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이야기
니시 카나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생각정거장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일본 소설가 니시 가나코의 에세이입니다. 제목대로 밥에 대한 책입니다.

저자는 이란에서 태어났고, 자라기는 이집트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의 상당 부분을 외국에서 보냈는데요, 그래서 그곳에서 무얼 먹고살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나 봐요.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의외입니다. 

"일본 음식!" 

저자는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나라에 살면서 거의 매 끼니 일본 음식을 먹고 자랐습니다. 당시에는 그게 이상하다거나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못했고, 그냥 일본 사람이니 일본 음식을 먹는 게 당연한 줄 알았죠. 하지만 나중에 커서 생각해보니, (그리고 기억의 파편을 그러모아 회상해 보니) 어머니의 희생이 정말 컸고, 매 끼니 일본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 덕분이었단 걸 깨닫죠. 게다가 이런 부모 곁엔 또 대단한 지인이 있습니다. 이 가족들을 위해 일본에서부터 이집트까지 날계란 한 판을 공수해주기 위해, 비행기 타고 가는 내내 계란 한 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은 분도 있죠. 지구 반바퀴를 돌고 돌아 이집트까지 간 일본 계란입니다. 가격은 매길 수 없고, 이렇게 공수된 계란이 맛이 없을 리 없죠! 그렇게 니시 가나코는 부모님(특히 어머니)과 지인분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머나먼 타국에서도 일본식 밥을 매일 먹고 자랄 수 있었습니다. 매 끼니에 녹아 있는 지극과 정성을 먹고 자란 것이죠. 

그래서 저자는 한 끼 식사의 가치를 압니다. 일단 밥에 대한 생각이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아요. 작가여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밥에 대한 묘사, 한 끼 식사에 대한 묘사, 먹는 장소에 대한 묘사가 참 좋습니다. 그렇다고 까탈스러운 미식가는 아닙니다. 미식가보다 음식에 대해 무덤덤하면서, 자기 스타일, 선호가 확고하고 남들이 주저하는 괴식을 좋아합니다. 인간미 넘친달까요. 아마도 어릴 때 이집트에서 어머니가 정성껏 해주신 음식을 먹고 자라, 한 끼 식사를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까탈스러운 게 없고 무난합니다. 그 대신 음식에 담긴 정성과 마음의 맛을 놀랍도록 잘 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쨌든 좋아요, 이 분 스타일, 가치관이 좋아요. 

 
음식에 대한 추억과 느낌, 선호하는 음식과 식당 등 그 묘사력이 참 좋아요. 무척 마음에 들어서, 몇몇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토시 하나 빠트리지 않고 필사를 하고 싶었어요. 필사 욕구 뽐뿌! 
  
자기만의 감상과 느낀 점을 가볍고, 재밌게 쓰고 공감 가도록 잘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런 글이 무척 좋은데요, 읽는 맛이 있어요. 맛있는 밥만큼이나 맛있는 글입니다. 맛있는 밥을 먹으면 먹기 전과 먹고 난 후의 기분이 무척 다르듯, 맛있는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들뜨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어딘가 안심이 되기도 하는 그런 여러 가지 느낌이 듭니다. 
  
니시 가나코는 참 잘 ‘느끼는 사람’ 같았어요. 읽다 보면 ‘아, 그렇지, 나도 이렇게 느꼈는데 참 잘 표현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부분이 많았어요. 표현도 가볍게, 가볍게, 고개 끄덕끄덕.
  
문체는 가볍고, 솔직합니다. 글이 사뿐사뿐하달까요. 자연스럽게 같은 일본 에세이이스트(본디 그림책 작가)인 사노 요코가 떠오릅니다. 많이 닮았습니다. 같은 일본 작가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몇 문장만 읽어보고 ‘왠지 이 분, 사노 요코 씨의 글을 좋아하겠는걸.’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일본에서 작가로 활동하기 이전에 외국 생활을 장기간 한 것도 비슷하네요!
  
하지만 격차는 제법 느껴집니다. 이 격차는, 실력 차이라기보다 연륜 차이라 봅니다. 사노 요코는 1938년 생, 니시 가나코는 1977년 생이죠. 사노 요코는 이미 돌아가셨고요. 
  
사노 요코는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에세이집을 펴냈습니다(물론 새로운 이야기보다 쓴 이야기를 쓰고 또 썼던 건 단점이지만). 저 개인적으로 사노 요코가 젊었을 때 쓴 글보다 나이가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들었을 때 쓴 글을 좋아합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후에 쓴 글, 그리고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쓴 글이 참 좋아요. 삶에 대한 담담함과 담백함이 묻어있거든요. 산전수전 다 겪고, 주위 많은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그런 글이죠. 인간에 대한 기대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도 어느 정도 담담해진 후에만 쓸 수 있는 글. 사노 요코의 에세이는 어렵지 않아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은 결코 아닙니다. 귀한 글이라 생각합니다. 

시간이 흐른 후, 그것도 아주 많이 흐른 후 『밥 이야기』를 쓴 니시 사나코도 60대, 70대가 되면 노년에 사노 요코가 남긴 그런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 깊이는 덜한 느낌이에요. 덜 우러났달까, 발효가 덜 되었다고 할까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니시 사나코의 글은 대체로 솔직하긴 하지만, 일본 사람 특유의 체면치레가 좀 심한 것 같아요. 특히 지인이 해준 음식은 너무 심할 정도로 ‘맛있다, 맛있어!’라고 연발하는데요, 이 부분은 살짝 거북해요. 처음엔 '와, 정말 맛있나 봐! 나도 먹고 싶다!'라고 생각되는데 하지만 뒤에도 계속 '맛있다, 맛있어!'라고 하니 '이거 뭔가 수상한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맛있으니 맛있다고 했다 싶지만 굳이 되풀이해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뭐 아직 연륜이 덜 차서 글에서 우러나는 맛은 덜하지만, 그래도 참 기대되는 작가에요. 이름 체크해두고 국내에 번역된 책들은 읽어볼까 합니다. 
  
니시 가나코 덕분에 ‘활자밥’ 한 그릇 잘 먹었어요. 활자로 맛있는 냄새 맡고 오물오물 씹고, 맛보고, 소화시키고. 꺼억~! 활자밥 한 끼 뚝딱! 아, 이 맛. >ㅁ< 이래서 제가 음식 관련 에세이를 끊지 못하나 봅니다. 저도 니시 사나코처럼 실제 밥보다 활자밥이 더 맛있네요! 활자밥, 또 먹고 싶어요. 냠냠냠 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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