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읽었다.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신화』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신화』는 신문기자 출신인 김태관 씨가 쓰고, 홍익출판사에서 냈다.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는, 4차 산업혁명 시대 급격하게 발전하는 인공지능을 보고 다시 신화를 읽어야 할 때라고 진단한다. 신화는 오래된 미래이고, 2,000년 전 신화 속에 이미 이 시대의 화두, 인간 군상이 이미 다 출현했으므로. 막막하고 두려운가, 그럼 고전으로 돌아가라! 역시나 미래의 길은, 고전에 있으니.
굳이 AI 시대가 도래해서가 아니라도, 그리스 신화는 꼭 알아둬야 한다. 유럽을 비롯한 서양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은 그리스 신화를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서양 문화를 접해봐야 수박의 겉핥기로 그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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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읽었다. 이 소설은 어린 딸이 바람둥이 아버지를 보고, 괴로워하거나 힘들어하기는커녕 그의 일탈을 더 부추기고 자신을 억압할 것 같은 아버지의 애인을 궁지로 몰아 결국 자살하게끔 만드는 이야기다. 출간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21세기가 된 지금 읽어도 충격받을 사람은, 충격받을 만한 이야기이다. (물론 1954년에 출판된 작품으로, 당시만 해도 소설의 내용은 자유분방하더라 해도 외설적이거나 노골적인 묘사는 없다. 단지, 상상하면 엄청 야하고, 상상하면 엄청 막장 OF 막장이라는 것)
처음 프랑수아즈 사강의 작품을 읽었을 때,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고, 막장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라이트 노벨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는지, 왜 20세기 고전의 반열에 들어갔는지 궁금했고, 이해불가였다. 그런데,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조금씩 그리스 신화도 접하면서 왜 사강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읽히고 프랑스에서 인정받는지 알 것만 같았다. (물론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아직도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 신화, 그 서사시를 보면 사실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내용은 없다. 영웅이 태어나고, 신탁대로 양부모의 집을 떠나 갖은 고생과 모험을 하고, 결국 왕과 왕비인 친부모를 만난다. 하지만 친부모를 만난 기쁨도 잠시, 영웅은 친부모를 죽인다. 혹은 근친을 한다. 인륜을 저버렸기에 신과 요정에 쫓기는 신세가 되거나 스스로 괴로움을 못 이기고 자살한다.
그리스 신화는 보통 이야기 속 주인공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막장적 상황에서, 영웅은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완수해야 함은 당연하고, 온갖 고초와 잔인한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미션 수행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그런데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부정하느냐 이것이 영웅과 영웅 아닌 자를 가르는 것이다. 헤라클레스처럼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면 인간에서 신으로, 신분 상승(?!)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파우스트는 헤라클레스와 같은 듯, 다른 버전이라 볼 수 있다. 파우스트는 늘그막에 일탈을 꿈꾼다. 잘 살다가 늙어서 폭주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엔 신으로부터 구원받는다. 권선징악이 뿌리 깊게 내린 동양, 그것도 전통적 유교 국가에서 볼 땐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다 있냐며 발끈할 수 있지만, 이런 레퍼토리는 그리스 고전에 뿌리를 두고,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 때 되살아났으며 이후 반복적으로 재평가 받으며 셰익스피어, 라신, 코르네유 등 수많은 작가에 의해 재창조되었다. 그래서 유럽 소설들에 이런 요소들이 많이 녹아 있다. 그래서 가볍디가볍다고 평가받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작품에도 이런 요소가 스며 있고, 그래서 그녀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높이 평가하고, 평가 절하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슬픔이여 안녕』을 읽고 나서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신화』를 읽었는데, 많은 게 이해가 되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도 그리스 신화 관련 교양서적을 읽었고, 또 그리스 신화를 노래하는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읽었지만 사실 읽고 나서 인물 정리나 이야기 정리를 하지 않아서 그냥 언제나 읽을 때뿐이었다. 모든 게 조각나고, 편집된 단편적인 이야기. 그런데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신화』를 읽으니, 각 이야기마다 그리고 각 인물들마다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 것 같다. 역시나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서 설명은 제대로 잘 못하겠지만, 좀 예전과 다른 느낌이 든다. (덕분에 『슬픔이여 안녕』도 새롭게 와닿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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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신화』는 1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 1부는 올림포스 12주신과 2세대 주신에게 자리를 내어 준 1세대 주신 2명을 합해 총 14명의 신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 2부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명한 5명의 영웅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에피소드 위주가 아니라, 인물별로 이야기를 구성했기 때문에 평소 나처럼 인물이 헷갈렸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을 읽고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책의 내용은 인물에 대한 무겁고 깊은 분석이 아닌, 인물별 에피소드나 운명, 혹은 각 인물들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든 다른 이야기(버지니아 울프, 『폭풍의 언덕』, 중국 고전 등등)가 군데군데 삽입되어 있어서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그리스 신화는 읽는 사람의 의도만큼, 능력만큼 따 그만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읽는 사람이 의도한 바에 따라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다양하게 '큐레이션'할 수 있다는 의미. 본인이 의도한 만큼 이야기를 다양하게 배치, 편집, 의미를 함축를 함축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처음부터 어려운 책이나,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책을 접하면 헷갈리므로 인물별로 쉽게 정리된 책을 추천한다. 그런 책을 읽으며 스스로 정리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고전. 고전은 여전히 그 가능성이 무궁하다.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재창조 되었는데 앞으로도 그러할 것 같다. 나는 그리스 신화 혹은 신화를 매개로 새롭게 쓰인 이야기를 접할 때, 그 콘텐츠를 단순히 소비하기보다는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콘텐츠,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싶다. 능동적으로, 생산적으로 읽기!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신 분께 이 책을 추천하는 바다. 그리스 신화 속 유명한 신과 영웅을 정리하기에 참 좋다.
그리고 그냥 읽는 것도 재밌다. 신화는 막장이고, 막장은 일단 재미를 보증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