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이라는 스캔들
나이토 치즈코 지음, 고영란 외 옮김 / 역사비평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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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특하면서도 ‘평범한’ 문제의식 덕에 책 참 잘 읽었다. 뭐랄까, 스스로 학문적 오리엔탈리즘을 경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씩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연구 성과를 읽다보면 방법론의 측면에서 나도 모르게 ‘와, 와’ 거리게 될 때가 있다. 예전에 어느 선생님에게 일본이 지닌 “제국의 경험”과 학문의 스탠스가 어떤 영향을 지니고 있는지, 여담 식으로 들은 기억이 난다. 그 때는 흘려들었지만, 사실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소재의 유연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國史’라는 틀 안에서 ‘오~’하는 상상력을 기대하기는 힘들다(그렇다고 ‘帝國史’가 그것을 담보해 준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도 나오다시피 일본의 식민주의가 만들어 낸, 모순덩어리인 경계선은 자유롭기는커녕 소름끼칠 정도로 강력한 규정을 만들어낸다).

   내가 ‘와, 와’ 거리게 된 이 책의 방법론은 미디어가 ‘이야기’라는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재생산 양상에 대한 것이다. 사실 이 책이 연구하고 있는 위생, 신체 등의, 타자를 만드는 도구는 연구 소재 자체로만 봤을 때는 지금 그렇게 새롭지는 않다. 여기에 더해 기본적으로 젠더적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 역시 그렇게 오래 전 일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한창 그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또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선택한 사료로서 신문과 잡지 등을 선택한 것도 마찬가지로 ‘흔한’ 일이다. 놀라운 것은 ‘이야기’라는 양식 자체, 그것이 지닌 근대성에 주목하고, ‘질릴 정도로’ 그 이야기에 파고든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렇게 파고들기 위해 저자가 섭렵한 책의 폭은 참으로 넓다. 이러한 독서의 폭은 사료에만 집중하려는 전통적인 역사학 연구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참고할 만한 점이 아닐까?

  책의 내용 자체도 엄청 매력적이지만, 이 내용을 끌어내는 분석 방법이 오히려 더 흥미롭다. 이를테면 저자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것은 “모순으로 가득차고 파탄을 일으키면서도 끝까지 파괴당하는 일 없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제국의 논리를 재현하기 위해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야기’에는 “아무리 강하게 정형의 힘에 얽매인다 해도 모순에 가득 찬 양의성이 깃들어 있다.” 이와 같은 ‘이야기’의 의미는 그대로 그녀의 문제의식이 되며, 분석의 틀을 형성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야기’는 그 구조에 원래부터 모순을 지닌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 꺼림칙함을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캔들을 희구한다. 모순을 희석시킬 수 있는 새로운 스캔들의 주인공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과거 스캔들의 주인공은 망각되고 ‘암살’된다.

  이를테면 ‘민비’는 암살되기 전까지 여성성을 강조하는 이야기 구조의 주인공이었다. 민비는 조선의 다른 이름으로 타자화되었다. 이것은 여성(조선)에서 남성(일본)으로 권력이 이양되는 것을 통해 식민주의를 관철시키고자 했던 일본의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이 기대의 결말은 언제나 균열을 일으킨다. 이후 민비를 둘러싼 다양한 에피소드가 이야기에서 사라지고 정형화된 민비의 이미지만이 남는다. 즉 망각되는 것이다. 대신에 엄비, 영친왕 등이 새로운 여성성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즉,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 책 속에 등장하는 다른 사례들도 내용은 다르지만 그 분석 구조는 같다. 이러한 결론은 식민주의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근대 全시기를 관통하며, 오늘 날까지 지속될 수 있는지, 그 생명력의 근원을 생각하게 한다. 혹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식민지주의’는 생활 속에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평가이지만 저자의 방법론은 그야말로 훌륭하다. 특히 시계열적인 분석에 이어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이야기 구조의 공간 이동은 일본의 식민주의, 국민국가 담론의 외부적 확장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우선 일본 내부에서 ‘피와 병’의 표상을 통해 여성성의 이미지가 타자화된다. 그리고 이 이미지가 에조, 조선 등을 비롯한 식민지와 동일시된다. 이러한 기본 구조를 형성한 채 이야기는 정말 다양하게 응용된다는 것이다. 망각의 장치도 새롭게 발견한 측면이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기도 했는데, 우리가 공식적으로 알고 있는 ‘민비’의 사진이 실은 확인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182쪽 사진). 惡后의 이미지를 우리가 가시화해 왔던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근대의 젠더적 시각이 어떻게 탄생하였는지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헤쳐 나가자고 독자에게 설득하는 책이기도 할 것이다.

  여러 많은 측면에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렇게 독자에게 생각을 강요(?)하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다. 모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정말 ‘와, 와’ 거리면서 봤다. 그러나 평소에 젠더적 문제의식으로 쓰인 다른 책들을 읽었을 때처럼 목에 조그만 가시가 걸린 것 같은 사소한 ‘꺼림칙함’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의문이다. 여성성이라는 젠더가 근대를 분석하는 강력한 축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근대를 설명하는 데에만 전유되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대체로 젠더적 문제의식을 지닌 학자들은 역사의 단절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볍게 이야기한다면 근대에 이르러 ‘국가’와 지식인이 여성을 피와 병으로 덮어씌우기 전에도 여성은 타자였다. 타자로서의 표상 자체는 같았던 것이 아닐까? 푸코를 공부하면 이런 꺼림칙함이 좀 해소되려나? 그래도 그 이전까지는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던 것처럼 근대에 있었던 모든 일들은 전근대에도 있었다는 명제를 ‘실천’하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조금 더 의미가 있다.

  또 하나, 저자가 설명한 ‘이야기’의 의미는 젠더적 관점만이 전유할 수 있는 걸까? 질문이 좀 구리기는 하다. 아마 저자는 많고 많은 이야기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상당히 고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질문하고 싶다. ‘이야기’의 생명력은 균열과 이를 봉합하려는 데에서만 비롯되는가?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을까? 담론은 언제나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는 데에만 이용되는 것일까? 다른 것에 이용되는 것은 없을까? 이를테면 연대에 활용되는 측면은 없는가? 결국 저자는 미디어와 국가의 관계가 굉장히 밀접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미디어 비평에서는 맞는 것인지, 이 부분도 조금 공부를 해봐야겠다. 

 

  어쨌든 저자의 향후 작업이 너무 기대된다(이미 나와 있는지 찾아 봐야겠다). 이 책은 1912년(메이지)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1912년 이후 일본 속의 이야기 구조는 무엇을 스캔들로 만들며, 무엇을 암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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