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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게 (반양장)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원숙한 어른이 되는 법에 관한 책.
한때 우리나라 베스트셀러였던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가 썼다. 『미움받을 용기』를 안 읽어서 어떤 느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마흔에게』를 읽어보니 어떤 느낌의 책일지 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이 책은 병과 인지 장애로 편찮으셨던 부모님을 모셨던 때의 일, 그때 저자가 깨달았던 점, 그리고 본인이 큰 병을 겪고 죽을 고비를 겪으며 느꼈던 점과 깨달음에 대해 쓰고 있다. 이제 애 키우기에서 벗어난, 그래서 부모님의 노후를 처음 겪어야 할 마흔 즈음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부모님의 노후와 본인의 노화에 대해 쓴 글로 '사노 요코의 에세이'와 '가쿠다 미쓰요의 에세이'가 떠오른다. 사노 요코 씨나 가쿠다 미쓰요 씨나 모두 전문 작가이기 때문에 심각하고 당황스러울 만한 일화도 재밌고, 가볍게 풀어써서 상당히 즐겁게 읽었다. 기시미 이치로의 『마흔에게』는 그런 에세이와 다르게 좀 푸근하고, 인생의 선배가 후배에게 다정다감하게 조언을 하는 느낌이다.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본인이 아팠던 때의 일과 부모님의 말년에 대한 일화가 나오는데 저자가 슬기롭게 잘 대처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읽으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다가 '나'에 대해서 그리고 '내 가족'에 대해서 생각이 한 번 들기 시작하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고, 옛날 생각에 눈물이 나 마음이 안 좋기도 했다.
나는 저자처럼 내가 죽을 병에 걸린다면, 부모님이 병이나 인지에 문제가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할까. 아직 내가 젊다고 생각하는 건지, 병에 걸릴 위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병에 걸리면 그냥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닥쳐 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지만, 일단 지금의 나, 이 나이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은 엄청난 것임을 알고 있어서 진짜 건강을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되면 지금의 내 생각도 바뀔 거라 보지만.
부모님의 노후는... 글쎄, 어렸을 때 할머니와 함께 살아서 늙음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다. 나는 할머니를 정말 안 좋아했는데, 할머니의 험한 말과 정 없는 마음, 막무가내의 행동 때문에 내 어린 시절은 늘 고통이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화가 나 있던 사람이라 걸핏하면 동네 사람들과 싸웠다. 그리고 정말 옛날 사람이라, 본인의 삶의 방식에 나를 꼭 맞추었는데 부산이라는 대도시에서 살면서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머리에 기름 바르고, 꽁지는 꽉 묶어 조선시대 사람 같이 다닌 초등학생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또 물이 귀한 때 살았던 분이라 씻지도 못하게 했다. 집에서는 할머니께 구박받고, 학교에서는 별나고 가까이하기 싫은 아이로 늘 혼자였다. 어쨌거나 내 기억 속의 늙음, 노인은 고집스러움과 아집, 분노, 성마름으로 기억된다. 엄마에게 시집살이도 많이 시켰는데, 어쨌거나 나에게 노인은 싫은 존재다. 나에게 아버지도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 종종 걱정이 된다. 책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도 아버지가 사이가 극단적으로 안 좋았던 적이 있지만,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에게 잘해 준 기억이 나 그런 감정들이 서서히 없어지고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나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좋았던 기억, 나에게 잘해 주었던 기억이 정말 단 1도 없어서 안 될 것 같은데.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기시미 이치로가 꼽은 <어른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요건>이었다. 요건은 이렇다.
첫째,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기.
둘째, 결정은 스스로 내리기.
셋째, 부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두 번째 요건이 인상적이었는데, 어떤 결정이든 스스로 내려야 한다는 것. 기시미 이치로는 무조건 남들이 하니까, 남들이 그러해야 한다고 하니까 싫어도 부모님에게 억지로 잘해주거나, 어떻게 하지 말라고 한다. 이게 나에게 적잖이 위로가 되어 주었다.
기시미 이치로도 직접 부딪히고 나서 깨달은 바가 있듯, 나도 내가 경험해야 할 몫이 있을 것이고, 직접 경험해야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긴 인생을 사는 동안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으면 안 되고
겪고 싶지 않은 것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 251쪽, 솔론의 말 재인용
기시미 이치로는 어느 나이의 사람, 어떤 경험을 하고 자란 사람인지에 따라 읽히는 바가 다를 것이다. 나도 저자처럼 사람 좋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안다. 나는 저자 같은 선택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과 좋은 기억을 살릴 수 없다는 것. 저자가 깨달았던, 모두가 좋고 좋은 깨달음은 얻을 수 없다는 것. 어쨌거나 결정은 나 스스로 내려야 하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질 것이다. 내 책임에서 도망갈 생각은 없다. 그리고 옛 기억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원망할 생각도 없다.
이 책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현실적인 고민을 다루고 있어 좋았고, 참고가 되었다. 이 책은 나이 든 부모님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책은 아닌데, 그냥 좀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생각들과 연결되어 이쪽으로 집중해서 독후감을 쓰게 되었다. 어쨌든, 이 책을 읽고 물렁하고 갈등하던 내가 조금 단단해진 느낌이 든다.
덧 │ 나이가 들어도 외국어를 공부하고, 원서로 쓰인 책을 읽는다는 것. 이건 정말 좋았다. 이 책 원래 한국 번역 제목이 『어머니는 병상에서 독일어 공부를 하고 싶다 했다』였는데, 나도 이 마음으로 앞으로도 외국어 공부를 하고 싶다.
아들러가 말하는 진화는 위가 아니라 '앞'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을 가리킵니다. 즉, 누군가와 비교하여 '위냐, 아래냐'라는 기준으로 측정하는 게 아니라 현상을 바꾸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이죠. - 40쪽.
외국어 공부든 그 무엇이든, 위가 아니라 '앞으로 한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