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일 (반양장) 창비청소년문학 109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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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제본을 바탕으로 쓴 리뷰여서 실제 페이지수와 다를 수 있음)

 

책은 첫 페이지부터 나를 멈춰 생각하게 했다.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다.” (p.7)

나는 다만 안전하고 싶다.” (p.61)

 

내 마음에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많아 꼭꼭 걸어 잠군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 처음 책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 마음은 불안하고 위험한 것 투성이어서, 차라리 얼어붙었으니 흘러나올 길이 없어서 나는 이내 안전하다는 뜻일까? 그렇게 걸어 잠궈야만 안전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라니...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그 마음이라는 것이 잠궈 보호하지 않으면 남들에 의해 쉽사리 깨지는 것이어서. 내가 단단하게 버텨왔던 것들이 내 것이라고 믿었던 마음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듯이 또는 아무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무너져 흘러내리고 넘칠까봐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얼어붙어있을 때는 큰 바람에도 잔물결하나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녹아버리고나면 애써 버티고 있던 마음이 작은 바람에도 일렁일까봐 무서웠던걸까. 흔들리면 안돼서, 흔들릴까봐 무서웠던걸까.

 

우리는 그저 손을 잡고 있었고,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p.160)

 

온 학교가 고요에 잠겨 있었다. 김픈 호수에 잠겨 든 것처럼 차갑고도 어두운 호수에, 얼어붙은 호수에. 손끝도 달싹할 수 없었다. 손끝을 움직인대도, 울며 소리친대도,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그 무엇도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p.264)

 

은기라는 애는 없었던 때로,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몹시 안전했던 때로.” (p.284)

 

은기가 자전거를 타는 마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은기도 이렇게 달렸겠지. 바람을 타고, 바람이 우는 소리만 가득한 세계로. 그 세계는 안전했을 것이다.” (p.286)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프고 추운 마음에도 영영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어 나는 문을 걸어잠궜지만, 내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 내 비밀번호를 알아채 줄 만큼 가까운 누군가가, 너무 갑작스럽지 않게 서서히, 그 영영 잃고 싶지 않은 것이 깨어지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천천히, 계절이 바뀌듯 나를 녹여주길 바랐을까. 하는 생각.

 

깊은 호수에 잠긴 것 같았다. 물결 하나 없이 잔잔한, 고요한. 햇살을 가득 받아 따뜻한, 그리고 환한. 손 끝만 움직여도 공기가 물결이 되어 은기에게 전해질 것 같았다. 여기, 호정이가 있어, 라고.“(p.91)

 

좋은 날들도 있었을 텐데, 많았을 텐데, 사람의 마음은 수학적이지 않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더하고 빼서 등호의 답을 구하는 게 아니다. 튜브에 누워 파도를 타듯 오르락내리락. 때로는 잠기고 때로는 떠오른다.“ (p.304)

 

이렇게 바위처럼 얼어붙었어도 일단 녹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 봄을 어쩔 거야? 계절이 그렇게 무섭다니까.” (p.325)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서 나는 몹시 안전했지만, 봄이 오는 일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은 호수와 같아.” (p.350)

 

우리는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 아직 사람이 덜 된 시기이고 빨리 치르고 넘어가야 할 문제의 시기로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더 이해받지 못하고 더 아프고 더 스스로를 가둬버리는지 모르겠다. 그 시기의 모든 고민과 상처와 아픔을 단지 사춘기라는 말로 쉽게 뭉뚱그려 버리니까.

 

내가 왜 이런 인간인지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

나는, 나를, 내가.“(p.246)

 

사람은 왜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제 마음의 일을 어째서 자신이 모를까. 그건 제 안에만 담긴 거라서 남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인데.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면 끝내 아무도 모를 일인데.” (p.146)

 

우리는 나의 쓸모를 강요받는다. 청소년이라고 다르지 않다. 하지만 청소년은 쓸모면에서는 무용한 것처럼 느껴져서 그들 스스로 고뇌하게 만든다. 그 무게가 얼마나 버겁고 외로웠을까.

 

그때의 은기를 생각하면 기우뚱한 가로등이 떠로른다. 한낮에 홀로 불이 켜져 있는 가로등. 그러다 밤이 되면 슬그머니 빛을 잃고 어둠에 잠기는 가로등.“ (p.23)

 

 

책을 읽으며 내가 모르고 지나갔던 청소년 시절의 내가 떠올랐고, 지금 그 시기를 치열하게 지나고 있는 나의 딸의 모습도 생각이 났다. 내 마음의 이름을 몰라서, 내 마음을 어쩌지 못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우리 청소년들이 생각났다. 책 속에는 마음이 자라지 못한 어른아이가 있었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일. 날씨에 따라 같이 맑았다 흐렸다 하는 일. 계절에 따라 얼어붙고 다시 녹고 하는 것이 호수의 일이다. 호수는 호수의 일을 다 하는 중이다. 함부로 깨뜨리거나 돌을 던지지 말고 가만히 호수가 하는 일을 지켜보면 된다. 우리는 그저 알아채주기만 하면 된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 안의 진실을 알아채고 우리의 진심만 표현해주면 된다.

 

보이지 않는 온기가 있다. 상대를 조금도 난처하게 하지 않는 위로다.“ (p.327)

 

사실이 아닐지라도 거기에는 어떤 진실이 있다.” (p.28)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 중 한 부분이 떠올랐다.

 

겨울에는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오래 추워봐여 한다고 말한 시인이 있다. 겨울을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듯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선을 갖지 못한 적이 더 많다.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

 

어쩌면 강도 영영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어, 소리를 얼려두나 보다. 어느 때 산과 땅을 울리도록 그리운 소리가 터져 나오기를 기다리며, 얼음 모자를 쓰고 있는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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