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미술관 - 미술관 담장을 넘어 전하는 열다섯 개 그림 이야기
이소라 지음 / 혜다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대로 밤에 읽었다. 책 속에 실린 그림들이 꼭 밤에 봐야 하는 그림은 아니고 밤과 연관 있는 그림만 뽑은 것도 아니다. 다만, 저자의 문체가 차분해서 조용한 저녁과 밤에 어울렸다. 매일 밤 저자의 문체를 따라 그림과 글을 보다 보면, 조용한 미술관 한 바퀴 돈 느낌이 든다. 

이 책은 크게 15개의 작품을 다루고 그 작품의 작가와 그가 그린 다른 작품 및 연관되어 있는 다른 작가의 작품이 나온다. 그리고 각 챕터 끝엔 해당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박물관)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실려 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엔 저자가 추천하고 싶은 우리나라 미술관 몇 군데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어디서 본 듯한 작품들이다. 그러니까 아주아주 유명한 작품은 아니고,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인지도의 작품들이다. 

이 책을 읽고 마음에 들었던 점은, 내가 모르던 작가의 작품을 알게 된 거! 한때 미술사 책만 골라 읽었던 적이 있는데 이때는 정말,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유명한 작품만 책에 실려 있다. 그리고 그림을 딱딱한 어조로 설명할 뿐, 비하인드스토리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보기 드물다(눈과 귀가 솔깃하는 건 작가의 사생활인데! ㅋ). 오랜만에(미술사 책도 읽은 지 꽤 됐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들과 작품과 작가에 대한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참 쏠쏠했다. 


처음 다뤄지는 작품은 포드코빈스키의 「광분」이다. 




와, 처음부터 강렬한데! 당시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그림만 봐도 직관적으로 납득이 잘 되죠?!) 말의 표정이나 나체의 여성의 표정, 그리고 유독 강조된 여성의 가슴 등이 인상적이다. (보통 저렇게 안고 있으면 가슴이 짓눌려 있을 텐데) 어쨌든 당시 대중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지만,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사겠다고 한 사람이 제시한 가격은 포드코빈스키가 생각한 가격에 훨씬 밑도는 가격. 이 그림이 전시된 지 며칠 후, 이 그림을 그린 포드코빈스키가 작품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갑자기 칼을 꺼나 이 그림을 난도질했다고 한다. 그것도 여성이 그려져 있는 부분만! 호사가들은 포드코빈스키가 왜 여성이 그려진 부분만 난도질했을까, 궁금해하고 이런저런 이유도 생각해냈는데 제일 설득력 있던 설명은, 이 그림의 모델이 포드코빈스키가 사랑하는 여인이었으며, 이 여인과 사이가 틀어지자 그림을 칼로 난도질했다는 설명이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럴 것도 같다. 그렇게 공을 들여 그린 그림을 훼손하기가 쉽진 않으니까. 


두 번째로 다뤄진 그림은 프라고나르의 「책 읽는 소녀」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땐 '헉!' 했다. 너무 좋아서!! 저자도 책에 썼듯 무언가 몰두한 사람, 독서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어떤 아우라가 느껴지고,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뭔가가 있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도 그 느낌이 들었다. 음, 다시 보니까 뭔가 좀 작위적인 느낌이 들어서, '역시, 로코코 화가로군' 싶긴 한데 그래도 좋다. 겨자색 옷도 마음에 듦! (옷 색깔은 왜 언급해!? ㅋㅋ) 


세 번째로 다뤄진 작품은, 내가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들기도 한 비비안 마이어의 「자화상」이다. 




비비안 마이어, 이름만 들어봤고 이 분의 작품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사연도 정말 극적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그래서 영화로도 제작) 이 분의 작품이 이렇게 좋았는지 이 책 덕분에 알게 되었다. (분명히 이 분의 사진 작품을 봤을 텐데 왜 그땐 유의 깊이 못 봤을까) 그냥 좋다, 다 좋다!!! 사진도 좋고, 저자의 설명도 좋았다. 

- 마이어가 작가로서 가장 관심을 두었던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48쪽)


- 자신을 겹겹이 포장한 사람이건 아니건, 렌즈 앞에서 표정을 꾸며내는 사람이건 아니건, 진실은 카메라를 든 이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포착 시점에 의해 세상 밖으로 끌려 나온다.피사체는 오로지 작가가 집중하고 싶었던 찰나의 순간에 작가의 시점에 의해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결국 사진에 담기는 건, 피사체가 아니라 피사체를 통해 작가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이다. (53쪽)

 비비안 마이어는 사진으로 무수히 많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남겼지만, 여전히 미스터리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냥 가정부로 전전하다가 비참한 말년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냉전 시대에 스파이로도 활약했다는 소문도 있다. 하긴, 그녀의 작품들을 보면 상당히 지적이고, 무심한 듯하지만 섬세하고, 최대한 덜어낸 느낌이 들면서도 많은 말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사진을 보고 '와, 좋다'는 느낌을 잘 받진 않지만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보면, '와, 좋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으어, 넘 좋아. ;ㅅ;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다큐멘터리 영화도 찾아봐야지!


『한밤의 미술관』은 미술 작품만이 아니라, 사진 작품도 이렇게 실려 있는데, 좋았다. 이 책의 후반부에 실려 있는 안드레아 구르스키의 사진 작품도 괜찮았다. 사진은 이제 그림보다 더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이 책에 실린 사진 작품들은 비범해 보였다. 일상의 낯섦. 일상의 예술화. 하, 예술이란 이런 건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런 것. 이 책을 읽으며 또 한 번 예술에 대한 이런 느낌을 느꼈다. 



또 마음에 들었던 건, 아홉 번째 작품으로 실린 수잔 발라동의 「자화상」




수잔 발라동의 작품도 좋긴 좋았지만, 저자의 설명이 더 인상 깊었다. 


- 발라동은 시선을 소유한다는 것이 곧 대상을 판단하고 재단할 수 있는 권력이란 걸 깨달았다. (- 158쪽)


- 그녀의 그림은 억압에서 벗어난 이의 속 시원한 고발이자 일종의 반란이다. '여성의 벗은 몸을 주제로 폭넓게 작업한 최초의 여성 미술가'이자 '여성 화가로서 최초로 남녀 누드를 그린 인물' (- 162쪽)


- 발라동의 자화상은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분명 그 속엔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여러 층위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더불어 그 안에는 세상에 의해 강요받았던 '아름다워야 할 의무'를 기꺼이 던져버린 자의 눈부신 자유 또한 담겨 있다. (- 166쪽)

사회의 규율이라는 것은 누가 정해 놓은 건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끊임없이 작동한다. 이 규율, 규칙을 벗어나고 금기를 깨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도 그렇고, 100년 전에도 그렇다. 굳이 수잔 발라동이 여성이어서 대단하다기 보다, 이 책에 실린 고흐나 에곤 실레처럼 뭔가 세상이 정해 놓은 틀을 깨고, 인류가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그 경계를 확장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같다. (물론, 시간이 지나 많은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가 왔을 때라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예술이, 예술이어서 높은 평가를 받는 건 아닌 것 같다. 예술이 예술인 것은, 끊임없이 한계를 깨부수려는 노력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 실린 작품과 작가들의 이야기도 그러했다. 미술 작품은, 그 작품만을 즐겨도 좋지만 이렇게 말랑말랑하게 작품과 작가의 비하인드스토리를 알면 훨씬 재밌고 훨씬 유익하다. 이 책을 읽었던 연속된 밤들, 열대야라 덥고 불쾌했지만 이 책 덕분에 더위따위일랑 다 잊고 매일 밤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숙면 ♡






아, 이 책의 맨 마지막 작가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의 「포푸리」도 정말정말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