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회복 -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한 정의
주디스 루이스 허먼 지음, 김정아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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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연구' 3부작의 완결판 <진실과 회복>은 의학적 명명에 더해 사회적 회복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트라우마>에서도 계속적으로 사회적 정의 문제를 논의해왔지만, <트라우마>와 관련된 계보가 밝혀지고, 더 이상 트라우마 내지는 PTSD가 진단명으로서 의심되지 않는 시점에서 비로소 정의를 논의할 토대가 다져진 듯하다.

역사적 맥락

<트라우마>를 읽으면서도 히스테리, 전쟁 후유증, 정치적 테러를 포함하는 방대한 맥락에서 명료하게 와닿는 개념을 알아갈 수 있었는데, <진실과 회복> 역시 1부에서 권력의 다양한 측면, 독재, 평등, 가부장제와 같이 사회적 문화 배경을 짚어가며 깊은 통찰을 끌어낸다. 다른 어떤 피해자 논의보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논의가 설득력을 갖는 것을 이러한 광범위한 분야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 때문이다. 가정폭력의 가해자와 인신매매형 성매매 포주의 수법이 공산당의 악마적 세뇌 테크닉과 얼마나 유사한지, 사실 이런한 수법은 검증된 심문 방법이자 법치의 이름으로도 얼마든지 규칙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관성을 밝힘으로써, 성범죄가 얼마나 사회 친화적인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1장을 읽으면서 암담함을 많이 느꼈다. 사회적 약자에 가해지는 폭력이 '백인 남성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고안된 시스템'(57p)인 전통적 사법기관에서 얼마나 배려되지 않는지, 그리고 하루아침에 가부장제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도 밝은 미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필요한 정의

2부에서 제시하는 정의의 비전은 진정으로 피해자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에서 시작한다. '피해자가 바라는 것'을 떠올릴 때, '과한 것', '형평성에 맞지 않는 것'을 우려한다면, 사법 시스템을 맹신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법 시스템의 장단점과 맹점의 논의에서 벗어나, 편견 없이 피해자가 바라는 것에서 정의의 개념을 찾아나가는 것은 새롭고도 유익했다. 구성요건해당성을 따지기 전에, 인정해야 할 게 무엇인지, 배상 범위를 논의하기 전에 사죄와 책임지기는 어떤 방식이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그가 너무 뻔뻔스러웠기 때문에, 잘못했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가만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의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똑같은 짓을 또 저지르리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가 또 그런 짓을 저지르게 되면 내가 자존감을 가지고 살기는 불가능하리라는 확신도 들었다.

p. 155



치유와 희망

치유에 초점을 맞춘 3부의 내용에 와서 비로소 길이 보였다. 이 책에서 추구하는 배상과, 재활 그리고 예방은 다소 급진적일 수 있다. 그러나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방향에 공감하게 된다. 한 피해자는 평생토록 치료받고자 많은 돈과 노력을 지불한 자신의 상황을 '종신형'에 비유하며, 가해자 역시 평생 배상금을 내고, 벌금이 세금처럼 빠져나가기를 바란다(177p). 이러한 바람과 일맥 상통하는 법안으로 범죄 피해자 지원법을 통해 가해자들의 벌금으로 피해자를 지원하는 진보적 모델의 법안을 제시한다. 이런 배상은 피해자와 공동체 사의의 관계를 치유할 수 있는 모델이 된다.

즉, 받지 않아야 할 상처를 받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들을 잃어버린 문제가 개인적인 불운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의 결과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리고 그런 불합리를 방치한 공동체와 문화의 쇄신이 일어날 때 진정한 회복이 있을 수 있다.



진정한 사죄도, 제대로 된 회복도 어려운 이유는 같은 세상에 너무도 다른 위치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며, 공유하는 가치가 없어서 이기 때문이다. '신뢰와 정의의 토대', '호혜의 규칙'을 염원하는 책의 마지막 문단이 비로소 시작점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 맨 마지막 문단에서 절절히 슬펐던 표현, '그 규칙들에 따라 살 수 있는 행운', 그 행운을 바라는 마음이 안전지대가 얼마나 좁고 위태로운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트라우마>에 대한 서평 때문인지, 혹은 우연히인지 모르겠지만, <진실과 회복>의 책을 제안하고 지원해 주신 북하우스 출판사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가 너무 뻔뻔스러웠기 때문에, 잘못했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가만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의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똑같은 짓을 또 저지르리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가 또 그런 짓을 저지르게 되면 내가 자존감을 가지고 살기는 불가능하리라는 확신도 들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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