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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1949년부터 1969년까지 20년 동안 미국의 가난한 작가가 영국 고서점에 편지를 보내어 양질의 고전들을 저렴하게 산다는 내용으로, 소설이 아니라 실제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서간집이다. 이 책은 출간 후 히트를 쳤고,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무명 작가가, 자기가 쓴 작품으로는 주목 받지 못하고, 편지로 유명해지다니)
인터넷 평을 보면 이 책에 대해 칭찬 일색, 좋은 말 일색인데 나는 이 책을 못 읽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읽은 것도 아니다.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았고, 기분도 딱히 좋아지지 않았다. 내 감정이 매말랐냐옹?!
어쩌면 내가 편지 속 작가와 서점 직원의 로맨스를 기대하고 읽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휴, 클리셰를 싫어하면서도 본능적으로 클리셰부터 찾는 나를 보게!) 하지만 이 책엔 로맨스 따윈 없다. 미혼인 작가에겐 기대해볼만했으나, 영국 서점 직원은 이미 결혼을 했고, 애도 둘이나 딸린 아버지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어떤 기대의 끈이 탁 끊어져 버림. 내 기대 물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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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바르고 깍듯한 서점 직원, 프랭크. 서점의 피고용인이나 영국 신사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 편지를 주고 받은 첫해인 1949년부터 1969년 사망할 때까지 한결같다. 고객인 헬렌 한프는 시원시원하고 농담도 곧잘 한다. 때로는 심술궂은 여왕처럼 군림하며 까다롭게 책을 주문하거나 받은 책에 대해 불평불만을 해댄다. 헬렌의 무리한 요구에도 프랭크는 엄청난 직업 정신을 발휘해 구하기 힘든 책도 요령껏 구해서 저렴한 가격으로 그녀에게 보내 준다.
이 책을 소개한 글을 보면, 미국 작가와 영국 고서점 직원을 이어준 것은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하던데, 내 생각엔 그런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책'이 이 책의 핵심이고, 관계의 '매개'이지만 둘을 끈끈하게 이어줬던 건 '책이' 아니라 바로 '가난'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승전국이었음에도 전쟁 동안 잇따른 공습으로 초토화됐다. (그나마 영국이어서 덜 파괴됐을 테지만) 종전 후 4년이나 됐지만, 영국은 여전히 배급제를 시행한다. 돈이 있어도 필요한 물건과 음식을 구할 수 없었다. 영국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에도, 부활절에도 먹고, 입을 것이 부족했고, 아이들에게 신길 양말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이럴 때 헬렌이 미국에서, 영국 서점 직원들에게 계란도 보내주고, 양말도 보내주고, 귀하디 귀한 고기도 보내준다. 서점 직원들이 얼마나 기쁘고 기뻤을까. 전쟁 이후, 보지도 못했던 귀한 음식들, 귀한 물자를 받고서!
배급제가 시행되던 해의 편지들은 애틋하다. 서점 직원들이 앞다퉈가며 헬렌에게 답장쓰고 싶어 한다. 프랭크의 이웃집 할머니까지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책만 가지고, 서점 직원과 미국 작가가 끈끈하게 이어졌다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이후 인프라가 복구되고, 배급제도 끝나면서 오고가는 편지도 급속도로 줄어든다. 애틋한 마음으로 빼곡히 채워졌던 편지는 짧아지고, 차가워지고, 딱딱해진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서점 직원들과 미국 작가 간의 식어가는 마음이 느껴져서 난 오히려 씁쓸하더라. 시간이, 우정과 애틋한 마음을 더해주는 건 아니었다. 이게 참 슬프더라. 한결 같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오고 가는 편지뿐일까. 우리들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다가왔다가 물러가는 시간의 파도에, 많은 것들이 쓸려나간다. 소중한 것, 소중한 관계는 손에 꽉 쥐고, 놓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나브로 사라지고 없어져버리고 만다.
[이 책을 읽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
+ 실패한 작가라 해도, 작가의 독서량, 독서 깊이는 상당했다.
+ 영국 고서점 직원은 엄청난 식견과 지식이 있어야 하는 전문직이었다. 과연 우리나라 고서점, 헌책방 사장님과 직원은 그러하신가 궁금했다. 글쎄 잘 모르겠다. 알록달록한 책들이 중구난방으로 쌓이고, 꽂힌 우리나라 헌책방들을 보면 딱히 식견과 전문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헌책방에 갈 때마다 안 좋은 기억들을 쌓았던 나로서는, 이런 직업정신과 서비스정신이 투철한 헌책방을 애용할 수 있었던 외국인들이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나고, 억울하기도 하다. 내게도 헌책방에서 소중한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빼앗긴 기분이 들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