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해서 집어든 책이다.
언제까지나 내 곁에서 내 편이 되어주고,
내 밥을 차려주고, 나를 응원했다가, 나를 혼내고,
사소한 일에도 간섭하던 그런 건강했던 어머니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어쩌면 그동안 어머니를 못살게 굴었던
형벌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지금 내 곁에서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가 있다면 나는 말 없이 어머니를 안아드릴것이다.
어머니의 잔소리 마저 더 없이 그립고,
듣고 싶고, 만지고 싶은 지금에서야
너무 늦게 그 좋은것을 깨달은거 같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야기란, 말하는 행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이야기는 나침반이고 건축이다. 우리는 이야기로 길을 찾고, 성전과 감옥을 지어 올린다. 이야기 없이 지내는 건 북극의 툰드라나 얼음뿐인 바다처럼 사방으로 펼쳐진 세상에서 길을 잃어 버리는 것과 같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는 당신의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혹은 그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p13
듣는다는 것은 귓속의 미로에서 소리가 사방으로 돌아다니게 허락하는 것이며,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거꾸로 그 길을 되돌아서 그 소리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이다. 이 듣는다는 행위 말이다. 이는 당신이 각각의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 당신의 고유한 언어로 그것을 번역하는 것, 당신이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게 당신의 우주에서 그 자리를 찾아 주는 것, 그리하여 그것이 당신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을 한다는 것은 감각의 미로를 통해 들어온 정보를 맞아 주기 위해 손을 뻗는 것, 그것을 껴안고 그것과 섞이는 일이다. 즉 타인의 삶이 여행지라도 된다는 듯 그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p284
고대 그리스어 ‘시그노미(sungnome)‘ 라는 단어가 있다. ‘이해하다, 공감하다, 용서하다, 봐주다‘라는 뜻을 모두 담고 있는 이 단어는 생각과 느낌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이해가 용서 혹은 대상 자체의 출발점이라고 제안한다. 이 단어의 범위는 이해를 위해 감정이입이 필요하고, 감정이입에 이르기 위해 이해가 필요하며, 감정이입은 또한 용서임을, 이 모든 것은 서로서로를 도우며, 함께 이루어지는 것임을 암시한다. 어쩌면 그것들은 처음부터 따로 있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영어에서는 ‘이해하다(understanding)‘가 그런 식으로 사용되며,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종종 이해를 먼저 구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태도가 변명의 남발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p340~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