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동시대의 한국 소설을 기피했는데, 현실 반영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느껴져서였다. 몇 년 전 아이가 완치판정을 받기 까지 여러번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요즘은 친한 친구가 아이의 갑작스런 중병으로 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겪은 어제와 친구의 오늘을 소설로 읽는 것은 날 것 그대로의 파렴치함 또는 신물나는 느낌의 어디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하는 일은 이해의 폭을 넓히고, 치유의 길을 제공하는 것임을 경험하기에, 점점 더 용감하게 읽고 있다. 세계문학은 인간 보편의 이해를 넓힌다면, 동시대의 한국 문학은 바로 우리 사회와 주변의 이해를 넓힌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사회 곳곳이 단절된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통합할 실마리는 아마도 문학에 있을 것이다.
<죽은 자로 하여금>에서 나오는 제약회사의 리베이트나, 투약실수가 무마되는 사건, 허울 뿐인 요양병원 사업은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득 신문의 사회면을 읽는 듯한 느낌 마저 들었다. 의료비를 체납하는 장기 환자, 환자 유치와 흑자 경영을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지역 병원의 고충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이다. <죽은 자로 하여금>은 이곳에서 고뇌하는 주인공을 찾아낸다.


주인공 무주 역시 정형성을 입고 있는 인물이다. 전직장에서 문제가 붉어지자 조용히 사직하면서 지방으로 이전하고, 아내는 서울에서의 직업을 포기하고 함께 간다. 무주는 전직장과 유사한 대형 병원에 취직하고, 그 곳에서 만난 흥미로운 인물이 이 소설의 중심 사건을 만든다. 하지만 전직장과 유사한 듯 다른 문제는 여기에도 존재하고, 모양을 달리하여 재생한다. 어딜 가나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우리사회를 그대로를 보여주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