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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뤼아르 시 선집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1
폴 엘뤼아르 지음, 조윤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평점 :
폴 엘뤼아르는 자유와 사랑을 노래한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시인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란 등을 겪으면서 초기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서정시와 후기 치열하고 투쟁적인 실천시 등을 다채롭게 썼다고 한다. 삶이란 것이 원체 그렇게 서정적이고도 치열한 것이 아닐까.
그의 평화와 자유에 대한 시도 좋았지만, 인류애와 연대를 노래한 시들도 인상적이었다. 나와 너를 종합하여 우리에 도달하는 것. 나와 너는 개인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현실과 이상이 될 수도, 내면과 외면의 자아가 될 수도 있는 무한 확장 가능한 것이며 이는 때로는 각각, 때로는 함께 작용하여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일으킨다.
『고뇌의 수도』, 1926
<조르주 브라크> 중
태양에 의해 부서져 거둬들인 조개껍질들.
그래라고 말하는 숲속의 모든 나뭇잎,
나뭇잎들은 그래라고만 말할 수 있지,
모든 질문, 모든 대답에
그래서 이슬방울은 이런 그래 한가운데로 흐른다.
시적 표현 중에 가장 좋았던 부분은 “그래서 이슬방울은 이런 그래 한가운데로 흐른다.” 부분이다. “그래”라는 단어를 명사화하고 형상화하여 마치 한가운데를 거쳐 흐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당장의 삶』, 1932
<아름답고 닮은 여자> 중
하루가 저물 무렵 얼굴 하나
하루의 낙엽 속 요람 하나
발가벗은 비의 꽃다발 하나
숨겨진 태양 전부
물 밑바닥에 있는 샘물 중에서 샘물 전부
거울 중에서 깨진 거울 전부
침묵의 저울 속 얼굴 하나
하루의 마지막 빛들을 쏘기 위한
다른 조약돌 가운데 조약돌 하나
잊힌 모든 얼굴과 닮은 얼굴 하나.
그리고 이 시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도 생각이 나고, <자화상>도 생각이 난다. 하나이기도 하고 모든 것이기도 한, 일부이기도 하고 전부이기도 한 그 어떤 것.
<그러나 빛은 내게 주었지> 중
그러나 빛은 내게 우리의 만남이 새긴 음화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주었지. 나는 여러 존재 중에서 너를 알아보았어,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을 때, 그중 다른 한 존재만이 그 이름들을 증명했지, 그것은 항상 같은 이름, 네 이름이었어, 나는 존재들을 변화시켰지, 충만한 빛 속에서 내가 너를 변모시켰듯이, 누군가가 유리컵 안에 담아 샘물을 변모시키듯이, 누군가가 타인 손을 잡아 제 손을 변모시키듯이.
위 시는 가장 와닿았던 시이다. 샘물을 유리컵에 담는 행위가 샘물에 한계를 두고 그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 새로운 형태를 얻게 되는 것, 긍정적인 변화로 해석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요즘 나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다. 서로 영향을 주며 닮아 가고 있음을 긍정하는 마음.
『열린 책 I』, 1940
<이곳에 살기 위하여> 중
우리는 험난한 산과 바다를 지나간다
미친 나무들은 맹세하는 내 손과 맞선다
떠도는 짐승들은 내게 그들 삶의 토막들을 제공한다
무슨 상관인가 내 이미지가 늘어났던 것이
무슨 상관인가 자연과 거울이 흐려졌던 것이
무슨 상관인가 하늘이 비어 있던 것이 나는 혼자가 아닌 것을.
『시와 진실 1942』, 1942
<자유> 중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림자 드리운 물레방아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
욕망 없는 부재 위에
헐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되찾은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너를 알기 위해 태어났다
네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자유여.
위 시는 제2차세계대전 중, 독일 점령기에 비밀리에 인쇄되어 영국 공군의 비행기에 실려 프랑스 전역에 뿌려졌고, 이를 읽은 프랑스인들에게 크나큰 용기와 희망을 고취 시켰다고한다. 시가 직접적인 효용성을 갖기를 바랬다는 시인. 시대별로 선별된 시집을 읽으며 시대에 따른 변화를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시인은 “핵심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말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말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자주 강조했다. 전반기의 시들에서 간결한 시어로 핵심을 표현하고자 노력했고, 후반기의 시들에서는 열거법과 반복의 기법을 즐겨 사용하면서 다채로운 시어로 이를 현실화, 대중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 작품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