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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8년 2월
평점 :
여기 한 여성이 있습니다.
복슬복슬 한껏 부푼 아프로헤어를 한 일본 중년 여성이요.

이 여성은 일본 고도성장기의 온갖 달콤한 열매는 한껏 따다 먹고 자란 세대입니다. 그녀는 좋은 대학에 진학했고, 역시나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신문사의 기자로 취직합니다. 그리고 1990년 대, 엄청나게 부풀었던 버블이 뻥하고 터졌을 때도 그녀는 살아남습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히 논의될 때 직장에 안전하게 안착했고, 나름 전문 직종, '깨어있는 의식의 소유자들이 일하는 곳'이란 환경 때문에 처우가 좋아 퇴사의 압력 없이 여성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월급. 당연히 많습니다. 때로는 주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옷 사는데 돈을 팡팡 씁니다. 사실 옷 사는 거 말고는 딱히 돈 쓸 데도 없죠. 하지만 모든 걸 바꿔 놓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 일은 사실 큰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생각과 마음에 스며들었고, 급기야 완전히 그녀 마음속에 자리 잡습니다.
이 일은, 이 책의 저자가 작년에 낸 책인 『퇴사하겠습니다』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별로 사이가 좋지 않던 상사의 마흔 번째 생일, 저자는 약간 적의에 담긴 말을 상대방에게 건넵니다.
"이제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네요."
하지만 되려 이 말은, 그녀의 마음에 똬리를 튼 채 그녀의 마음을 들쑤십니다. 인생이 뭔지, 어떤 삶이 만족스러운 삶인지 생각해보자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헤집고 다니는 거죠. 하지만, 누구나 알겠지만 이런 생각은 정말 중요하지만, 정말 귀찮고 짜증 나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막연하고, 피곤한 생각이기도 하죠. 그래서 그녀는 바쁜 현실 속에서 애써 이런 생각들을 잊으려 합니다.
그러다 그녀는 지방으로 발령받습니다. 아주 약간의 관광시설이 있을 뿐, 사실 아주 외딴곳입니다. 그녀는 성공하기 위해 애써 노력해 수도인 도쿄로 진출했는데, 다시 고향으로 되돌려보내진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막막하고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래도, 회사에서 그곳으로 가라 하면 가야지요. 그녀는 군말 않고 내려가 일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 대로 돈을 팡팡 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외딴 시골 같은 곳, 유배지 같은 곳에서 마땅히 돈 쓸 만한 곳이 있어야지요. 저절로 옷을 쇼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쇼핑할 수가 없어! 없으니까. ㅋ) 저절로 대형 마트에 가서 음식을 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시골 장에 가서, 그날 먹을 음식을 조금씩 사게 되었습니다. 하, 엄청나게 불편하고 짜증 날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옷 사는 것보다 더 즐겁고 재밌습니다. 늘 먹던 음식, 메뉴인데 재래시장에서 먹을 만큼만 사서 그날 바로바로 해 먹으니 음식이 너무 맛있습니다. 유배를 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녀는 사고방식, 생활 방식을 조금씩 바꾸며, 10년 정도의 기간을 두며 퇴사를 준비합니다. (퇴사 준비 기간 10년 ㅋ)
여기까지가 이 책의 저자 이나가키 에미코의 전작, 『퇴사하겠습니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퇴사하겠습니다』의 후반부는 퇴사하고 난 후의 생활을 적고 있는데, 이번에 읽은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는 퇴사하고 난 후의 생활, 아니 구체적으로 전자제품 없는 생활을 쓰고 있습니다. (퇴사 후의 생활을 총체적으로 짚진 않아요. 저는 퇴사 후의 일상, 생활 습관 뭐 그런 게 쓰여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저자의 아버지는 어느 가전 회사의 영업사원이었습니다. 잘 살진 않았지만 가전회사의 직원으로 누구보다 빨리 남들이 선망하는 가전제품을 집에 들입니다. 에... 또... 성과급을 위해 꼭 자사 가전제품을 사야 한다는 사내 규약 때문이기도 했고요. 좁은 사택에 살아도, 같은 반 제일 잘 사는 친구보다도 먼저 최신 가전제품을 가졌습니다. 컬러텔레비전도 저자가 제일 먼저 갖게 됩니다. 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컬러텔레비전을 보게 해줬을 때의 그 우쭐함이란.
가전제품 소유의 최정점은 바로 전자레인지였습니다.
뭔가 알 수 없는 일이 이 작은 상자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마법 같은 일이죠. 차갑게 식은 밥이, 이 작은 상자에 들어갔다 나오면 따뜻해졌습니다. 식은 국도 뜨끈뜨끈 김을 폴폴 내며 나왔습니다. 차가웠던 물수건이 따뜻한 물수건이 되어 나와 작은 손을 데워졌을 때의 그 놀라움이란.

가전제품은 고도성장기 때 모두가 갈망하고 원하는 것이었고, 하나씩 하나씩 소유해야만 하는 그 무엇이 되었습니다. 남들이 없는 걸 가질 때의 그 희열이 시작이었을 겁니다. 그러다 그게 꼭 필요해졌고, 그렇게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바꿔 놓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었죠.
쓰나미로 원자력발전소가 초토화되었고, 일본 전역에선 전력이 부족해졌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전력 사용 줄이기에 애씁니다. 저자도 마찬가지였죠. 그리고 그녀는 에너지의 근본부터 차분히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껏 태평스럽게 원자력 발전소가 만들어 내던 전기를 쓰지 않았냐면서요.
그렇게 절전을 실천하면서, 그녀의 삶에 이미 들어와 있는 전자제품에 대해서도 하나씩 하나씩 생각해보게 됩니다. 결국 '과연, 이 가전제품이 나에게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고, 우여곡절 겪기도 하지만 하나씩 하나씩 처분합니다.
진공청소기 > 전자레인지 > 텔레비전 > 급기야.... 냉장고까지!!
단순히 전기세를 아끼고, 전력 사용을 줄이는 게 목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을 돌아보고, 자기 삶을 돌아보고, 결국에 우리의 삶까지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불편을 받아들입니다. 불편이야말로 인간이 살아있는 것이라고요. 일본에서도 4차 산업혁명의 바람이 거셉니다. 인공지능, IoT(사물인터넷 / 참, 출판사 관계자님. 사물인터넷은 LoT가 아니고 IoT입니다. 오자 수정해주세요), 유비쿼터스....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작은 노동도 결코 봐주기 힘든가 봅니다. 아주 사소한 노동도 기계로, 컴퓨터에게로 넘기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 사실에 격분하죠. 4차 산업혁명이 바라는 세상은, 인간이 반신불수인 세상을 바라느냐며요. 불편해야 살아있는 것이고, 완벽히 편한 상태는 사망 상태라고요.

저도 동의합니다.
전작 『퇴사하겠습니다』를 읽을 때도 몇몇 부분에서 저와 생각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편한 걸 받아들이는 게 인간다운 삶이라는 걸 말이죠. 물론 이 불편함은, 자발적 불편함이어야 합니다. 타인의 강요, 어쩔 수 없는 불편은 아니어야 하죠.
똑같지는 않지만 저자와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 웬만한 제 옷은 손빨래하기, 전자제품은 가급적 쓰지 않기.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삶을 잘 컨트롤해가지만, 저는 다른 가족이 있기 때문에 공동생활에서 비롯하는 어느 정도의 타협은 필요하기 때문에 완전히 전자제품에서 벗어나는 생활은 못하고 있어요. 여러 번 바꾸려고 했지만, 가족과 갈등이 피치 못하게 일어나고, 제 성질이 자꾸만 날카로워지고, 잔소리만 늘어놓게 되니 내 가족들이 뭔 죄일까 싶고, 가족과 싸우는 삶, 갈등하는 삶은 행복과 만족과 너무나 먼 것이기에 그냥저냥 맞춘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호불호가 갈릴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미니멀라이프에 영향을 받아, 다운사이징하고 있지만, 과연 전자제품을 다 처분하는 삶을 원할까는 살며시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저자가 독자들에게 자기 삶을 살라고 설득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냥 자신의 라이프스타일과 본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런 삶도 사실 가능하답니다!'라고요.
저자는 어떻게 하다 보니에도시대의 라이프스타일, 일상의 물건을 지향하게 되었는데, 저는 조선시대의 소박한 우리 선조들의 삶을 선망합니다. 미니멀리즘, 단샤리, 북유럽... 다 좋게 생각하는데 저는 아무리 봐도 다른 것보다 우리 선조의 담백하고 정갈한 삶이 제일 좋네요. 미니멀리즘이 우리나라에 열풍인데, 왜 우리 선조들의 검소한 삶, 정갈한 세간살이들은 유행으로, 트렌드로 자리 잡지 않는지 의아하고, 사실 좀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좋은 라이프 스타일을, 선조들의 지혜가 스며있는 생활 용품을 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지, 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지.
이 책을 덮고 새삼 또 다짐하게 되네요. 이 분이 본인의 일상, 본인의 라이프스타일을 하나하나 직접 경험하고 선택했듯, 저도 그렇게 해야겠다고요. 이 분이 지극히 본인에게 맞는 라이프스타일을 개척했듯, 저도 제 라이프스타일을 스스로 개척하고, 나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지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고, 결심하고, 선택해볼까 합니다. 우선, 리스트 작성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