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기본적으로 타자와 매우긴밀하게 관계를 맺는 행위이며, 그렇기 때문에 번역에는 번역가가 한 인간으로서 타자와관계를 맺는 일반적 방식이 반영된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서양을 직접 만나지 못한사실, 다시 말해서 일본을 통하여 서양을 간접적으로 만난 사실이 한국 근대사가 안고 있는비극이다."
즉 번역가는 외국어를 붙들고 나의 언어에서 나오는 존재이다.
외국어 원문의 목소리가 나의 목소리와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한국어라 해도 대개는 나의 언어가 아닌 다른 한국어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실존하는 한국어는 이 제3의 언어를 흡수하면서 그 외연을 확대해나갈 수도 있다. 따라서이 외연 바로 너머에 한국어의 가능성으로서존재하는 제3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거창하게 말하자면 한국어에 대한 번역가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언어적 선택이 번역가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문화적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언어의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번역가, 외국어와 이질적인 인식 방식을 매개로 나의 언어를 밖에서 바라보는 특권을 누리는 번역가가 다시 그런 유아적 단계로 퇴행할 필요가 있을까? 번역가는 다른 사람의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기본적인 능력을 갖추는 동시에, 번역가의 근본적 지위에 걸맞은 언어적 선택, 문화적 선택을 해야 한다. 스스로 좋은 번역을 결정해나가야 한다. 이런 결정의 전제가 되는 공간, 실존하는 언어에 직접 의지할 수 없는제3의 언어의 공간은 대단히 불안한 곳이다. 그러나 동시에 번역가가 가장 창조적으로 문화에기여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