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 듯 저물지 않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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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 씨의 책을 읽었습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책 띠지엔 에쿠니 가오리 씨의 '그 사진'이 인쇄되어 있네요. :-) 여전히 반가워요♩



미노루, 쉰 살의 중년 남성입니다. 조부모와 부모님이 쌓은 인덕과 재력으로 살아가는 인물, 직업이 그냥 지역 유지입니다. 자선단체를 운영하고, 주식을 비롯한 '동산'과 아파트와 건물 등 많은 '부동산'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미술 애호가이셨던 조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조부모님 집을 미술관으로 개조해 미술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노루는 이 모든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산 관리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미노루 집안 세무사인 오타케에게 모두 맡긴 채, 본인은 독서로 하루, 하루를 보냅니다. 

직업 없이, 돈 걱정 없이, 건강 걱정 없이, 그렇게 모든 근심 걱정과 욕망, 갈망으로부터 떨어진 채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밋밋한 인생이랄까. 생각 없는 인생이랄까. 미노루의 인생은 별일 없이 흘러갑니다. 그가 하는 유일한 일은 독서이고, 유일한 취미는 소설 속에 묘사된 음식을 만들어 보는 것이죠. 책만 읽는 순박한 바보. 소설 밖의 현실 세계엔 뚜렷한 가치관이 없어서 인간 됨됨이는 모나지 않고, 인정 많고, 따뜻한 인물입니다. 

엘리트 의식 없이, 특권 의식 없이 살아가는 미노루. 정말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디 평범한데, 이 평범함이 오히려 미노루를 비범하게 만듭니다. 

한때 결혼도 했었지만, 아내였던 나기사는 책만 읽는 미노루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평범하지 않아 떠났습니다. 나기사는, 아주 평범한 남자와 재혼을 하고, 아주 평범하게 살아갑니다. 새 남편은 그냥 보통 남자처럼 직장에 다니고, 집에서 쉴 땐 멍하니 티비를 보고 이렇다 할 취미 없이 그냥저냥 보통 남자들처럼 삽니다. 나기사는 그런 새남편이 불만족스럽지만, 책 속으로 빠져들어 자기를 외롭게 만든 미노루보다는 낫다며, 이런 삶이 평범한 삶이지,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살아갑니다. 
  
미노루는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고, 다정한데 이 독서에 대한 몰입 때문에 주위 여자들을 외롭게 만듭니다. 왜 여자들이 자기에게 화를 내는지, 왜 섭섭해하는지 잘 모르죠. 책에만 집중하고, 책 속 인물에만 몰입하는데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잘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런 미노루가, 친구 오타케에게 자신이 방금 전 읽은 소설을 예로 들면서 사랑이란 무엇인지, '사랑이란 상대방의 모든 걸 사랑하고, 상대방의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어야 사랑이지'라고 주장할 땐 뭔가 묘한 느낌이에요. 책만 읽느라 주위 사람의 감정은 제대로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소설 속 인물의 사랑을 예로 들며, 친구에게 사랑에 대해 설명하고 훈수 두는 모습이 말이죠. 
  
이 소설은 미노루가 읽는 소설과 미노루가 살고 있는 현실이 교차로 편집되어 펼쳐집니다. 서로 침투하지 않는 각기 다른 세상이죠.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처럼, 액자 속 이야기와 액자 밖 이야기가 서로서로 침투하며 섞여 이야기되는 그런 소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서로 동떨어진 이야기가, 서로 경계 없이 펼쳐집니다. 미노루의 이야기가 펼쳐지거나 그 주변 사람의 이야기가 서술되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미노루가 읽는 소설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처음엔 어리둥절합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요. 게다가 저에겐 일본 사람의 이름이나, 미노루가 읽는 소설 속 인물인 북유럽 사람 이름이 헷갈리고 낯설어서 처음엔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하지만 읽다 보면 적응이 됩니다. 미노루의 이야기도 궁금하고, 끊겨버린 소설 속의 소설(북유럽 추리물, 카리브해 배경의 범죄 소설 둘 다)의 전개도 궁금하게 됩니다. 소설 하나를 읽고 있는데, 두 개의 소설 이야기가 함께 궁금해지는 경험을 했죠. 

바깥 소설 이야기, 소설 속의 소설 이야기 둘 다 맥락 없이 이어지고, 둘 다 맥락 없이 끊어지지만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흐름에 스며들어 이해하게 됩니다. 이야기가 맥락 없이 끊기거나 새롭게 시작되면, 갑자기 제가 다른 세계에 있다가 갑자기 현실로 내던져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주위 환기. 

나의 의식은, 이 소설의 미노루의 의식처럼 하나의 꼬물꼬물 살아움직이는 생명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의 의식이 어떤 이야기의 실마리를 잡고, 물면 내 의식은 그 이야기를 따라 움직입니다. 몰입을 하게 됩니다. 꼬물꼬물, 물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춤을 추는 바다뱀처럼 나의 의식은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조류의 리듬과 흐름에 맞춰 춤을 추고, 이야기의 실마리가 펼쳐 보이는 주변을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입에 물고 있던 실마리를 놓치게 되면, 원래 내 자리로 느닷없이 돌아옵니다. 

우리의 일상도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우리의 의식이라는 건, 언제나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건 아닙니다. '저물 듯 저물지 않는' 그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여기에 잠시 몰입하고 흠뻑 빠져들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다시 다른 것에 빠져들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그러기를 한평생 반복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 우리의 일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론 독서로, 때론 영화와 드라마 감상으로, 때론 기억이나 감정의 흐름에 따라서 말이죠. 옛날 일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역시 독서나 영화 감상과 다름없다고 봐요. 의식이 여기서 잠깐 떠나 저물 듯 저물지 않는 그 경계 너머로 잠시 갔다 오는 것이죠.  



처음엔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함께 펼쳐지는 듯해서 소설의 맥락을 잡지 못했어요. 어리둥절.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필력은 여전해서 계속 읽도록 만듭니다. 특별한 사건이 없을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필력이죠. (사실 전 이게 일본 소설의 매력이라고 봐요.)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은 일본 소설 치고, 약간 도톰한 두께의 소설입니다. 하지만 단박에 다 읽었어요. 훑어 읽거나 그러지 않고 정독으로 말이에요. 이것도 참 능력이라 봅니다. 특별한 것 없는데, 담담할 뿐인데 왜 계속 읽고 싶은지. 

어제 나의 하루도, 소설 속 미노루처럼, 책에 몰입하며 그러면서도 하루 일상을 잘 보내며 소설과 현실을 넘나들며 잘 보냈습니다. 독서하는 동안, 정말 잡생각일랑은 하지 않고 온전히 몰입해서 잘 읽었어요. 정말, 미노루처럼요.

소설 속 한 문단
부부란 것은 참 그로테스크하다. 결혼한 후로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을 나기사는 지금 또 한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몰라도, 아니 상대가 귀찮게 여겨질 때조차, 밤이 되면 같이 자고, 아침이 밝으면 같은 식탁에 앉는다. 조그만 불쾌함도 말의 어긋남도,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일상 속에 묻히고, 밤과 낮이 되풀이되고, 부부가 아니면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만다. 세상에서는 그런 걸 인연이라고 하리라. 그러니 인연이라는 것은 나날의 조그만 불쾌함의 축적이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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