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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여인실록 - 시대가 만들어낸 빛과 어둠의 여인들
배성수 외 지음 / 온어롤북스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여성의 삶은 남성의 그늘 같았다. 함께 존재하되 알아봐 주지 않고, 기억해주지도 않는다. 이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정도의 차이는 있을 뿐 반복되어 왔던 역사이다. 인류의 반을, 여자가 차지하는데도, 인류사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대체 몇 줄이나 될까. 특히 사회가 안정화되고, 피라미드식 사회 구조가 형성되어 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역사상 가장 사회 구조가 안정화되었던 조선시대야말로, 여성들의 존재는 미미한 수준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가끔 기록에 쓰인 여자들은, 희대의 악녀이거나 이상화된 유교식 현모양처만이 기록될 뿐이다. 이 또한, 당시 성리학이라는 사회 근간이 만들어낸 여성형일 뿐이다. 성리학적 권계(勸誡)의 대상, 권하거나 경계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서술되고 기록에 남았을 뿐이다.
어쨌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 500년 동안, 그 반을 차지했던 여성들은 시대 상황이나, 사회 구조, 관습, 관념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있다. 비록, 그 숫자는 남자에 비해 너무나 미미하나, 그래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 책은 우리 역사상 남성과 여성의 성차별이 극에 달했던 조선 시대에 살았던 여섯 여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제일 놀랐던 것은 이 책에서 제일 먼저 다루고 있는 어을우동이다. 어을우동은,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생이 아니다. 기생처럼 해 다니기는 했지만, 출신이 완전히 다르다. 어을우동은 양가 댁 이름난 규수로서, 그것도 무려 왕실 종친과 결혼한 사람이다. 기생에 눈이 먼 남편에게 쫓겨난 어을우동, 친정으로 쫓겨나서 눈물로 짧은 시간 보내다가, 범상치 않은 여종의 "인생 뭐 있나요, 즐기며 살아야죠."라는 말에, 양갓집 규수의 얌전한 인생과는 쫑을 맺는다. 그러고 나서, 남편에게 복수하듯이, 왕실 가문의 남자들과 근친상간은 물론, 이름난 양반집 가문의 사람들, 고위 공직자들을 두루 섭렵한다. 수동적인 듯 남자들에게 접근하지만, 이는 미리 다 계산을 하고 남정네들을 유혹했던 것. 이렇게 어을우동은 소박맞은 후 4년 동안 짧지만, 아주 여러 남자들과 강렬하게 살다가 사형당해 죽었다. 왕실 종친과의 관계는 물론 천민과의 관계 때문에 사형을 당하는데, 이에 죽음에 대해 의심적은 사항이 많다고 한다. 어을우동 이전에, 어을우동보다 더 화려한 남성편력을 했던 양갓집 규수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사형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과, 어을우동과 관계했던 남자들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것, 그리고 조선 시대는 생명을 귀히 여겼기 때문에 사형에 앞서 여러 장치를 해놓았는데, 이 장치를 거의 다 건너뛰고 어을우동을 죽였다는 것. 아마도, 권력의 최 정점에 있는 사람과 관계했거나 알아서는 안되는 중요한 뭔가를 베갯머리송사에서 알아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있다는데, 어쨌거나 이 책을 읽고 단순 기생의 화려한 남성편력 가인 줄 알았던 어우동이, 이런 출신에, 이런 인생을 살았다는 것에 놀랐다. 어쨌거나 스스로 선택한 타락한 인생, 그 결과야 어쨌거나 어을우동은 자기 인생을 살아내었다. 이런 결과가 올 줄 알고 일부러, 남자들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을우동 이야기 외에는 크게 반전 이야기는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 좀 더 깊이, 그리고 그 여성들이 살던 당시 사회적 배경을 알기 쉽게 앞뒤로 설명해 놓고 있어서,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그 여성들을 좀 더 잘 알 수 있었다는 것.
신사임당은, 한국미술사 책을 몇 권 읽으며 많이 익숙한 여성인데, 이 책은 그림뿐만 아니라 어떻게 사임당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 자식은 어떻게 키웠고, 그 자식들은 어떻게 장성했는지, 그리고 그 시대는 어땠는지 설명하고 있다.
황진이는 아마도 이 책에서 제일 유명한 조선 시대 여인이 아닐까 싶은데, 황진이의 이야기는 몇몇 책에 몇몇 개의 에피소드로 전해져 올 뿐인데, 이 책의 글쓴이가 여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담아 그녀의 인생을 서술했던 게 좋았다.
허난설헌의 인생 이야기는 참으로 안타까웠고 (남편과 사이가 좋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아마도 대단한 학문적, 시적 성취를 이뤄내지 않았을까. 물론 힘겨운 시집살이 때문에 주옥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겠지만, 잘 살았다면 더 좋은 성취를 해내었을지도 모른다)
김개시는 처음 들었는데, 광해군 뒤에서 인사와 정책을 좌지우지했던 궁녀라고 한다. 외모에 가타부타 기록을 잘 남기지 않는 조선시대인데도 정말 인상적인 못생긴 외모 때문에 외모가 기록에 남아 있단다. 외모야 어떻든 사람은 지적인 면에도 끌리는데 (소위 뇌섹미) 그래서였는지, 아비인 선조와 아들인 광해군 둘에게 사랑받았다. 하지만 똑똑한 머리로 이익을 취하고, 광해군을 배신하여 말로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다루는 여성은 바로 제주의 김만덕. 제주에 3년 연속 가뭄이 들고, 제주 사람의 20% 정도가 굶주려 죽었을 때 제주의 거상 김만덕은 육지에서 살을 사서 제주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준다. 이 이야기가 궐에까지 들어가고, 김만덕은 다른 포상은 필요 없으니, 서울로 가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 유람이 소원이라고 하는데 임금은 이를 다 들어준다. 그냥 양반집 사내도 하기 힘든 소원은, 천대받던 직업인 장사꾼이 그것도 여자가 이뤄낸 것이다. 김만덕에 대해선 미담만 주로 전해지는데 이 책에서는 반대되는 평가의 이야기도 실려져 있어서,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수성가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지독하고 억척스러운지 아는 사람은 알겠죠)
시대적 한계는 있었으나 그 한계 속에서도 틈은 있다. 가족처럼 사람을 잘 만나서, 혹은 지혜로워서 등등 노력과 운으로 한계의 틈을 비집고 자기 뜻대로, 원대로 살 수 있었다. 물론 남자들에 비해 한계와 제약은 컸지만 말이다. 이 책에 실린 여섯 명의 여성들은, 여성을 넘어서서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선택과 노력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낸 사람들이라 그들의 인생 이야기가 참으로 고마웠다. 장애를 극복하고 자기 생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