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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의 겨울 ㅣ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5
토베 얀손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7월
평점 :
외모만 보면 겨울이 제 세상일 것 같은 무민이지만, 무민은 조상 대대로 매해 11월부터 4월까지 겨울잠을 잤었다. 무민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깊은 동면을 위해 전나무 잎을 잔뜩 먹었고, 침대 옆에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후 곧장 필요할지 모를 이런저런 물건들을 희망 섞인 마음으로 잔뜩 쌓아놓았다. (실제 필요할 일은 전혀 없겠지만, 혹시나 몰라 조바심 내며 갖다 놓게 되는 물건들 말이다. 삽, 돋보기, 풍속계 같은... 응?!)
여러 준비 끝에 드디어 무민의 집에 겨울이 찾아왔고, 모두 깊고 깊은 겨울잠에 빠져들었다. 무민의 집은 고요하고 평화로웠으며 심지어 집에 있는 시계들마저 멈춰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겨울 달빛이 무민의 거실을 헤매다 무민의 침대까지 닿았고 곧장 무민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리고 무민 역사상 처음으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게 된다. 겨울 달빛이 무민의 잠을 깨워버렸고, 이제 무민이 아무리 애를 써도 겨울잠을 잘 수 없게 된 것이다.
무민은 집안의 모든 모습이 익숙했지만, 또 다른 한 편 집안의 모든 풍경이 너무나 낯설고 두려웠다. 무엇보다 끔찍하게도 혼자 내팽개쳐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서워진 무민은 무민마마에게 달려가, 엄마를 흔들어 깨워봐도 엄마는 일어나지 않았다(절대-). 외로움이 밀려들었고 무서웠다. 그래서 무민은 절친인 스너프킨이 겨울 여행을 떠나며 남기고 간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안녕.
겨울잠 잘 자고 슬퍼하지 마. 따뜻한 봄이 오는 첫날, 내가 다시 와 있을 테니까.
댐은 만들지 말고 내가 올 대까지 기다려 줘.
- 스너프킨이.

그런데 어떻게 해. 지금은 스너프킨이 온다는 봄의 첫날이 아니다. 무민은 스너프킨의 편지를 읽고, 또 읽다가 나중에는 편지 내용을 외워서 읽기 시작한다. 속삭이다가, 조금씩, 조금씩 점점 더 큰 소리로. 하지만 무민은 모두 잠들어 있는 집에 있어 봐야 아무 소용도 없겠다 싶어서 남쪽으로 스너프킨을 마중 가기로 결심한다.
눈 덮인 세상은 무민이 알던 세상과 사뭇 달라 낯설다. 생기 넘치던 세상이 어딘가 생기를 잃고 죽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길을 걷던 무민의 눈앞에 황량하고 높은 산들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보고, 만약 스너프킨이 자신이 지금 스너프킨을 만나러 가고 있음을 안다면 어떻게 해서든 가겠지만, 현재 스너프킨이 이 상황을 모르니 무민이 혼자 못 가겠다고 생각한다. 무민은 자신이 남겼던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되돌아갔다.
그런데 아까 없던 발자국이 무민의 발자국 곁에 새로 나 있었다. 무민은 새로운 발자국에 눈을 뗄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속 따라가다가 눈 뭉치를 쌓아 만든 작고 멋진 집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무민은 그의 새로운 친구, 투티키를 만나게 된다.

『무민의 겨울』은 토베 얀손의 무민 연작소설 중 다섯 번째 작품이다. 무민이 난생처음 맞게 된 겨울과 지금껏 알지 못한 낯선 존재들과의 조우, 춥고 황량한 겨울 속에서 겪는 모험 그리고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사실 연작소설 1권에 해당하는, 『혜성이 다가온다』에서부터 무민과 무민의 친구들은 거의 지구 멸망 수준의 강력하고도 위험천만한 모험을 겪기 때문에(다가오는 혜성 때문에 지구의 모든 바다가 증발하고 시뻘겋고 황량하게 변한 세상을 겪고, 때로는 인근 섬의 화산이 터져서 아주 뜨겁고 위험한 여름을 겪기도 한다), 사실 5편 『무민의 겨울』은 이전에 무민이 겪은 사건, 사고와 모험에 비하면 아주 귀엽고, 어딘가 안도감이 드는 모험이 펼쳐진다.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무민은 외로움에 사무쳐, 그 순간 겨울잠을 자고 있지 않는 스너프킨을 만나러 남쪽으로 갈 결심을 하지만, 곧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겨울잠을 자고 있는 집에 머물기로 한다. 그리고 겨울은 물자가 부족하기 쉬운 계절이니까, 집에 있는 소중한 물건들을 누가 마음대로 훔쳐 가지 않도록 집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이건 무민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기도 했으나, 당연히 무민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겨울은 누구에게나 너무 춥고 배고프고 힘든 계절이니까요.
건망증이 심한 다람쥐가 깨운 '미이'가 무민처럼 다시 겨울잠에 들지 못하고 이왕 잠 깬 거, 이 겨울을 즐기기로 한다. 미이는 성격대로 무민의 집에 몰라 들어가 은쟁반을 훔쳐 썰매로 타거나, 무민마마의 커피 주전자 덮개에 구멍을 뚫어 망토처럼 입고 다닌다('미이'는 밈블의 아주 작디작은 딸이기 때문에, 주전자 덮개를 옷으로 만들어 입고 다닐 수 있다!).
어디 까칠하고 손버릇 나쁜 '미이'뿐인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무민 골짜기에 마가목 열매와 잼이 쌓여 있다는 소문이 났고, 세상 외로운 겨울 손님들이 무민 골짜기로 꾸역꾸역 밀려든다. 이 소문은 어느 정도 헛소문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진짜 사실이기도 해서 무민 골짜기를 찾아온 외로운 손님들은 한가득 쌓여 있는 무민마마의 맛있는 잼을 실컷 먹는다. 게다가 무민 골짜기를 떠날 때는 잼을 싸가지고 감!
어쨌든 각기 보면 모두 외로운 존재들이라고 해도, 그 외로운 존재들이 함께 모이면 북적북적 시끄럽고, 종종 싸우기도 하며 함께 웃고 즐기며, 평생 잊지 못할 파티도 한다. 특히 스키 타기를 좋아하는 헤물렌이 무민 골짜기에 나타났을 땐 시끌벅적함의 절정을 치닫는다. 원래 헤물렌 종이 뭐 하나에 꽂히면 그것 하나만 파고드는 습성이 있다. 헤물렌은 특히 수집하는 걸 좋아하고 예민하고 신경질적인데, 재밌게도 이번 겨울 손님으로 온 헤물렌은 기존의 헤물렌과 사뭇 다르다. 오히려 친근하달지, 구김살 없달지, 세상 까다로운 게 없달지 매우 사교적이다(물론 다른 트롤들은 이 일방적인 '사교적임'을 상당히 싫어하지만 말이다).

이번 무민 연작소설의 5편 『무민의 겨울』의 흥미 포인트는, 무엇보다 핀란드 작가인 토베 얀손의 겨울에 대한 묘사다. 눈 덮인 겨울 전경과 고요하고 따뜻하며 어딘가 안전한 느낌이 드는 무민의 집에 대한 묘사는 정말이지 탁월하다. 겨울 나라인 핀란드에서 나고 자란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감수성과 느낌, 표현이 아닐까 싶다. 위도가 아주 높은 곳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아주아주 길고 긴 겨울밤, 감격적인 태양의 등장. 하지만 태양은 곧 지평선으로 사라지지만, 희망은 남는다. 다시 또 내일 해가 뜰 거라고, 해가 매일 조금씩 조금씩 높이 뜨다가 드디어 눈이 녹는 따뜻한 봄이 찾아오고 그날이 오면 깊은 겨울잠에 빠진 무민마마와 무민파파, 그리고 무민이 사랑하는 스노크메이든이 깨어나서 기쁘고 반갑게 만날 거란 희망. (위도가 핀란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낮은 나라에 사는 작가들은 이런 이야기를 구상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흥미 포인트는 무민이가 기존의 친구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다. 보통 무민의 모험엔 무민의 절친 스너프킨이나 스니프, 스노크 남매가 등장하지만 이번엔 사뭇 다르다. 뭔가 스너프킨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그 속을 알기 힘든 투티키를 알게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향뒤쥐들을 만나며, 무엇보다 무민으로 진화하기 전 원시(?) 트롤을 만난다는 것도 재밌었다. 이 상황을 우리 인간으로 바꿔 말하면, 여름에 사용했던 옷장을 열어봤더니 그 안에 우리 인류 직계 조상이 숨어 있다가 튀어나와 우리 집 벽난로 속에 숨어든 꼴이라 할까.
또 수르쿠라는 외로운 개의 이야기도 정말 좋았다. 수르쿠는 외로운 손님으로 무민 골짜기를 찾아왔는데 아주 작고, 비쩍 마른 약한 개이다. 수르쿠는 늘 늑대를 그리워했다. 봄이 되어 무민 골짜기를 떠난 수르쿠는 눈 덮인 외로운 산에서 늑대 무리를 기다리다, 드디어 그들을 만난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남! 수르쿠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꼬리를 흔드는데 바로 이 순간 진짜 늑대들은 꼬리를 흔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애써 이 사실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수르쿠 자기 주위에 늑대들이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을 보자 두려워졌다. 수르쿠는 늑대를 그리워했지만, 늑대들은 수르쿠를 잡아먹을 생각뿐이었다. 후회의 감정이 밀려들었지만,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하지만, 스키를 타러 떠난 헤물렌이 작은 친구 살로메와 함께 나타났고, 헤물렌이 부는 놋쇠 음악 소리에 놀란 늑대 무리들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외로웠던 수르쿠와 살로메, 헤물렌은 그들의 여행을 떠난다.
내가 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언젠가는 나를 좋아해 줄 개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 왔었어. 그런데 너는 왜 나랑 놀려고 하지 않아? (- 121쪽)
라고 말하던 헤물렌의 바람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무민의 이야기가 참 좋은 것은 공간과 계절에 대한 묘사가 탁월한 것도 있고, 또한 다채롭고 개성 강한 존재들이 서로 삐걱하며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 서로가 각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참 좋다. 무작정 착하지 않다. 무작정 나쁘지 않다. 그냥 생긴 대로, 성격 아니 성질대로 살아가며 조금 양보하고, 조금 차지하며 함께 살아간다. 때로는 스니프의 욕심과 투덜거림에 뒷목이 당기기도 하고, 자유로운 영혼인 스너프킨이 언젠가 완전히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들지만 그래도 그런 모습도 좋다. 까칠한 스니프가 무민을 위해 싸울 때 '와, 스니프! 너 정말 착하구나'하며 새로운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여행지에서 겪은 모험담을 무민에게만 들려줄 땐 나도 무민이처럼 나에게만 이야기해주는 것 같아 우쭐거려지는 마음과 뭔가 둘만 연결되는 느낌이 생생히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사람은 오직 하나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잘게 쪼개진 시간 속에서 다양한 모습을 띤 존재이니 상대방의 여러 모습을 잘 조각하고, 조립해야 한다. 이건 사람의 역량에 따른 문제로, 토베 얀손은 이런 능력이 참 탁월한 것 같다. 작위적인 선함보다, 토베 얀손처럼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동화작가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무민 이야기에 감동하고, 토벤 얀손에 경도되는 독서 시간이었다.
어서 무민의 다음 이야기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