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처 마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9
윌리엄 골딩 지음, 백지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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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골딩의 <핀처 마틴>

<파리대왕>은 친철한 순한 맛이었다, 이 책은 매운맛, 아니 쓰디쓰거나 피비린내 내지는 물 비린내가 나는 고약한 맛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고약한지

정말이지 고약한 책이다. 고약하다 고약해. 되뇌며 읽었다. 잘 안 읽히는 책을 읽을 때 내가 쓰는 방법은 한 글자 한 글자 그저 읽어 나가는 건데(이게 방법?), 전혀 속도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공포를 그려내더니, 꾸물꾸물 기어간다. 심지어 삿갓 조개는 자꾸 튀어나온다. 아... 삿갓 조개.. 뭘 하고 있는 거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움직이고 있는 거야.. 끈덕지게 사경을 헤매는 듯한 서술과, 불현듯 한 혼잣말! 갑자기 내뱉는 말은 섬뜩하리만치 절절했다. 아 진짜, 이 책 너무 고약한데?

의식이 무너지고, 광기가 느껴지고, 내면의 목소리는 스스로를 일깨운다. 버티지만 한계에 끊임없이 부딪힌다. 덮쳐오는 파도, 암석, 물…

한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가는데, 문득 닿는 심연이 있다. 정말 이렇게 처절하게 천천히 죽어가는 것도 고역인데, 아니 죽어가는 게 아니라, 죽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고역인데, 주인공의 꿈틀거림을 읽으면서, 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미치지 않기 위해 의식의 가느다란 끈을 붙잡았던 기억. 죽을 만치 고통스러웠던 순간. 그 순간이 지나고, 내가 그렇게 죽을 만치 고통스러웠던 건 아니라 생각하며, 퇴색되어갔던 느낌들이 살아났다. 이 책이 닿아있는 심연은 분명 존재한다. 삶에 대한 의지와... 이식이 어떤 가느다란 끈으로 느껴지는 아득한 정신의 노력 말이다. 나는 지성적이고, 귀중하다. 그러니 부여잡고 미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나를 놓아버리면 정말 끝이다. 되뇌는 의식과, 그걸 되뇌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영원과 같은 시간이 놀랍게 되살아났다.



그런데, 그의 기억들이 드러나면서, 주인공은 점점 더 악인으로 묘사된다. 상정할 수 있는 악인, 공감하고 동정하고 싶지 않은 악인. 왜 이렇게 고약하게 그리는 걸까, 적응할만 하나 했더니만, 이기적인 인물이 튀어나온다. 이런 주인공을 만들 필요가 있는 걸까, 어쨌든 이 책은 또다시 고약해진다. 그리고, 계속 읽을 수밖에 없게 한다.

반전

이 책은 반전을 빼놓고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반드시 모르고 읽어나가야 하는 반전이다. 반전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반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토록 처절하게 몰아붙인 주인공, 철저하게 망가뜨린 주인공에게 준비된 반전이 있다는 것,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약한 윌리엄 골딩의 한방이다.

이 책이 나에게 불러일으킨 심상, 의식의 무너짐과 지성과 삶에 대한 의지는 강렬했고, 공감받던지, 받지 않던지 와 상관없게 만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닿아있는 마지막 동질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했다.

죽음을 체험하고 죽음 끝에서 돌아와야 알 수 있을까? 그 모든 감각들을 낱낱이 풀어내는데, 처절하고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하고 살벌했다. 이 정도의 깊이, 이 정도의 집요함, 문학이, 이렇게까지 강렬할 수 있을까. 윌리엄 골딩의 고약한 성미에 신물이 날 정도였고, 그래서 그냥 다시 <파리대왕>을 읽으며 힐링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힘든 만큼 벗어나기도 힘든 책, 읽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경험이 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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