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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미래 - 반종교와 무신론을 넘어서 ㅣ 대우휴먼사이언스 1
이태하 지음 / 아카넷 / 2015년 11월
평점 :
『종교의 미래』는 우리를 종교에 관한 현대적 논의의 중심으로 이끕니다. 저자는 로고스(이성)와 뮈토스(신화)의 대립양상을 추적하며 무신론, 도구주의, 근본주의 등을 아우르는 종교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이해하기 용이하게 서술하였습니다. 많은 철학자, 종교학자의 글을 인용하며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였음에도 저자의 논의가 산만하지 않은 것은 책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 일관되고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종교는 에토스(윤리)적 실천에 근거한 신비주의 종교입니다. 이때의 신비는 이성에 의해 제거될 수 없으며 실증의 대상이 아닌, 종교의 고유한 영역을 지칭합니다. 신비 그 자체가 우리 삶의 기초가 될 때 우리는 삶에 대한 경건한 태도를 지닐 수 있습니다. 삶에 대한 경건한 태도는 유한한 인간이 삶 속에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합니다. 저자의 이와 같은 주장은 무신론과 근본주의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습니다. 1장 1절의 마지막 문단에서 언급된 학문적 태도와 종교적 태도를 이 책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학문적 태도에 따라 책을 읽는다면 우리는 저자가 사용한 개념의 의미, 논의 전개 방식, 주장과 근거의 타당성 등에 중점을 두게 됩니다. 이것은 책에 대해 이론적, 관찰자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독자가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종교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함께 고민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 책을 종교적 태도에 따라 읽는 것이며, 책에 대해 실천적, 참가자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학문적 태도를 견지하며 책을 읽고자 했을 때, 저는 우선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목은 『종교의 미래』인데 어째서 저자는 ‘기독교의 미래’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끌어가고 있는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저자는 불교 경전을 인용하며 종교의 기복성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기독교에 대한 논의에 포섭됩니다. 불교 자체에 대한 독립적 논의는 아니었습니다. 우리사회에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 원불교 등의 4대종교와 이단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러 군소 종교가 있습니다. 이단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종교를 제외하더라도 기독교는 종교의 하위범주입니다. 기독교의 특징적 성격을 전체 종교의 특징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가 각 종교의 특징을 이론적으로 꿰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런 의문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문에 기반 하여 책의 제목을 『기독교의 미래』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말꼬리 잡기 방식의 지적은 저자의 문제의식, 주장, 책의 내용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질문은 ‘종교에 대한 이 책의 논의가 기독교를 중심으로 전개될 수 있는 이유, 달리 말하면 저자가 기독교에 수많은 종교에 대한 대표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입니다.
저자는 종교와 미신을 구획 짓습니다. 그 기준은 성과 속의 구분에 근거하고 있는 듯합니다.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의지처가 되었던 종교, 주술적 성격이 강한 속으로서의 종교는 기복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여 미신으로 분류됩니다. 성의 관점에서 이해한 종교는 인간 삶의 참된 의미를 실존으로서 강조합니다. 저자는 유한한 존재자인 인간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제시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종교 중에서도 사랑 또는 자비라는 가치를 강조하고 있으며, 인간으로부터 헌신적 삶을 이끌어내고자 합니다. 이러한 성격은 다른 종교에도 적용되는 것이며 종교가 지금 우리에게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였지만, 그것은 기독교에서 종교의 공통적 본질을 도출해낸 것일 뿐이지 모든 종교에 대한 논의를 기독교에 대한 논의로 환원한 것은 아니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과 속에 대한 구분은 이 책을 종교적 태도로 접근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기본적 관점이 있습니다. 뮈토스적 세계관과 로고스적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이성으로써 자연을 이해하고 지배하려는 것은 속에 해당합니다.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신화적 사유는 성에 해당합니다. 저자는 인간의 유한성에 따른 실존적 불안을 덜어준 것이 뮈토스라고 진단하였습니다. 로고스만으로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할 수 없기에 인간은 뮈토스에 의지하여 초이성적 신비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여기서 뮈토스는 로고스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제시됩니다.
한편, 저자는 우리가 로고스로써 뮈토스의 의미와 가치를 성찰하여 뮈토스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도가 지나쳐 로고스만으로 종교를 재단하려 한다면 종교의 본질인 신비는 제거되고 비합리적 요소만 부각될 위험이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우리는 우주의 많은 법칙을 로고스에 의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판단하는 제1기준은 로고스가 되었으며 물리적으로 실증할 수 없는 신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부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이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저자가 제기한 문제는 결국 “로고스가 뮈토스의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종교의 본질적 요소인 신비와 경외는 상실될 위험에 처하였다. 우리는 종교의 본질을 복원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직면한 실존적 위기를 극복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종교의 본질을 파악하여 실존하는 행위자로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전환됩니다. 저자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철학자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을 제시합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윤리적 주체인 인간은 타자의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타인의 시선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며 동시에 고통 받는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실천적 계기로 작용합니다. 저자는 레비나스의 이러한 논의에 신비를 추가합니다. 저자는 타인의 시선만으로 우리가 자신을 되돌아보거나 윤리적 주체가 될 수는 없다고 지적합니다. 타인의 시선 너머에 존재하는 신에 대한 신비한 체험이 없다면 우리는 실천으로 이끌어질 수 없으며, 인간과 신을 잇는 어떠한 종교적 수행도 부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결론을 요약하면, “신비를 이성으로써 제거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윤리적 실천을 이끌어내는 계기로서 수용한다면 우리는 삶의 허무, 죽음에 대한 불안 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결론을 수용함으로써 실존적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입니다. 이 판단의 결과는 독자 개인의 종교에 대한 태도에 변화를 야기할 수도 있고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신비는 실증적 대상이 아니라 체험의 대상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직접 그 신비를 체험함으로써 종교적 경외를 느끼지 못한다면 저자의 주장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고민이 결국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문제와 상통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시합니다. 독자 각자가 종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저자의 주장을 진지하게 성찰해본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