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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인문학 - 조선 최고 지성에게 사람다움의 길을 묻다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10월
평점 :
│율곡 이이│
현재 5,000원 권 인물. 9개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지금 말로 ‘수석’)하여 ‘구도장원공’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여성 인권 신장 분위기에 힘입어 신사임당이 ‘핫피플’이 되었고, 그의 셋째 아들인 이이를 대학자보다 신사임당의 아들로 보는 시각이 강합니다. 특히 요즘 아이들, 학생들 눈엔 그렇게 보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율곡 이이는 조선 왕조 500년, 긴긴 세월 속에 살다간 수많은 위인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큼 대인이자 성현입니다. 예전에 신사임당을 대학자의 어머니로만 봤던 시각과 똑같이, 율곡을단지 위대한 여성의 아들로만 바라 볼까봐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그동안 여성은 남자의 그림자 같은 존재였기에 여성 인권 신장 운동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율곡 이이가 신사임당의 그늘에 가려질 만한 인물은 결코 아닙니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각기 최고의 성취를 이뤄냈으니, 서로의 업적을 다룰 때 만큼은 누가 누구의 어머니이고, 아들이라고 좁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독립된 존재로 바라보고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율곡 인문학│
중국 고전 사서 삼경 중 하나인 주역. 이 주역의 마지막 궤는 화수미제(火水未濟)로 ‘개울을 건너다 꼬리를 적신 어린 여우’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故 신영복 교수의 『강의』에서 접했습니다. 마지막이 완성이 아니라, 자그마한 실수로 인해서 다시 시작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을 읽고 참 감명 깊었는데, 이번에 『율곡 인문학』을 읽으면서 율곡 이이야 말로 ‘화수미제’에 해당하는 분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율곡 이이는 13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 생활을 하다가 16세 때에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여읩니다. 3년 간 시묘살이를 합니다. 율곡 이이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나 깊었던지, 정신적으로 방황을 합니다. 시묘살이가 끝난 후 19세 때 금강산에 있는 절에 들어갑니다. 조선시대에 절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사회적 매장, 즉 사회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불리고, 13세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살이까지 했던 사람이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이는 단지 불경을 외우고, 부처를 모시기 위해서 절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절에 들어갔습니다. 불교에 귀의한 지 1년이 됐을 때, 이이는 자신이 찾는 것이 불교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치고 곧장 산속 생활을 접고, 세상으로 내려옵니다. 그의 나이 20살 때입니다. 속세로 내려와 율곡은 어머니의 고향이자 외할머니가 계신 강릉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는 삶을 더 이상 헛되이 소모하지 않기 위해 <자경문>을 짓습니다. 20살에 지어 49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총 29년 동안 <자경문>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실천적 지침이 되었습니다.
『율곡 인문학』은 율곡 이이가 절에서 내려와 새로 삶을 시작하려 할 때 그 뜻을 세우고, 자신이 삶 끝까지 관철할 방향을 위해 쓴 <자경문>을 바탕으로, 이이의 삶 자취를 좇아 ‘사람다움의 길’을 성찰하는 책입니다.
이 책은 율곡 이이를 천재 위인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고 나아가려는 한 명의 인간으로 그립니다. 이이의 <자경문>은 총 11조목이지만 『율곡 인문학』 저자는 이를 7장(입지, 치언, 정심, 근독, 공부, 진성, 정의)으로 핵심 주제별로 나누고 정리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사람다움의 길은 무엇인가’입니다. 이 책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갈등하고 고민했던 모습, 장애를 극복하고자 했던 사례를 <자경문>을 바탕으로 풀어쓰고 있습니다.
『율곡 인문학』을 읽으며, 이이의 삶을 하나하나 짚어나갈 때 『주역』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주역』은 점술서이긴 하지만, 신영복 교수의 해석처럼 ‘관계’에 대한 책입니다. 모든 것은 '관계'로 결정되고, 변화되고, 나아갑니다. 율곡은 조선 역사상 손꼽힐 만한 인물이었지만 본인이 목숨 바쳐 모셨던 임금이었던 선조는, 우유부단하고 개혁과 혁신에 게을렀습니다. 그랬던 탓에 율곡은 제 뜻을 온전히 펼치지 못했습니다. 천재지변이 극심하고, 변방에 오랑캐들이 들끓어서 선조가 신하들에게 시책을 써올리라 하면, 율곡은 늘 '기다렸다듯이' 시책을 써서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시행된 것이 없습니다. 율곡은 시대와 사람을 잘못 만난 탓에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것을 이루지 못한 화수미제, 노력은 했으나 뜻은 완전하게 이루지 못한 여우인 것이죠.
선조가 율곡이 올린 시책을 그 반만, 아니 그 반에 반만이라도 실천하고 개혁했더라면 임진왜란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혹 왜란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렇게 전 국토가 유린되는 피해는 입지 않았을 거라 봅니다. 율곡 개인의 학문적 성취와 조정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분명 있습니다. 본의 아닌, 화수미제. 그럼에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타인을 원망하지 않고, 환경에 주저 앉지 않고, 본인의 뜻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늘 조정에서 물러나도, 선조의 요청에 다시 조정에 나갔던 것처럼) 비록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하더라도요.
『율곡 인문학』 속 율곡은 천재가 아니라,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 나옵니다. 이이는 어렸을 대부터 조선 제일의 천재라 불렸고, 실제 학문적 성취도 대단했지만 그는 끊임없이 배우고자 했고 무엇보다 겸손했습니다. 이 책은 그런 이이의 인간적인 모습을 <자경문>의 조목에 따라 풀어 보여줍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율곡에게서 배울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이이가 괴팍한 새어머니(오만 패악질은 고루 행하심)를 극진히 모신 이야기에 충격과 깊은 인상을 받아서였습니다.
도대체 이이가 어떤 분이기에!!'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분을 자세히 알고 싶었고, 그 마음과 실천을 본받고 싶어서였습니다.
이이가 처했던 상황과 제가 처한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감명 깊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이의 <자경문>과 그의 삶에서 본받아, 나만의 <자경문>을 짓고 실천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인생을 헛되이 소모하기 싫어서 <자경문>을 지었던 율곡처럼, 저도 더 이상 인생을 소모하고 싶지 않네요.
『율곡 인문학』은 보다 인간적인 모습의 이이를 보여주고, 독자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도록 하는 책입니다. 정답을 보여주는 책이 아닙니다. 독자가 이 책에서 무엇을 보고자 하는지, 무엇을 찾고자 하는지에 따라 다양하고 다채롭게 읽힐 책입니다. 삶에 기준을 세우고, 잘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분들에게 율곡 선생은 좋은 롤모델(사표)이 되어줄 겁니다. 이 책 속의 율곡 이이는, 죽은 대학자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