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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보일 때까지 걷기 - 그녀의 미국 3대 트레일 종주 다이어리
크리스티네 튀르머 지음, 이지혜 옮김 / 살림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읽은 기간/ 2017년 5월 13일-22일 (아, 이 기간 동안 이 책만 읽은 건 아니에요. 책이 상당히 두껍지만, 간결한 문체에 도보 여행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어서 몰입한 채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주제 분류/ 외국 에세이, 여행기
/읽은 동기/ 작년에 읽은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의 그 두근거림을 또 한 번 느껴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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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3대 트레일이 있다. 하나는 미국 동부에 종으로 위치하고 있는 애팔래치아 트레일(appalachian trail), 그다음 미국 중서부 로키 산맥을 따라 길이 나있는 콘티넨털 디바이드 트레일 (continental divide trail), 마지막으로 서부 태평양 연안을 따라 솟아 있는 두 산맥을 연결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pacific crest trail).
이 세 트레일 중 제일 먼저 개발된 트레일은 동부에 위치한 애팔래치아 트레일(AT)이고 그다음은 서부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마지막으로 트레일이 개발된(지금도 되고 있는) 건 중서부의 콘티넨털 디바이드 트레일(CDT)이다.
세 개의 트레일 모두 광활한 미국 대륙을 종으로 가르고 있는 트레일이라, 종주하기 위해서는 보통 5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평탄한 지역도 5개월 내내 걷는 일은 힘들 터, 이 산들은 해발도 높고, 중간중간 깎아지른 절벽에 위험한 계곡은 물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메마른 사막이 펼쳐져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트레일 종주에 도전하지만, 하나라도 종주하는 건 만만치 않다. 그러나 하나를 종주해 내면, 결코 2개까지 종주할 수 없고, 세 트레일 모두 종주하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중견기업의 임원으로서 기업 회생 분야에서 능력이 뛰어난 30대 중반 여성이었는데 어느 날 해고당하고 만다. 집으로 돌아와 실컷 울다가, 그냥 감상만 젖어 있는 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금 현재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고 싶은지 곧바로 생각한다. 그러다가 떠오른 건, PCT 종주.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곧바로 PCT 종주를 계획한다. (중간에, 저자의 친구가 마흔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뇌졸중이 와서 그 멋지던 명품 양복과 고급 차량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것은 물론, 지금 먹는 것조차 제 손으로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저자는 더더욱 PCT 종주 계획에 열을 올린다)
저자는 운동이란 젬병, 트레킹도 생활에 안정이 접어든 다음 종종 하던 취미이긴 했지만 그냥 미국 3대 트레일 종주에 비하면 그냥 안락하고 안온한 나들이에 불과했다. PCT 출발점에 도착하고 두려워하던 순간들, 나약한 마음이 몇 시간에 걸쳐 이어졌는데 흥미롭게도 막상 걷기를 시작하고,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이런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냥 도보여행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자기 속도에 맞춰 PCT를 찬찬히 걸어나간다. 그러는 동안에 만난, 수많은 스루하이커들. 저자는 그들과 때로는 같이, 때로는 각자 걸으면서 소속감을 느끼고, 즐겁고 재미난 순간들을 함께 한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PCT 종주 때는 서로 인연을 맺었던 스루하이커들과의 교류가 저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두 번째로 도전했던 CDT. 이번 종주엔 먼젓번 PCT에서 만나게 된 밥이라는 남자 스루하이커와 함께 종주를 시작했다. PCT 때 다른 여자 도보여행자의 남친이었지만, PCT 종주를 마치고 그들은 헤어진 상태. 2년이 지난 후 함께 걷게 된 저자와 밥은, 외롭고 고독했기에 함께 걸었고 사귀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갈등의 연속. 저자는 더 이상 밥과 함께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헤어지자고 했지만, 남성적이고 강해 보이던 밥은, 연약했고 고독에 취약했다. 그래서 끝까지 그 둘은 함께 걸었다. 서로 싸우고, 감정이 상할 데로 상하는 건 부지기수. 어쨌거나, 스트레스를 받고 싸우더라도 고독 앞에서는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니까.
마지막으로 도전한 AT. 저자는 두 번째 종주의 경험으로 혼자 종주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혼자여서 좋았지만, 종주의 맛은 반감되었고, AT는 구간이 짧고 상대적으로 다른 두 트레일보다 쉽다고 할 수 있었지만 결코 쉬운 트레일이 아니었다. 꽤나 오랫동안 두 발이 아닌 네 발로 기어 다녀야 함.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들고 두려운 건 AT가 인구 밀집 지역인 동부를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 조심해야 할 것은, 방울뱀과 회색곰, 흑곰이 아니다. 바로 인간이었다. 곰을 보면 잠시 주춤해 있으면 되지만, 인간을 보면 일단 경계부터 하고 여의치 않으면 도망가야 한다. ㅋㅋ 1.3km 마다에 있는 산장은, 종주에 관심 있기 보다 노는데 관심 많은 젊은이들로 북적이며 밤이 되면 술과 마약의 파티장이 된다. 이런 건 전혀 저자의 취향이 아니기에, 혼자 산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텐트를 치고 밤을 보냈다. 어쨌건, 혼자 한 종주여서 그런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느껴진 트레일이어서 그런지 다른 두 트레일과 달리 재미는 제일 덜했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만 내게 남기고. ㅠ_ㅠ
첫 번째 PCT 종주 이야기에선 어떤 희망, 가능성이 느껴져서 좋았고 (자기도 몰랐던 도보여행자 DNA, 다음 종주에 대한 기대), 두 번째 이야기는 남자와 투닥투닥 거리는 모습이, 저자 본인이야 힘들었겠지만 이야기 읽는 나로서는 꽤 흥미로웠겠다. '나도 언젠가 남자친구와 이런 여행을 하면 이럴까', 혹은 '이런 성격의 사람을 만나면 피곤하겠다', 또 '나의 상당히 좋지 않은 인성이 여행으로 드러나겠구먼', 뭐 이런 생각을 해보면서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다. 세 번째 AT는 작년에 읽었던 빌 브라이슨의 책과의 차이점, 이런 것에 주목하며 읽었고. (빌 브라이슨은 천상 이야기 꾼, 글쟁이이다)
삶에는 정답이 없고, 이렇다 할 정해진 길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아주 넓은 길이 있지만, 이 길 옆에는 작고 좁은 수많은 길들도 존재한다. 혹은 길이 없어서 누군가는 스스로 길을 내어가며 걸어가기도 한다.
저자는 30대 중반에 도보여행을 시작으로 40대가 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를 계속해서 여행하고 있다. 도시에서 멀어진 곳, 숲이나 들판, 사막의 길 위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그리고 생의 본능, 살면서 아주 작은 것에 웃고 울 수도 있는 상황들에 직접 몸을 던져서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작은 것에 감사하는 그런 길을 가고 있다. 이런 길을 가면서도 자신이 옳았나, 틀렸나를 수없이 생각하고, 좋았다가 우울했다가 화가 났다가 오락가락할 테지만, 자기가 선택한 길, 그 길 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저자가 선택한 길은, 자유였던 것이다.
저자는 좋은 집, 명품 옷/가방, 값비싼 차를 받는 대신 자신의 시간을 저당잡히고, 자신의 노동을 파는 대신 하루하루 자유롭게 한발씩 디뎌나가는 삶을 택했다.
당장에 자신의 상황에서 벗어날 순 없겠지만, 자유를 느끼고 싶고 그 길을 걸어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