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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트
나이젤 슬레이터 지음, 안진이 옮김 / 디자인이음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읽은 기간/ 2017년 2월 3일
/주제 분류/ 외국 소설 (영국)
/읽은 동기/ 음식과 관련된 따뜻한 이야기라면, 그 어떤 이야기도 먹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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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정체│
영국 요리사 겸 작가이자 푸드 칼럼니스트인 나이젤 슬레이터의 자전적 성장 소설.
2. 이 책 내용│
출판사 소개 : 최고의 요리사가 들려주는 음식과 사랑 이야기
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이런 소개는 책 읽기 전 독자에게 어떤 편견을 먼저 던져준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는 직업이 요리사인 건 맞지만, 이 책은 '요리'에 대한 이야기보다 '음식'에 얽힌 유년 시절의 한 단면, 단면과 당시에 느꼈던 음식에 대한 맛과 평가, 그 느낌, 추억이 쓰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전체적 느낌은, 요리사의 유년 이야기라기보다, 한 미식가의 성장담이었다.
중산층의 가정에 태어난 나이젤, 그의 엄마는 결혼한 지 20년 후에야 나이젤을 낳았고, 결혼하기 전엔 돈을 벌러 직장을 구하거나, 집에서 집안일도 해 본 적이 없다. 결혼한 후에 모범적인 중산층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요구되던 덕목에 부합하려고 조금 애썼을 뿐, 요리나, 구멍 난 양말을 꿰매거나 하는 일은 나이젤 엄마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부터 자기 엄마 요리 실력이 형편없고, 불 조절도 제대로 못 해서 가뭄에 콩 나듯 요리를 한다고 해도 부엌은 언제나 탄 연기로 자욱했다. 맛이 없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엄마이기에, 엄마가 만든 음식이 나이젤에게 맛있었고, 다 타버려 맛없는 토스트에서도, 그 속살에 혀가 닿을 땐 그 부드러움을 찾아내고 맛을 음미했다. 바로 엄마가 해준 토스트이니까.
나이젤의 엄마는 너무 나이 들어서 나이젤을 낳고 몸이 허약해져서 천식에 걸리는데, 그리여서 나이젤이 어렸을 때 죽었다. (이때 나이가 10살 때였나, 11살 때였나...) 외로웠던 나이젤 아버지는, 그리 오래지 않아 20살이나 어린 여자와 결혼한다. 새엄마는 청결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반질반질 집안 모든 걸 윤내고 닦고, 쓸고, 거기에다 음식 솜씨까지 탁월하다. 하지만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맛이 있어도 새엄마의 음식에는 중요한 재료 한 개가 빠졌다. 바로, '엄마의 사랑'이었다.
중산층으로 지위 상승을 위해 남편과 이혼하고 나이젤의 아버지와 결혼한 새엄마는, 아무리 음식을 맛나게 하여도, 나이 어린아이에게 제일 필요한 음식 재료인 '사랑'을 빠트리고 요리를 했으므로, 맛이 없고 서툴지만 '사랑'이 담긴 친엄마의 요리와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두 엄마의 요리 차이가 나이젤의 미각과 요리에 대한 평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아도 매 에피소드마다 은연중에 드러난다. 누구나 동감할, 동의할 그런 엄마 음식에 대한 평가들, 그에 대해 섬세하고 예민한 자식이 받는 영향.
3. 좋았던 점│
① 몇몇 책에서 읽었던 영국 요리 문화에 대해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차유진, 『손녀딸의 부엌에서 글쓰기』에서 읽었던 영국의 음식과 음식 문화를 좀 실감 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나 영국인들이 크리스마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특히나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1년 내내 기다리고 기다리는 엄청난 음식이라는 것, 그래서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들이는 그 열과 성은 엄청나다는 걸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② 나와는 너무 먼 존재인 미식가의 성장담이라면 이럴까 싶었다. 흥미로운 상상, 지레짐작.
③ 오로지 음식에 대한 추억담으로 이런 양질의 성장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소설의 세계도, 글의 소재도 실상 무궁무진하구나.
4. 아쉬웠던 점│
① 내가 모르는 음식과 재료, 영국 과자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오로지 상상에만 의존해야 했는데, 때로는 배경지식이 순백의 백지장이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구글신께 여쭤보면 이미지까지 곁들여 친절히 가르쳐주시겠지만 내가 구글신께 물어볼 마음보다 귀찮음이 더 컸다.
② 잊을 만하면 성(性) 관련 이야기가 나와서 뜬금없기도 하고, 맥락을 끊기도 하고, 비위가 상하기도 하였다. '먹는다'는 음식뿐만 아니라 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이 둘을 얼마든 엮어서 이야기를 쓸 수 있고, 나도 이 두 소재에 관심 많지만(?!) 이 책엔 좀 너무 노골적이지 않았나 싶다. 좀 더 은유적으로, 잘 썼다면 좋았을 것을. 너무 동떨어지게, 생뚱맞게 도드라지게 성(性)을 서술하였기에 전체적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고, 완전 딴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었다.
5. 잡설│
영국은 좀 희한한 나라다. 보통 영국은 음식이 맛없기로 세계적으로 소문났는데, 재밌게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들을 보면 영국 출신이 많다. 그리고 레시피 북도 세계적 스테디셀러도 여럿. TV 요리 프로그램도, 그 포맷의 출발이 영국일 때가 많다. (요리 프로그램이 상당하다고 들었다) 어떻게 음식에 악명 높은 영국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아마도 영국은 콘텐츠를 잘 개발하는 것 같다. 영국인이라면, 이 책으로도 '빌리 엘리어트' 못지않은 대단한 뮤지컬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영국인, 그들이 만들고자 한다면!!! 소재에 상관없이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 A4 종이 두세 줄이면 끝날 이야기를 불후의 희곡으로 만들고, 두툼한 책으로 불려 쓰는 그 재주만 봐도 영국인들의 이야기 짓는 솜씨는 대단한 것 같다. 콘텐츠 만드는 능력도 대단. 일본도 콘텐츠와 이야기를 잘 만들긴 하지만 그 특유의 일본식 분위기에 호불호가 강하고, 미국은 정말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긴 하나(몇몇 이름난 작가와 픽사 등), 돈 냄새나는 엉성한 3류 이야기를 압도적으로 더 많이 생산하기 때문에 어딘가 조금 부정적 느낌이다.
나이젤의 『토스트』를 읽고, 새삼 영국인의 이야기 만드는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