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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빨강 ㅣ 창비청소년문학 27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어느 초여름 밤 갑자기 옆방에서 아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
[헙]
좋으냐?
예.
훗, 벌써 서시를 읊조릴 나이가 되었구나,
그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맥없이 쓸쓸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몇 년 전 그날 이후, 아이가 시를 읽는 걸 더 이상 보지 못했다.
그런데 욘석, 박 성우 시인의 <난 빨강>을 무심한듯 던져주었더니 침대에 앉아 꽤 골똘히 읽는다.
그러다가 부엌의 엄마에게 한 소리 지른다. "이거 무슨 시가 이래?"
ㅋㅋㅋ 긍정적인 반응이다.
보통은 제 맘에 안 드는 책은 처음 몇 장 읽는 시늉만 하다가(엄마한테 잘 보이고 싶을 때)
이내 던져버리는데 이건 끝까지 붙들고 앉았다.
나 역시 안 읽어보긴 마찬가지여서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 방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손에 집히는 대로 한 장을 확 펼쳐 들었는데..... 어이쿠. 깜짝이야.
그새 컴퓨터 앞으로 옮겨앉은 아들녀석과 눈이 딱 마주친 어미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색한 폭소를 쏟고 말았다.
푸하하하 으헐헐헐 무언의 공감.
은밀한 면도
박성우
거시기에 털이 난다
징그럽게 털이 난다
듬성듬성 털이 난다
곱슬곱슬 털이 난다
슈퍼에서
일회용 면도기를 샀다
터, 터, 털을 밀다가 비, 비, 비었다
아 아 아파서 말도 안 나온다
피 피 피만 핑글핑글 나온다
쓰 쓰 쓰라려서 눈물만 핑핑 쏠린다
어려서는 왜 엄마가 나를 이해 못하시는지, 왜 내 맘도 몰라주고 그렇게 일방적이신지,
섭섭했는데
내가 지나온 과정인데도 나 역시 아이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 실수가 잦다.
시인은 어쩜 이렇게 쪽집게처럼 그들 생각을 고스란히 보여주시는지. 신기하다.
출근길에 동행하며 몇 번이나 웃음을 뿜었는지 모르겠다.
퇴근 후엔 오랜만에 늦은 시간 까페에서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며 자랑하듯 보여주었더니
다들 웃음이 터졌다.
그래.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막막한' 연두 같고, '발랑까진' 빨강 같은 시절이 있었지.
아무래도 이 시집은 사춘기 자녀를 둔 어른에게 더 필요한 시집인 것 같다.
재치있고, 즐거우면서도, 어른된 도리로 미안해지고, 함께 가슴아파지는 시편들이 줄줄이 있다.
그만큼 아이들의 생활과 밀착된 나름 생계형 시들이다.
아이에게 어떤 시가 가장 재밌었냐고 넌지시 물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별 대답을 안 한다.
훗. '사춘기인가?'
보름달
박성우
엄마, 사다리를 내려줘
내가 빠진 우물은 너무 깊은 우물이야
차고 깜깜한 이 우물 밖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나는 지금 기나긴 사다리의 끝을 붙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