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백치>를 미리 다 읽어봤더라도, 나는 이런 읽기는 영영 불가능했을 것 같다. 백치는 철도에서 만난 인물들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재회하고, 한 여자를 둘러싼 치정과 살인이 있고, 끊임없이 돈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심의 바보 같은 간질환자 미시킨 공작이 있다. 여러 인물들이 얽히고 설키며 긴 대화와 다양한 갈등 상황은 도스토옙스키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자 난관이다. 줄거리는 요약할 수 있을지라도, 크고 작은 상황 속에서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는 인간상과 섬세한 시선은 한 줄 한 줄 읽으며 느낄 수밖에 없다.
<백치>는 비록 아직 다 못 읽었지만, <죄와 벌>은 청소년기 때 읽은 걸 포함하면 다섯 번은 읽었을 것 같은데, 가장 최근에야 그 묘미에 푹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을 읽고서 <백치>를 읽으면 좀 더 여유롭게 묘미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 가지 이미지, '철도', '칼', '그림'을 중심으로 여러 장면들을 중첩해서 해석하는 석영중 교수님의 해설은 스포일러와는 전혀 다른 유용한 사유 방법, 일종의 개안이었다. 다른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유용할 것 같고, 특히 <백치>를 읽으면서 이 이미지들을 떠올린다면, 좀 더 깊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