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각자의 인생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 겁 없던나는 민낯으로, 외로움 많이 타고 조금 겁 많은 언니는 짙은 화장과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독설과 야설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둘러 사회로 한 발 나아갔다. - P126

동물들은 마리를 크게 변화시켰다. 키우는 인간 기분과 관계없이 끼니를 챙겨줘야 하고 개를 풀어 키울 수 있는 환경도 아니라서 날마다 산책도 데려가줘야 한다. 이로 인해 언니는 인내심이 상당히 강해졌고 생활도 규칙적으로 변했다. 어머니도 나보다 훨씬 열심히 곰상스럽게 돌봤다. 인간수컷이라면 이 정도로 마리를 바꿀 수는 없었을 것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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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연결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공동의 고통을 볼 수만 있다면 고통이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할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처럼 독립성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에서 타인을 위해 자신을 보존한다는 것의 사회적 의미를 알면 서로 복잡하게 얽힌 사회에서 자살을 한다는 것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주식 시장 붕괴로 큰돈을 잃거나 그 후 힘든 실업난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람들이 그토록 널리 퍼진 고난을 그토록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워 보이지만 인간 정신은 아마도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리라. 즉, 모든 불행이 특수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어떤 시대에 살고 있든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개개인이 힘든 시절을 살아 내는 데 도움이 된다. 집단 고통은 강력한 개념이다. 고통이 본인의 탓이 아니라고 설득할 수 있고 삶에 동지가 있다는 느낌을 더해 줄 수있기 때문이다. 집단 고통이라는 개념은 또한 집단적인 자살 거부를 뒷받침할 수 있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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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가 독자에게 나쁜 운이 좋은 운으로 금방 바뀌기도 한다고 상기시키듯 어떤 이들은 슬픈 감정도 바뀌며 때로는 순식간에 변한다고 강조했다. 볼테르는 이렇게 썼다. <갑작스러운 우울증 때문에 오늘 당장 자살한 사람이 일주일을 기다렸다면 살고 싶었을 것이다.> 이 말을 달리 정리하면 우리는 그때그때 아주 다른 느낌을 갖는복잡한 존재이며, 따라서 어떤 순간의 <당신>이 다른 수많은 순간의당신들의 삶을 끝낼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 - P227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자살이 특히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쇼펜하우어가 생각할 때 인간 존재에게 아주 중요한 것, 진정한 진실을 가진 유일한 요소는 통찰력을 얻는 것이며, 자살은 앞으로 통찰력을 갖게 될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는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우리가 겪는 고통은 우리가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가능성을 높여 주기 때문에 이러한 기회를 잃는 것은 특히 통렬하다. 삶의 시련은 끔찍할 수도 있지만 예외적일 정도의 진실을 알게 해주는 의지의 굴욕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자살은 소중한 도전을 회피하는 것이다. - P229

이러한 연결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공동의 고통을 볼 수만 있다면 고통이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할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처럼 독립성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에서 타인을 위해 자신을 보존한다는 것의 사회적 의미를 알면 서로 복잡하게 얽힌 사회에서 자살을 한다는 것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주식 시장 붕괴로 큰돈을 잃거나 그 후 힘든 실업난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람들이 그토록 널리 퍼진 고난을 그토록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워 보이지만 인간 정신은 아마도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리라. 즉, 모든 불행이 특수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어떤 시대에 살고 있든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개개인이 힘든 시절을 살아 내는 데 도움이 된다. 집단 고통은 강력한 개념이다. 고통이 본인의 탓이 아니라고 설득할 수 있고 삶에 동지가 있다는 느낌을 더해 줄 수있기 때문이다. 집단 고통이라는 개념은 또한 집단적인 자살 거부를 뒷받침할 수 있다. - P273

고통을 겪으면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 인류에게 봉사하는 방법이며, 그 자체로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 20세기의 인도주의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는 이 문제에 대해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 슈바이처는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가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묻는 편지가 온다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런 편지에 답장을 보낼 때 이렇게 덧붙입니다. (……) <보잘것 없는 일을 찾으십시오.> 우리 마음은 아주 큰 것,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을 찾으며 보잘 것 없는 일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는데, 그것이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보잘 것 없는일을 하면서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도우십시오.
혼자 있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과 함께 있어 주려고, 당신 자신을 위한 시간을 그에게 몇 시간 나눠 주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몇몇은 아마 뛰어난 지위를 차지하겠지요. 어쩌면 몇몇은 글 솜씨로, 또는 예술가로 유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정말로 행복해질 사람들은 봉사하는 법을 찾아 발견하는 사람들뿐이라는 것닙니다. - P275

월리스의 화자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틀렸음이 증명된다. 용기는 종종 현실을 극적으로 바꿀 때가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버틸 때 필요하다. 카뮈는 우리에게 현실의 낯섦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낯선 현실에 대처하라고 충고한다. 현실의 낯섦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받아들임으로써 말이다.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생각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카뮈가 자기 생각을 써서 세상에 내놓은 행동자체가 봉사였다. 우리가 자기 확장을 위해서 글을 쓰고 출판하려고 생각하면 아마도 실망할 것이다.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불행하다거나 심지어는 자살한다는 수많은 이야기에서 보듯이, 성공이 항상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열망을 채워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우리의 글쓰기가 그들과 연관되는 방법이라고 이해한다면 우리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우리는 독자가 우리를 공동체의 일부로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모른 채 외로움에 대한 글을 쓸수도 있지만, 그 사실을 깨닫고 기억하면 우리 목숨을 구할 수 있다.
- P279

우리가 자살이라는 주제 자체를 억압하여 의식과 공적 대화에서 격리시켜 버리면 가장 연약할 때 혼자 무방비 상태로 그 문제를 갑자기 맞닥뜨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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