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3
버지니아 울프 지음, 공경희 옮김, 정희진 분류와 해설 / 열린책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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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은 한동안 내가 읽은 유일한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었다.

<자기만의 방>만 앞에 두고 버지니아 울프를 굳이 좋아해야 할까를 고민했었다.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는 곱씹기엔 허무하고,

연간 500파운드의 유산을 받고도,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남편을 두고도,

기어이 스스로 삶을 마감한 그녀에게 불만족했다.

여전히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만 읽다가, 다시 읽은 <자기만의 방>

‘여성과 소설’에 대한 강의록인 <자기만의 방>

울프는 강의를 의뢰받고, 여성 소설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강연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울프는 ‘여성의 본질과 소설의 본질’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이르기를 원하며, 스스로의 한계, 편견, 특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신이 도달하게 된 의견을 밝히며 청중이 스스로 생각하여 진실에 다가가기를 촉구한다.

이 강의에서 울프는 실제 사례와 허구의 사례를 사려 깊고도 철저하게 해석한다. 강연록이지만 에세이 같기도 하고, 허구의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 같기도 한 묘한 텍스트다. 특유의 사색적인 문장으로 울프는 청중 또는 독자를 자신과 동기화 시킨다. 사려 깊게 읽는다면, 어느새 그녀와 같은 지점에 서 있을 수 있다.



저항? 두루뭉술한 공감?

나는 백 년 가까이 지난 현대의 독자로서 그녀의 동기화에 저항하려고 한다. 나는 방도 있었고, 도서관도 자유롭게 다니며 교육도 원하는 만큼 받았고, 책도 무엇이든 읽고 글도 자유롭게 쓴다. 하지만 공감은 울프가 의도한 ‘여성의 본질과 소설의 본질’의 진실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다. 진실과 가까운 곳, 그곳이 어디일까? 그때와 지금은 너무도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하는 지점을 정확히 찾아내야 한다. 두루뭉술하게 공감하고 싶지는 않다.

열린책들의 <자기만의 방>은 정희진의 해설로 <자기만의 방>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정희진을 수식하는 타이틀이 항상 궁금했는데 ‘여성학자’라는 타이틀은 절묘하리만치 모호하다는 생각이다. 정희진의 해설은 <자기만의 방>의 해설로서 머물기에는 지면이 너무 협소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에게 정희진의 해설로 <자기만의 방>의 답답증이 풀리기에, 완벽한 해설이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자기만의 방>을 여러 번, 더 깊게, 더 맥락적으로 읽어야 한다. 이 작품을 서구의 여성주의 고전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리 자신을 위해서.

p. 195

좋아하지 않을 이유, 공감하지 못할 이유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읽을수록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대한 소중하게 사용하려고 애썼으며, 그럼에도 끝내 포기한 것은 불가항력이지 않았을까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그녀의 글을 신뢰하고, 페미니즘 또는 여성운동과 같은 범주, 여성작가라는 분류를 벗어나, 버지니아 울프만의 자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수많은 작가들이 고유의 자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굳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그녀에게 공감하지 않을 이유를 생각하는 것도 옹졸하고도 우스운 일이다.

페미니즘? 여성학자? 무난하게 받아들여질 공통의 언어는 여전히 부재중이다. 널린 게 지면이지만, 공유되지 않았기에 자꾸만 돌출되는 언어 덕분에 좁아지는 지면도 답답할 뿐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지점을 만들고 그 지점을 지켜주는 정희진 작가님,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그 자체로 지경을 넓혀주는 ‘여성과 소설’의 본질에 다 가있는 많은 작가님들을 좀 더 생각해 본다.

달성되지 않을 목표(183p)는 계속해서 조금씩은 달성되고 있는 중!






우리는 <자기만의 방>을 여러 번, 더 깊게, 더 맥락적으로 읽어야 한다. 이 작품을 서구의 여성주의 고전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리 자신을 위해서.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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