책의 공통점을 꼽자면,
첫째, 둘 다 내가 가 본 곳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곳이고 나와 여행한 시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올해 새로이 발견한 살고 싶은 섬, 제주도와
내겐 늘 전생의 인연처럼 각별한 애틋함이 있는 땅 멕시코와 쿠바!
둘째, 홀로 여행이 아닌 가족과의 여행의 기록이다.
낭만 제주는 저자가 (지금은 부인이 된) 여자친구와 3년여를 오고 간 제주의 기록이고
카리브해 데낄라는 저자가 부인, 딸과 함께 한 달여를 머물다 온 지구 반대편의 기록이다.
셋째, 각 꼭지의 마지막에는 앞서 언급한 여행과 관련한 간단한 Tip을 싣고 있다.
넷째, 프롤로그는 각기 저자 자신이 썼지만, 에필로그는 모두 그들의 여인들에게 맡겼다는 것.
누가 누구에게서 영감을 받았는지 어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그렇다.
하지만, 차이점은 있다.
낭만제주에는 '그녀'가 주로 돌봐주고 아껴주고 배려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그려지지만,
카리브해 데낄라에서 '그녀'는 보다 적극적으로 화자로 개입하고 있다는 거.
역시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하는 '그녀'가 <아내의 독백>이라는 형식으로 만화를 그려
중간 중간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이우일의 '작은 그녀' 까지 귀엽고 앙증맞은 그림일기로 한몫 하고 있다.
꽤나 풋풋하고 사랑스럽다.
낭만제주의 화자는 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반면
카리브해 데낄라의 화자는 좀 더 중립적이고 차분했다.
공식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한 사람의 혹은 한 가족의 사적인 여행의 기록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이지 않은 게 어디 있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이 두 책의 어투는 그걸 구별짓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그 여행지에 대해, 그 여행에 대해,
화자가 '감정'을 절제하고 '적당한 거리'를 둘 줄 아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인 것 같다.
내게는 카리브해 데낄라 스타일이 읽기에 마음이 편했다.
낭만제주에는 내가 아는 제주의 역사보다 내가 세세히 모르고 있는 제주의 모습이 더 많았다.
아마도 책에 나온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역사쟁이'인 저자의 관심사 때문인 것 같다.
다음에 제주에 갈 때는 그곳의 자연과 사람 이상으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관심과 공부가 선행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반면, 카리브해 데낄라에는 내가 모르는 멕시코와 쿠바보다는
내가 아는 멕시코와 쿠바가 더 많이 나온다.
다녀온 지가 몇 년 지난 터라 나는 그리움으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겼다.
내가 두려워했던 문제에 똑같이 두려워하고, 내가 아파하던 문제에 똑같이 아픔을 느끼는 화자가
그것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화자가 나는 고마웠다.
내가 정 준 것들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가 느껴져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책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마무리에 있었다.
낭만 제주, 읽으면서 이렇게나 호, 불호가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책은 또 처음이다.
처음 책을 잡았을 때 주위에 소문을 냈었다.
이 책 너무 닭살이야~ 알레르기 있는 사람은 안 보는 게 좋을걸~
훗. 그래도 읽다 보니 내 주변 남자들에게서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볼 수 없는
애정표현만 있는 게 아니라
역사를 좋아한다는 저자 덕분에 조금 다른 시각의 제주를 볼 수 있어서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용납 안 되는 건 무성의한 교정교열 편집.
종종 주어와 목적격과 동사의 관계가 아리송해지는 문장의 출현이야
이 세상 모든 책의 저자가 완벽한 문장가일 수야 없으니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간다 쳐도
도무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오자와 탈자, 그리고 편집 실수. ㅡ.ㅡ
마치, 요즘 한창인 제주 다시 보기 붐에 편승하고자 후다닥 해치운 듯한 느낌이 들어
나는 그때마다 불편한 마음으로 "아으, 진짜!! (>.<)" 를 외치고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인터넷 서점에서 인기 참 좋다.
아~ 그런데 나는 정말 정말 바른 교정교열 만큼은
책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믿는 고집쟁이인 것이다.
내용이 아무리 유달라도 그것이 빠져 있으면 내겐 얕고 가벼운 책일 뿐 '착한 책'이 될 수 없다.
카리브해 데낄라, 책장을 거의 다 덮을 때쯤 딱 한 개의 오자를 발견했다.
또, 폭과 너비를 다른 낱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두 군데, 잘못 사용되었다.
아마도 폭과 길이였겠지.
그리고, 그쪽 여행기들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스페인어를 모르는 데서 오는 오류들...
영어식 표기로 쿠바의 지명을 발음하는 건 전혀 낭만적이지도 쿠바답지도 않다.
어떤 건 스페인어 그대로, 어떤 건 영어 식의 추정 발음으로.
쓰는 김에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금세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3년 전이니 그동안 1쇄 이후를 찍었다면 누군가가 알려줘 수정되지 않았을까?
출판사에 연락하거나 저자와의 접촉을 시도해 볼까 생각 중이다.
책 하날 가지고 뭐 그리 골머리 아프게 보냐고?
나한테 책은 그런 존재다.
첫사랑의 그녀처럼 완전했으면 하는 무엇. ㅋㅋ
아!!!!!!!!!!!!!!!!!!!!
어쨌거나 이 두 권의 책때문에 며칠간이 후다닥 흘렀다.
오래된 여행의 추억으로 가슴 한켠에 또 집채만 한 파도가 출렁이고
돌아오지 못할 시간에 대한 아쉬움으로 망막이 흐려진다.
ps.
낭만 제주는
여인은 있으나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뚝뚝이들이 읽으면
한 가닥 힌트를 얻을지 모르겠다.
단 이미 뚝뚝이 남자친구를 두고 있는 처자라면
읽고 나서 한없이 비교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할 것.
카리브해 데낄라는
저자의 안정된 글도 글이지만,
카리브해의 정열을 한껏 고조시키는 원색의 일러스트 또한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