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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페퍼 -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패드라 패트릭 지음, 이진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12월
평점 :
40년간 행복하게 살았던 부부, 그러다 아내가 죽었다. 지병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을지는 몰랐다. 남편, 아서 페퍼는 아내가 죽은 지 1년이 상실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365일, 하루 24시간 내내 그는 슬픔과 무기력 속에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각에 일어난다. 매일 같은 시각에 밥을 먹는다. 매일 같은 시각에 아내가 좋아하던 식물에 물을 준다. 정해진 일과가 있는 건 좋다. 하지만 죽은 아내에게 종속된 삶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생활이다. 너무나 정확하게 움직이는 생활은 생동력 있고, 활동하는 인간의 생활이라기보다 사자(死者)의 삶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삶.
하지만 아서 페퍼도 아내가 죽은 지 1년째 되는 날엔,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딸아이가 엄마 유품을 정리하는 게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아서 페퍼는 딸아이(아, 정말 딸이 '아이'인 것은 아니고 30대다)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결심한다. 아내의 물건을 정리하기로.
1년 만에 아내 옷장 문을 열었다. 그녀의 부츠가 눈에 띈다. 불현듯 이웃집 여자, 버나뎃이 언젠가 벼룩시장에서 산 부츠 한 켤레를 샀는데 그 안에 긁지 않은 복권 한 장이 있더라는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아서 페퍼는 별생각 없이 부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어라, 손에 무언가 집힌다. 하트 모양의 자그마한 상자다. 자물쇠가 잠겨 있었는데, 열쇠수리공으로 일했던 아서 페퍼는 손쉽게 연다. 자그마한 상자 안엔 참이 여러 개 달린 황금 팔찌가 들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화려하고 비싸 보이는 팔찌다. 어리어 중절한 아서 페퍼 씨. 팔찌를 이리저리 둘러본다.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에메랄드가 박힌 코끼리 참이다. 모양이 마음에 든다. 그런데 코끼리 참에 전화번호로 추정되는 번호가 적혀 있다. 아서 페퍼 씨는 이 상황이 모두 의아하고, 당황스럽다. 그러나 1년 만에 겨우 용기 내어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 코끼리에 새겨져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건다. 분명, 수신 지역이 인도로 추정되지만!
그리고 이 전화 한 통화가 그의 여행의 시작이었다.

도저히 아내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황금 팔찌. 그리고 팔찌에 달랑 거리며 달려 있는 참들. 코끼리 모양도 있고, 호랑이 모양도 있고, 책 모양도, 골무 모양도, 팔레트 모양도, 그리고 앙증맞은 하트 모양도 있다. 일관성 없는 참들. 하나하나에는 다 사연이 있을 것 같다. 아서 페퍼는 추리물을 좋아했다. 한평생 조용히, 그리고 평범하게 살았지만 호기심은 많았다. 이 호기심이 한 번도 그의 인생을 낯선 길로 인도하지 않았다. 모험의 삶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남들 사는 대로 살았고, 조용하지만 착실하게, 자그마한 동네에서 쳇바퀴 돌 듯 살았다. 그러니까 그의 호기심은 단지 추리물 연속극을 볼 때만 반짝였다. 그의 호기심은, 작고 소박한 호기심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기일에 발견하게 팔찌에 달린 참들에 대한 호기심은, 내일모레 일흔인 그가 평생 가졌던 소박한 호기심과 그 결이 달랐고, 그 깊이도 달랐다.
참(charm) 하나하나에 얽힌 이야기를 아서 페퍼가 하나씩 풀어 나갈 때마다, 그는 혼란스럽고, 두렵다. 아내는 사십 평생 함께 살고 이해했던 그녀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고,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산 열정적이고 모험심 가득한 매력적인 여자였다.
40년 동안 믿고, 사랑했던 아내에 생각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동안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아내는 너무나도 멋진 삶을 살았고 흥미진진한 모험을 즐겼다. 인도에도 갔고, 누구나 다 아는(아서 페퍼만 모르는! ㅋㅋ) 유명한 작가의 비서로 일했고, 심지어, 심지어.... 심지어.... (스포일러라 생략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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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장편 소설인데, 이야기의 구성, 이야기 속에 담긴 내용은 단순하고 소박하며, 독자로 하여금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정형적인 영국 소설이다. 이 책을 읽으며, 예전에 봤던 영화 <필로미나의 기적>이 떠올랐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과거를 향한 여행을 하는 이야기. 그 과거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 ‘그 사람’이라는 퍼즐을 하나씩 맞추어가는 여정.
이런 유의 영화, 이런 유의 소설을 좋아한다, 그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 가든 결국 끝은 따뜻함으로 맺는다. 얽히고설켜 복잡해 보이는 모든 상황은 깨끗하게 정리되고 마지막은 웃음과 행복이 남는다. 그리고 희망...
나는 이런 유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 책의 구체적인 결말은 읽는 동안 알 수 없으나 ‘따뜻하게 끝날 것’으로 확실히 믿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씩 읽어나간다. 언제, 어느 페이지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감동을 줄 요량으로 쓴 부분이 나올 거라 믿고, 언제든 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중간, 중간 적혀 있는 주인공의 회한과 깨달음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다, 나는 따뜻한 책, 소박한 깨달음(그것이 비록 진부하다고 해도)이 있는 책이 참 좋다. 어쩌면은 내가 이기적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악한 사람이기보다 선한 사람이길 바라고, 따뜻한 이야기에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있는 사람이길 원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기를, 따뜻한 사람이기를 문득문득 느끼고 깨닫고 싶으니까. 나의 눈물 한 방울에 내가 위로받고, 나를 신뢰하게 된다. 나의 인간성을 스스로 위로를 받고 싶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이건 그만큼 내가 나의 인간성을 못 믿는 반증일지도.
마음이 휘둘리고, 타인에 대한 날선 생각들, 반발심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울 때마다 따뜻하고, 소박한 깨달음을 얻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책을 읽는다. 올 연말에도 무엇이 내 마음을 모나고, 뾰족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화가 났고, 사람들에게 상심했었다. 앙심과 악심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는데, 이 책이 그런 날선 내 마음을 누그러뜨려주었다. 결말이 따뜻할 것이라 믿고 본 이 책은, 악하고 약한 나에게 하나의 약이자, 위안이었다.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니까. 그걸 기회가 될 때마다 느끼고 깨닫고 싶으니까.
날은 춥고, 마음은 차갑던 연말에 따뜻하게 잘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