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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 ‘서울의봄’에서 군사정권의 종말까지 ㅣ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4
정해구 지음 / 역사비평사 / 2011년 5월
평점 :
올해는 ‘2011년’이다. 새삼스럽게 강조하는 이유는 이 책이 전두환 정권을 ‘역사학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그리고 이 책이 제목을 통해서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전두환은 80년대 한국정부의 대통령이었다. 우선은 내용의 특징을 논외로 하더라도 그 때부터 가늠해도 갓 30년을 넘어서는 오늘 날, 이 시대를 역사로서 다룬다는 것 자체가 한국현대사의 의미 있는 정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이 ‘좋은 책’으로 평가받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이 책은 정말 유용(?)하다. 뭐, 어줍지 않게 역사학을 공부한다고 “설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특정 전공을 정한 상황에서 전두환이나 노태우가 역사책에 등장하고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그것이 어떤 내러티브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연구 수준이 어디까지 왔는지 등등을 직접 접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나 같은 ‘시민’을 위해 정말 안성맞춤인 책이다.
책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줄거리에 대해서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독자마다 해석은 다르고 뇌리에 남는 장면도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 중에 ‘민주화의 한국적 맥락’을 분석하면서 지역주의가 발현되는 장면 분석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또한 민중운동이 시대를 거쳐 사안별 시위 -> 체제 자체에 대한 저항 ->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저항 식으로 ‘진화’하였다는 분석도 탁월하다고 본다. 다만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보다 수많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을 어떻게 독해했으며,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다른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나는 “어떤 시대가 역사학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할 때”의, 뭐랄까, 구속이나 규정력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긴장감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개념이 적확한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책이 서술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개념은 ‘국가’와 ‘사회’이다. 이와 맞물려 서술 구도 역시 ‘억압하는 국가’와 ‘대항하는 사회’로 설정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특징들은 이 책으로 하여금 역사학에서 부르는 ‘민중운동사’ 카테고리 속에 포함되게 하는 배경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아마 저자도 분명히 의도하고 있는 바일 텐데 촘촘히 살펴보면 차이는 존재하지만,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을 개념상 대략 등치시키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저자의 의도를 반영한다. 이 책의 서술에서 그 주인공은 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상황이라기보다는 ‘민중’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변혁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다. 게다가 이 책의 행간에는 저자가 현 정권에 하고 싶은 말들처럼 여겨지는 해석들이 녹아 있다. 예를 들어 항쟁에 대한 설명에서 ‘주도세력이 없었다’거나 ‘중간층도 지지했다’ 등등의 해석은 마치 작년 ‘촛불시위’를 해석하는 진보세력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어쨌든 큰 틀은 이렇다.
‘민중운동사’나 ‘민중사’로서 이 책을 분류할 수 있다면 약간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효과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최근 식민지 시기의 ‘민중’에 대한 해석으로서 점점 주도권을 잡아나가고 있는 방법론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방법론이란 결국 ‘민중’의 개념을 다시 고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이들에게 드리워진 마르크스주의의 그림자를 희미하게 하고(완전히 걷어내자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생활이나 일상 등을 통해 당시 사회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나도 이러한 방법론이 나온 문제의식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즉 당시의 ‘민중’에게 ‘변혁주체’라는 틀을 굳이 씌우지 않아도 당시 사회상에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은 오늘 날의 현실을 사는 ‘민중’의 모습으로부터 야기된 면이 있다. 즉 이러한 ‘민중사’의 방법론은 역사학의 실천성이나 현재성을 현실에 맞게 성찰하자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고 하겠다.
이것을 이 책과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조금은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나오지 않는가? 현재를 기점으로 먼 시기를 연구하는 방법론보다 가까운 시기를 연구하는 방법론이 ‘후퇴’한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사료’라는 측면에서도 80년대는 식민지 시기나 다른 시대보다 양적으로 보다 많은 사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어떤 시대를 비로소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연구하기 시작할 때에 항상 ‘운동사적 관점’에서 시작하게 되는 것일까? 일제시대사가 현대사로 불렸던 과거에도 연구의 시작은 마찬가지였다. 뭐,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적 맥락이 있었다. 하지만 연구대상이 되는 시기가 점점 올라오면서도 그 출발이 지녔던 특징은 대략 같았던 것 같다. ‘민중사’가 아니라 정치사나 경제사도 마찬가지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이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질문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물론 이 책의 주제가 한국 현대사의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에 민중운동사의 전통적인 방법론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또한 다른 무대에서 내가 앞에서 이야기한 관점이 이미 작동되고 있는 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한 연구자가 모든 것을 커버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자신의 문제의식과 자신이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에 맞는 연구를 각자가 진행하는 가운데 학문은 발전해 왔다고 할 수도 있다. 서술의 흐름상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나는 “사회변혁의 현재성”을 ‘대중’이 다시 고찰하게 한다는 면에서 이 책에 대해 꽤 감동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 ‘감동’과는 다른 결이다.
이렇게 이야기해 보자. 《스카우트》라는 영화가 있다. 본 지 꽤 되어 정확한 것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대학교 야구부의 어떤 스카우터가 선동열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면서 겪게 되는 사건들을 다루는 영화다. 시대적 배경은 전두환 정권기이다. 주인공의 연인은 당시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대학생 운동가였다. 시위가 일상이었던 그 시절 주인공은 야구부원으로서 ‘어쩔 수 없이’ 시위학생들을 진압하게 되는데, 이를 목격하게 된 그 연인은 이별을 선언한다. 주인공은 이별의 이유를 알지 못하며 지내다가 광주로 내려갔을 때 그 연인과 재회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나중에 이별의 이유를 알게 된 주인공은 항쟁에 참여하게 되고 선동열 스카우트 작전은 그가 경찰에 연행되면서 실패하게 된다.
내가 굳이 이 영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영화를 막 보았을 때 주인공이 운동에 가담하게 되는 과정을 상당히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두환에 대해 “군대에 있을 때 같이 축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참 남자답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등, 당시 사회의 민주화 열풍을 전혀 내면화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연인과의 재회를 통해 이별의 이유를 알게 되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이것이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픽션인 것은 확실하지만, 주인공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은 마치 ‘일상’이 ‘저항’으로 전환되는 다양한 회로 중에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즉, 민주화운동의 내부에는 사회변혁을 위한 의지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다양한 흐름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80년대 역사 연구의 ‘시작을 알리는’ 이 책은 이런 흐름을 포착하고자 노력하는 책은 아니다.
어떤 시대를 역사학적으로 상대화시키는 작업은 언제나 그렇듯이 녹록치 않다. 더구나 ‘처음(학술서로서 이 책이 처음은 아니겠지만)’은 더욱 힘들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도 함께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연구자가 ‘의무적’으로 그 시대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이 내포하는 사회변혁에 대한 지향성을 충실히 보여주고, 그 지향성의 한계와 ‘현재성’을 성찰하게 하는 좋은 책이면서, 동시에 어떤 시대를 역사학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할 때 놓이게 되는, 일종의 딜레마가 아직은 해결되기 요원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서 그 공부길을 시작한 선배 학자들이 우리에게 준 ‘선물’일 수도 있고, 혹은 ‘저주’일 수도 있다. 책 참 잘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