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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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 도시를 여행하며 정세랑 작가 자신의 이야기와 작품 탄생의 뒷이야기 등을 담은 에세이.

여행은 늘 그렇듯 계획대로만 진행되진 않는다.
새롭고 경이로우며 매 순간 설레지만, 낯선 곳에서 긴장도 놓지 않아야 하는 법.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당시 당황스러웠던 경험도 추억으로 미화되어 ‘역시 집이 최고‘지만 우리는 또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여행하며 눈에 보이는 세상은 아름다운데, 낙담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반인륜적인 뉴스는 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려오는지.
이 책의 제목 앞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가 생략되어 있지 않을까.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여행 전 잔뜩 기대하며 설레고, 여행 중엔 충만함이 가득 차고, 여행 후엔 상실감이 찾아오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작가와 함께 걷고 있었다.
작가의 추천 여행지와 맛집, 여행지에서 떠올리는 책을 나의 리스트에 올리는 일은 덤이다.
책을 덮은 지금 약간의 여행 후유증이 느껴진다.
여행 가고 싶다.

어쨌건 좋아하는 것을 열렬히 좋아하는 편이고, 새로 좋아할 만한 것을 만날 준비가 항상 되어 있기도 해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뭔가 힘든 일을 만나 마음이 꺾였을 때 좋아할 만한 대상을 찾으려고 하면 이미 늦은 감이 있다. 괜찮은 날들에 잔뜩 만들어 두고 나쁜 날들에 꺼내 쓰는 쪽이 낫지 않나 한다. - P41

세계는, 인류는, 문명은 순식간에 백 년씩 거꾸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럴 때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견뎌야만 한다. - P47

지구는 45억 년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항성과 행성의 수명이 다하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 텐데, 우리는 짧은 수명으로 온갖 경이를 목격하다가 가는구나 싶었다. 경이를 경이로 인식할 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질 것이다. 덧없이 사라진다 해도 완벽하게 근사한 순간들은 분명히 있다. - P75

소소한 것, 언뜻 무용해 보이는 것, 스스로에게만 흥미로운 것을 모으는 재미를 아는 사람은 삶을 훨씬 풍부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수집가만큼 즐거운 생물이 또 없고 수집가의 태도는 예술가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항상 다니는 길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 자신이 사는 곳을 매일 여행지처럼 경험하는 사람들이 결국 예술가가 되니까. - P95

마음속의 저울이 잘 작동하는 사람들과만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것 같다. 마음속의 저울은 옳고 그름, 유해함과 무해함, 폭력과 존중을 가늠한다. 그것이 망가진 사람들은 끝없이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힌다. 사실 이미 고장 난 타인의 저울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저 내 저울의 눈금 위로 바늘이 잘 작동하는지 공들여 점검할 수밖에. - P107

메모리얼파크 바깥에는 그날 순직한 구조대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었다.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도록 닦는 사람은 사실 먼지보다 망각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죽은 자들을 모욕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억을 단단히 굳히지 못하는 공동체는 결국 망가지고 만다. - P116

필수적인 휴식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고 일부에게만 주어지고 있는 것 같다. 누구나 당연히 인간적인 휴식을 누릴 수 있는 사회는 요원해 보이고, 혹사와 착취는 종종 근면과 편의의 표면을 하고 있어 구분을 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듯하다. 모두가 쉴 때 쉴 수 있게, 일하다 병들거나 죽지 않게 조금씩 불편해지는 것도 감수하고 싶은데 변화는 편리 쪽으로만 빠르고 정의 쪽으로는 더뎌서 슬프다. - P150

여행한 공간이 늘어나고 또 늘어나면 정보를 건질 그물망이 촘촘해져서 책이 훨씬 재밌어지는 게 아닐지, 그렇다면 지금껏 놓친 정보는 또 얼마나 많을지, 종종 허술하게 흘려보냈을 반짝임들을 안타까워한다. - P220

좋아하는 대상을 정교하게 좁혀나가는 데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사람 내 작가야, 내 화가야, 그 그림 내 소유는 아니지만 내 그림이야....... 모호함을 덜어내고 확신을 보석처럼 꽉 쥐는 일의 충족감이 있었다.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이 쉬워진 세상이지만,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 분명 더 행복하지 않을까? - P362

영영 비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이 책의 장면들은 흩어져 사라진 것들 뒤에 남은 잔여니까. 모래 그림을 보존하려는 노력처럼, 사람들이 기록하고 또 기록하며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을 포착하려 애쓰는 게 좋다. 그러다 보면 아주 희귀한 알갱이들이 전해지기도 한다고 믿는다.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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