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례 시간 - 수업이 모두 끝난 오후, 삶을 위한 진짜 수업
김권섭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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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입학식 날부터 고등학교 졸업식 날까지, 방학 빼고 12년 동안 매일 들었던 조례와 종례. 적지 않는 세월이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건 하나도 없는 것과 같다고 지금 기억에 남는 조례와 종례가 없다. 뭐 조례와 종례뿐일까. 사실 친구들도, 선생님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그들의 이름은 진즉에 잊어버렸고. 

며칠 전에 동네 카페에 갔다가 고등학교 동창을 봤다. 응, 만난 게 아니라 본 것. 같은 반이었던 적은 내 기억으론 한 번도 없었고, 그냥 같은 이과에다가 선택했던 제2외국어도 같았기에 복도를 오며 가며 자주 봤던 아이였다. 작년에도 그 카페에서 본 적 있었는데 그땐 배가 불렀었고, 지금은 아기와 함께였다. 그 친구를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은 그때 같은 공간에서 앉아, 같은 방향을 향해 앉아 무수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그 친구들이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할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릴 가르쳤던 선생님들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 궁금했다. 당시 선생님들의 나이는 30~40대였으니, 지금 40~60대가 되었겠다. 어느 학교에서 교장선생, 교감선생 하고 계실까, 벌써 은퇴하셨을까, 여전히 그때 그대로의 모습일까, 많이 늙으셨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중,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은 좀 젊은 축이었으니 대부분 아직 학교에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은, 나이가 아주아주 많았던 분들이 몇 분 계셨으므로 (그래봤자 50대였겠지만... 그래도 그때만 해도 50대는 노인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돌아가신 분들도 있을 거라고 본다. 

한 공간에서 그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기억에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니 좀 섭섭하다. 누구에게 무엇에 섭섭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세월에 섭섭한 것인지, 내 기억력에 섭섭한 것인지, 딱히 이렇다 할 학교생활을 하지 못한 나에게 섭섭한 것인지, 그냥 좀 그러하다. 나는 이만큼 나이를 먹어왔고, 하루도 빼먹지 않고 꾸역꾸역, 오늘까지 살아왔는데 구멍이 뻥 뚫린 것 마냥, 허전한 세월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어디 갔을까. 지금 뚜렷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나를 이루는 깊은 기억 속에는 그 하루들이 다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늦은 오후, 책상을 앞뒤로 밀고, 쓸고 왁스로 마룻바닥을 광내고 다시 책상을 정렬한 후 친구들과 잡담을 하고 있으면 곧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노랗게 빛이 바란 풍경들, 그 풍경과 함께 선생님의 말씀이 노랗게 빛이 바란 채 들려오는 듯하다. 교실은 대부분 남향이었고, 낮 동안 교실 안에 직사광선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오후, 조례할 때쯤이 되면 그 특유의 빛깔로 해가 비치고 커튼을 쳤던 것 같은데 그래서 유독 나른했던 기억이 난다. (혹은 지금 내가 만들어낸 기억일까?) 말씀들은 어디로 가고, 풍경만 남았을까. 




김권섭 선생님의 『종례 시간』은 현직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들려줬던 말들 중 학생들이 좋아한 여든여덟 편의 이야기를 골라 담은 책이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많은 책과 옛 선조들의 말씀을 참고하고, 선생님의 생각과 당부해주고 싶은 말을 덧붙인다. 실제로 이 분을 본 적도, 이 분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지만,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마음이 없으면 종례 시간에 학생들에게 해줄 말을 준비하지도 않을 테니까. 내 고3 때 담임은 편찮으신 부모님 때문에 야간자율학습 시간은 고사하고, 종례도 안 하고 퇴근하셨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병원비 때문에 고3 담임을 맡으신 것 같은데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담임을 맡지 말지, 참으로 무책임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수능을 마치고, 반 아이들이 대학 원서를 쓰는데 그때 아무런 조언도 못하고 쩔쩔매고 아이들과 갈등하던 담임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네.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고3 담임 선생님 이름을 제일 먼저 잊어버렸다. (으억,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인데. 딱 떠오름) 

그래서 아이들에게 들려줄 말을 고민하고 준비하는 선생님이 내 담임 선생님을 맡았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달라졌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는데 그 영향이 크든 작든 어쨌거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거라 본다. 

이 책에는 동양 고전에서 발췌한 많은 이야기들과 한자를 풀이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저자가 맡은 과목이 국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고전과 한자 풀이 참 재미있는데, 이 선생님이 내 담임을 맡았더라면, 어쩌면 적성에도 안 맞는 이과에는 가지 않았을 것 같고, 영 아니다 싶은 학과로 진학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쉽고 아쉬운 시간들... 뭐 어쩌랴, 나는 이렇게 흘러 흘러 살아온 것을. 

어쨌든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을 직접 들은 학생들이 부럽게만 느껴진다. 누군가의 인생은, 타인을 위해 진심을 기울여 애쓰고 노력했던 시간과 타인이 나를 위해 진심을 다하고 애쓰고 노력한 시간들로 채워지니까. 진심이 없는 시간은 텅 빈 시간, 곧 텅 비어버릴 시간이다. 

학생들에게 해줄 말을 생각하고, 찾은 이 책의 저자야말로 종례 시간을 제일 유의미하게 보낸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인생은 누군가를 위해 진심을 다한 시간들만이 의미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종례 시간 동안 성장했던 사람은 학생만은 아닌 것 같다. 누가 제일 많이 성장했을까. 바로 이 책을 쓰고, 바로 종례를 직접 한 저자가 아닐까 싶다. 부럽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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